“미쳤어?” “미쳤구나.” “그만 둬!” “뭐 하는 짓이야?” 음.. 이 말들은 제가 이 상상소설을 쓰려고 맘 먹었을 때, 쓰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꾸짖고 있는 말들입니다.. 어찌! 감히! 겁도 없이! 사극을 쓸 생각을 할 수 있냐고.. 솔직히.. 상상하면서도 픽픽 웃었습니다. 그냥.. 정말로 얼토당토않은 상상이라서요.. 그동안의 모든 소설들이 제 머릿속에서 되는 대로 뽑아져 나온 것들이기는 하지만, 이번 소설처럼 정말로 황당무계한 설정 속에서 탄생한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언뜻언뜻 떠오르는 상상에 혼자 므흣했을 뿐.. 예전부터 판타지 무협 사극에 관심 있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술 고수들의 이야기가 좋았어요. 아무리 현대극에 상상을 가미하더라도, 이런 상상은 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퇴마물이라면 몰라도.. 그 때문에 판타지 무협물을 그리고 싶다면, 과거를 배경으로 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이왕 할 거면 우리 신이를 왕으로 만들자..!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이번 상상소설입니다. 제목 짓는 솜씨가 미천하여, 정말 단순하게 <왕(王)의 여자>로 정했구요.. 그냥 제목만 봐도 앞으로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상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왕인 신이가 자신의 여자 채경이를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이 그려질 거구요.. 아주 오랜 만에 남자 주인공이 좀 더 부각되는 소설이 될 거 같아요. 음.. 우리 신이는 못 하는 게 없는 왕으로 그려 볼 생각이에요. 현대극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온갖 술수(?)를 다 부릴 수 있는 녀석이지요. 아~ 이런 건 말도 안 돼! 하셔도 할 수 없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이니까요.. ^^;; 사극 말투나 그런 건 텔레비전에서 본 게 다구요.. 너무 어려운 옛 말투는 무시했어요. 조금 어색한 말투와 어색한 용어들이 나오더라도 그냥 가볍게 무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정보를 얻는 창구라고 해 봤자 텔레비전 사극 드라마가 다이고, 역사소설이 다라서요.. 쏭기자가 갈 데까지 다 갔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고맙습니다> 이후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는 상황에서 장난처럼 시작된 이번 소설로 저는 요즘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여전히 여러분께 어떻게 비춰질지는 장담할 수 없어 걱정이지만, 이런 소설도 즐겨 주시길 기도하면서 쏭기자의 스물 한 번째 상상소설을 반겨 주세요.. 사극이라고 너무 어색해 하지 마시구요.. 또 다른 신이랑 채경이의 사랑을 즐겨 주세요. 때는.. 그냥 아주 옛날이구요.. 배경 역시 상상의 나라입니다. 호칭이나 명칭 같은 건 조선 시대와 옛날 중국 등의 용어들이 혼합되어졌으니, 너무 깊이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솔직히 저도 구색만 맞춰서 쓰고 있어서요.. ^^;; 동시 연재 안 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남자 그 여자>랑 같이 가게 됐네요. 서로 색깔이 완전히 다르니까, 헷갈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구요.. 그러니 여러분은 쏭기자가 보여 드리는 두 가지 사랑 이야기를 받아 주시기만 해 주세요.. 끝으로 새로운 상상소설의 대문을 만들기 위해 고생 많이 하신 라니냐 대감님께 감사 말씀 전하구요.. 저는 대단히 빡센 4월호 우리 잡지 마감 대장정에 돌입하러 갑니다.(벌써 마감 모드라니, 한숨이..ㅜ.ㅜ) 정말, 부디, 재밌게 읽어 주세요~ 저는 다시 또 소설 들고 올게요.. (__) ***이번 소설은 시대가 옛날이라, 신이랑 채경이 사진 사용에 제한이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사진 삽입이 어려울 거 같구요..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할 거 같습니다. 혹시 신이랑 채경이 한복 입은 사진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은 사진 좀 올려 주실래요? 제가 갖고 있는 사진을 모아 보니 많지가 않더라구요.. 부탁.. 드릴게요.. (__) ###################################################################################### 제1화 왕, 첫눈에 반하다 #1. 어느 봄밤 딱히 나가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암행은 늘 설레는 일이었다. 그를 그저 젊은 남자로 봐 주는 저자거리는 늘 호기심 가득한 곳이었다. 그를 호위해야 할 호위 무사들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그는 재미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그들 없이도 암행을 나설 때가 있었다. 그들의 걱정을 덜어 준다는 건 허울 좋은 핑계였고, 그냥 아무도 없이 다니는 게 편하고 자유로워 좋았다. 떠돌이 검객처럼 꾸미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 쓰기만 하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검객 차림을 했기 때문에 조금씩 두려워하는 기색은 내보였다. 그러나 그뿐, 그를 우러러본다거나 보는 순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걸음 걸음마다 시선을 피하고 두려움에 떠는 시선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오로지 그에 대한 숭배만이, 경배만이 존재하는 궁궐과는 달랐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곳과는 달랐다. 그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름 없는 떠돌이에 불과했기에.. 그래서 그에게 눈길 주는 이 하나 없는 이 상황이 편하고 좋았다. 물론 궁궐에서도 마음대로 할 순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것과는 다른 해방감이 있었다. 왕이라는, 주군이라는, 천자(天子)라는 무거운 이름 같은 건 짊어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또한 궁궐에서는 절대로 겪어 보지 못할 잡다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궁궐에서는 아무도 그에게 싸움을 걸지 않았다. 감히 싸움을 걸 수도 없었다. 그저 검술을 대련한다거나, 대련을 구경한다거나 하는 따분한 거짓 싸움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긴 달랐다. 진짜 싸움이었다. 때때로 시정잡배들의 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시덥잖은 이유로 싸우는 걸, 어줍잖은 정의감에 불타 싸움에 뛰어드는 걸 볼 수도 있었다. 가끔 약아빠진 놈이 약해빠진 이들을 건드릴 땐 자기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가기도 했다. 자기가 의도하기도 전에 약해빠진 이들 앞을 막아 서서는 대신 싸워 주고 있었다. 아, 물론 그의 실력대로 하진 않았다. 남들처럼 칼로, 주먹질로, 발길질로 싸움을 했다. 그게 또 신선했다. 단 한번도 해 보지 않았던 싸움 방식을 쓴다는 건 대단히 짜릿했다. 맨처음 보통 싸움 방식을 썼을 때.. 호흡이 흐트러질 뻔했다. 땀이 날 뻔하기도 했다. 그건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순간의 생경한 느낌은 오래도록 기억이 났다 또 주막에서 허름한 술상을 받아 놓고 떠돌이 검객 흉내를 내며 앉아서는, 주막을 찾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듣는 것도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들의 얘기 속엔 조정에서 들을 수 없는 말들이 넘쳐났다. 새로운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가감해서 들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 때문에 암행은 늘 그에게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뭐든 남겨 주는 게 있었기에.. 어떤 날은 평민으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한다거나, 어떤 날은 억울한 일을 당한 없는 이의 달콤한 복수를 해 주게 된다거나, 어떤 날은 몹쓸 짓을 저지르는 탐관오리를 알게 해 준다거나, 어떤 날은 백성들의 삶이 궁핍하다는 소식을 알려 준다거나, 어떤 날은 왕이 잘못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는다거나, 어떤 날은 기쁠 일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이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한다거나.. 이유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고, 얻는 것도 다 달랐지만, 결론은 그에게 말 못하게 귀한 선물을 안겨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암행을 관둘 수가 없었다. 아무리 류대장이 말려도, 할마마마께서 걱정하셔도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암행은 왕 노릇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다. 치장하지 않고 그저 즐길 수 있는.. 그가 다스리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놀이.. “오늘도 담을 넘으실 생각이십니까?” 침전에 들어 그가 죽도(竹刀)만 들면 류대장은 한숨 쉬듯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그는 씨익 웃으며 의관을 다 벗어 던지고 떠돌이로 변장했다. 이에 환익(류대장의 이름)이 완장을 떼고 그를 따라 나서려고 하면 늘 고개짓을 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그의 신호를, 환익은 못 알아 들은 척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는 그 큰 몸을 이끌고 굳이 직접 호위에 나서려고 고집을 부렸다. 누가 봐도 무관이라고 티 나게 생긴 환익을 데리고 암행을 나설 생각이 왕에겐 없었다. 그 때문에 늘 환익을 데려오지 않기 위해 술수를 부리느라 기(氣)를 쓸 때가 많았다. 축지법으로 궁궐을 넘어올 때면, 환익의 메아리가 늘 왕의 귓가를 때리곤 했다. 저렇게 큰소리 내면 궁궐 밖으로 나간 게 들킨다고 그리 얘기했거늘.. 충성스런 부하는 왕의 말도 무시하고 자기보다 수백 배는 강한 왕을 걱정하느라 오늘밤도 꼬박 새울 것이다.. 월희: 폐하.. 신: (돌아보는) 월희: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바로 무릎을 꿇는다.) 신: (내려다보는) 월희: 좌상께서 드셨다 합니다.. 신: 그래? 월희: 예.. 신: (흠~~) 그 어르신께서 걱정이 돼서 부리나케 오셨나 보군.. 월희: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신: ……………………………………..도망가기엔 늦었겠지? 월희: (자신에게 묻는 게 아님을 알기에, 또 왕의 심중이기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왕의 명령만 기다린다.) 신: (밤하늘 보는) 월희: .. 신: 너 닮은 초승달이 떴네..? 월희: .. 신: 갈수록 여위어서 어떡하누..? 전에는 반달 정도는 됐던 거 같은데.. 이젠 초승달로도 안될 것 같다.. 월희: .. 신: 내가 너무 속 썩이나? 월희: (그저 고개를 더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신: (뒷짐 지며) 이제 다들 모인 건가? 월희: 예, 폐하.. 신: 그럼, 피의 제전을 시작해 볼까? 월희: 기녀들은 어찌할까요? 신: 그 누각 근처엔 안 들이는 게 낫겠지.. 월희: 알겠습니다. 신: (단호하게)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오늘 여기에 누가 왔다 갔는지.. 월희: 예! 신: (뒤돌아서는) 월희: (고개를 한번 더 숙이고 어둠 속으로 물러난다.) 신: ……………………………………………………………………이런 암행은 재미없는데.. 오늘밤.. 그는 또 하나의 선물을 되돌려 주려 하고 있었다. 얼마 전의 암행으로 알게 된 진실 하나.. 그의 백성들이 얼빠진 탐관오리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진실.. 어린 여자아이들을 유린해 그 가족들까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빠뜨린다는 그의 신하에 관한 이야기.. 듣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걸 느꼈고, 듣는 순간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끄러운 그의 수족에 대한 이야기.. 그런 신하를, 수족을 둔 그의 부덕의 소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 수족을 잘라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수족은 주인까지 잡아 먹으려 할지 몰랐다. 더 커지기 전에, 그 불온한 싹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담을 넘었다. 정당한 방법으로, 정식으로 벌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운우국(雲雨國)에서는 이런 놈을 벌할 마땅한 법도가 없었다. 아니, 있긴 하나 그 벌이 너무 가벼웠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 놈을 죽일 수 없다면, 고통 받았던 백성들이 한풀이라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련한 자리.. 그는 맨마지막에 등장할 것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묻혀 있다 마지막에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뻔뻔한 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봐 줄 것이다. 그 미친 수족을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응징해 줄 것이다. 다만.. 증인이 필요했다. 그 놈이 다신 재기할 꿈도 못 꾸게 하려면, 오늘을 증언해 줄, 오늘을 기억해 줄 다수의 증인이 필요했다. 왕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놈에겐 충격이겠지만, 정치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오늘밤 가장 명망 높은 대감들을 불러모았다. 이 명성 자자한 기방으로.. 그 놈이 가장 사랑한다는 이곳에서, 가장 최악의 말로를 맞게 하기 위해서.. 신: 좌상까지 왔다면 증인도 다 모였군.. (그럼 이제 축제를 시작할 시간이군.) #2. 후원 한(恨)은 늘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것은 왕인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딸을 잃은 부모의 한(恨)은, 자매를 빼앗긴 한(恨)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들의 눈물이, 그들의 한(恨)이, 그 방을 가득 채우던 순간, 신은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그 뻔뻔한 녀석이 무릎을 꿇고 그들에게 사죄를 구하는 순간까지.. 그들이 던지는 돌팔매질에 진심으로 뉘우칠 때까지.. 신은 끝까지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들의 한(恨)이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 때, 그 놈이 눈물 콧물 찍어대며 그들에게 엎드려 사죄를 했을 때, 비로소 숨쉴 수 있었다. 그 놈 앞에 왕이라고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이미 혼비백산해 버렸기에.. 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놈에겐 지체 높으신 대감님들만으로도 충분했다. 피해 입은 백성들의 원망이 끝이 나고, 남은 건 준엄한 법의 심판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법의 심판은 왕이 나서지 않아도 그 양반들이 다 알아서 하게 될 것이다. 숨어 있는 그와 좌상의 눈빛이 마주쳤지만, 그는 외면해 버렸고, 좌상 역시 모른 척해 주었다. 신: (피식) 이래서 내가 당신 좋아한다니까~ 선왕(先王)이셨던 아바마마가 가장 믿으셨던 신하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친우(親友)인 좌의정 현왕(現王)인 그에게는 무서운 스승이자, 혜안을 가진 관료이자, 청렴결백 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충신.. 왕에게 잘못 했다 지적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소신파이며, 학문에 정통한 운우국의 대학자(大學者)이기도 했다. 대쪽 같은 그의 성품도, 인간적인 그의 고뇌도, 관료적인 그의 생각도, 충심을 다하는 그의 성심도 맘에 들었다. 그래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면서, 왕의 오른팔로서 소임을 다하도록 관직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관직에서 물러나고 싶어 했다. 선왕 때부터 너무 오랫동안 관직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길 너무 오래 붙잡아 두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왕을 음해하려고 할 거라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해왔다. 그러나 신은 그런 우환을 핑계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내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러모로 쓸모 있는 인간이었다. 왕의 독단을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였고, 때때로 아비의 눈으로 왕을 꾸짖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관료로서 뛰어난 면도 있었지만, 인간 이신에게도 그는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가 더 늦기 전에 학문에 귀의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족과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걸 알면서도, 왕으로서 자기 곁에 있으라고 명령했고, 충심을 다해 보필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뻔뻔하게 말이다. 신: 잘해 줘야 하는데.. 오늘도 귀찮은 일을 맡기고 말았네.. 씁쓸해 하며 넓디넓은 기방의 알지도 못하는 길을 신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우는가 싶더니, 그 향취가 점점 진해졌다. 안 그래도 한(恨)에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꽃 향기로 완전히 취해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꽃 향기가 날아오고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앞으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문을 밀었다. 그러자 코속으로 향기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꽃밭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그 꽃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되었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선 후원은, 꽃과 나무로 가득한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이었다. 후원 한가운데에서 약간 비켜진 곳에 자리잡은 작은 누각은 운치를 더하고 있었고, 구석진 곳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희미한 초승달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옛소설에 나오는 꿈속 풍경마냥 은은한 정취와 향긋한 꽃내음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 그 여인이 있었다. 작은 연못 앞에 앉아 맑은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이.. 신은, 살면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침전 밖을 돌아 다니는 여인을 처음 봤다. 그동안 여자의 풀어 헤친 머리는 침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여인이 머리를 푸는 건 정인(情人) 앞에서만, 그들의 은밀한 밤에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 여인은, 꽃처럼 아름답고, 달처럼 은은한 저 여인은, 흑단처럼 검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연못 곁에 앉아 있었다. 여인의 표정은.. 그가 암행을 나올 때마다 짓게 되는, 해방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러한 표정이었다.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는.. 그러한 표정.. 달빛은 미미했고, 별빛마저 아스라이 잊혀져 가는 늦은 밤.. 그럼에도 여인의 해사한 얼굴은 제법 떨어진 그의 자리에서도 잘 보였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얼굴은 흑단 같은 머리와 대비되어 더 해사해 보였다. 흰 얼굴에 붉게 찍혀 있는 입술은 해사한 얼굴에 생기를 더해 주었고, 반듯한 이마와 그보다 더 반듯한 아미와 오똑한 코는 미끄러질 듯 유려했다. 맑고 큰 눈은 또 어떠한가? 물빛을 다 반사할 만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름다운 여인을 실컷 보아온 신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운우국의 왕이 아니었던가? 세상 천지에 대적할 나라가 없다는, 구름신과 비님이 비호해 늘 풍요로운 대지를 자랑하는, 그래서 항상 주변국들의 침략의 대상이 되나,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으로 침략을 허락치 않는, 지난 400년간 태평성대를 이뤄온 운우국의 왕, 천자 중의 천자로 칭송 받는 이신이 아니었던가? 왕가는 대대로 스스로를 지킬 힘을 타고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다음 대(代)에 왕이 될 왕자의 몸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주어졌다. 그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게 될 뿐.. 이유따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운우국이 열리고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태조 이후, 사상 최강의 힘을 물려받은 신은, 역대 왕들 중 가장 강력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어린 시절 태자(太子)에 봉해진 후,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선왕의 병은 생각보다 깊었고, 병석에 누워 정사를 보는 일이 잦았다. 대운우국의 정사를 본다는 건, 하루를 다 써도 모자라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아픈 왕은 아들인 태자가 어떻게 자라는지 돌볼 여력이 없었다. 어마마마 역시 궁궐을 다스리고 병든 지아비를 돌보느라 아들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신의 어린 시절은 그를 돌보는 시녀들과 내관들, 문무 스승들과 함께였다. 형제자매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래의 누군가와도 어울려 보질 못했다. 그는 나면서부터 태자였고, 다음 왕이 될 자로 키워졌다. 그래서 친구란 있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비의 병환을 이유로, 그의 삼촌이라는 작자는 호시탐탐 왕권을 노렸다. 막강한 배후 세력을 등에 업고, 무시로 왕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모략을 꾸미기 일쑤였다. 특히 왕가 대대로 전수되는 힘이 태자에게 미약하게 나타난다는 걸 핑계로 역모를 꿈꾸었다. 왕가에 태어난 다른 남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힘을 지니고 있는 걸로 봐서는, 하늘이 다른 뜻을 내비치고 있음이라며 병든 왕과 미약한 왕자의 안위를 압박해 왔다. 그러나 그건 모두 신이 자신의 힘을 숨기느라 생긴 오해일 뿐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자신의 힘을 드러내면 안 될 거라는 걸 영악한 왕자는 알고 있었다. 아직 신은 어린 태자였고, 병들었지만 버젓이 왕좌에 앉아 있는 아비가 있었다. 그래서 신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생각보다 좁았고, 그의 편이 돼 줄 가신들도 많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삼촌쪽이 훨씬 더 힘이 세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그의 실체를 보여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던 5월의 어느 밤.. 아바마마가 승하하던 그 밤은.. 그의 인생에서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밤이 되었다. 왕의 승하로 인해 슬픔으로 가득하던 대전에 갑자기 날아든 불화살.. 그것이 시작이었다. 새로운 전설의 시작.. 새로운 왕의 시대의 시작.. 그로부터 벌써 여섯 해가 지나고 있었다. 신은 이제 명실상부한 운우국의 왕이 되었다. 역대 최강이라는 명성을 더해가며, 잔인하면서도 이치에 따른다는 이중적인 모습을 지닌..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으나, 궁궐을 장악하고, 문무를 장악하고, 모든 백성을 장악한.. 운우국의 이신이라고 하면 주변국에서조차 우는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는 풍문이 자자한.. 그러한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운우국 17대 왕으로서, 또 다른 태평성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명성에 걸맞게 왕으로서 내로라 하는 미모를 지닌 온갖 여인들을 보았고, 취했다.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도, 하룻밤의 노리개로 전락시키며 취했던 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는 순간, 손발이 얼어붙어 뻣뻣해지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는 순간, 그저 멍하니 빠져드는 건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아름다운 미인이든, 눈을 현혹시킬 요부든,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저 저 여자를 쓰러뜨린 후의 장면뿐이었다. 요사스러운 장난을 치게 되는 일도 있었지만, 감히 왕을 상대로 애태우는 짓을 벌이는 계집도 있었지만, 결국엔 그의 몸 아래에서 헐떡이는 모습으로 귀결되는 여인의 모습.. 그래서 아무리 겹겹이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여인들의 벗은 몸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벗기면 똑같은 몸이었다. 좀 더 굴곡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그런데 이 여인은 달랐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게만 됐다. 그리 치장하지 않은 차림이었고, 두껍게 몸을 감쌀 만한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 옷 속의 숨은 몸이 어떨지에 대해 상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머리까지 풀어 헤치고 있었는데, 어찌해서 그런 모습이 안 떠오르는지.. 이상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 여인을 상대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불경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감히 운우국의 왕인 자신이, 기녀로 보이는 여인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의아했다. 그래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게 제일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채경: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기색을 느끼고 돌아본다. 그리고는) !!!!!!!!!!
신: (여인이 돌아보자 살짝 흠칫 한다. 기를 완전히 감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낌새를 차린 걸 보면.. 그래도 의아했다. 웬만해선 그의 기는 들키지 않을 만큼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물론 오늘은 이래저래 마음이 흐트러져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으나.. 그래도.. 이 미약한 기운을 알아차리고 돌아본 여인의 예민한 감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겠다.) 채경: (낯선 남자가 보이자 혼비백산한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지 생각해 내느라 바빴다. 그러나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놀란 상태였다. 이곳은 기방을 찾은 손님들도 거의 찾지 않는, 기녀들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유희나 여흥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곳보다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들이 많았다. 여기처럼 소박하고 멋스럽지 않은 곳을 굳이 손님들에게 개방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포악한 손님을 피해 도망 나오거나, 기껏 조용히 담소를 나누기 위해 기녀들이 찾는 장소였다. 그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방문자가 생겼다. 그것도 남자였다. 이런 차림으로 낯선 남자를 봐야 했다. 연이가 그녀의 장옷을 고쳐서 돌아오는 데는 두세 식경(食頃)은 걸릴 텐데.. 그동안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차림으로 저자로 나설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그것도 이 늦은 시각에 장옷도 없이 돌아다니는 건, 사대부가(家) 아녀자로서 해서는 안 될 악행이었다. 아니, 이 상황 자체가 악(惡)이었다. 채경은 절대 이런 곳에 출입해서는 안 될 신분이었다. 들키는 날엔 전부 끝이었다. 체신머리 없이 기방에 드나든 것부터,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달밤에 돌아다닌 것도, 기녀들이나 입는 속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도, 모두모두 체벌 받아 마땅한 죄악이었다. 아무리 기녀가 되어 버린 지인을 만나러 왔다고 해도, 사대부가 아녀자라는 허울을 벗는 게 기분 좋다고 해도, 아무도 그녀의 핑계를 이해해 줄 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들키면 안 된다. 절대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선 안 된다. 그런데.. 도망갈 수도 없다. 이 차림으론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 남자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한 점 의혹도 없이 돌려보내야 했다. 채경: (신에게서 몸을 돌려 묘책을 강구하느라 바쁘다.) 신: (자신의 등장으로 놀란 것 같은 채경에게 다가간다.) 채경: (남자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더는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길을 잘못 드신 것 같습니다.. 신: (멈칫.. 채경이 말문을 열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된다. 조금은 떨리고, 조금은 두려운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건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다시 걸음을 뗀다.) 채경: (발소리가 다시 들리자 더 기겁하여) 여.. 여긴 들어오시면 안 되는 곳입니다.. 신: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과객이 못 갈 데가 있겠습니까? 채경: 그래도 여긴 안 됩니다.. 신: ………………………………..왜 안 되지? 채경: (할 말 없는) 신: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연못도 있고, 누각도 있고.. 게다가 여인네까지 있는데, 내가 왜 물러나야 하지? 채경: (그 여인네가 있어서 여긴 당신이 오면 안 된다구!!) 신: (채경에게 가까이 다가선다.) 채경: (남자의 기운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자, 온 몸이 긴장으로 팽배해진다.) 신: (돌아선 채경에게 손을 뻗는다.) 채경: (남자의 손이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 자기도 모르게 공중으로 발이 뜬다.) 신: !!!!!!!!!!!!!! 채경: (어느샌가 누각의 망루에 앉아 있다.) 신: (놀란 눈으로 채경을 본다.) ‘하~ 무공을 쓰는 기녀라니.. 이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채경: (저고리 앞섶을 여며 쥐고 신을 내려다본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에 후회가 밀려온다. 이렇게 남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선 안 될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저 남자는 그냥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 캐내고자 할 것이다. 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담장을 날아서 도망갈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신: (살랑이는 바람에 머리결이 나부끼고, 망루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채경의 모습이 색다르게 보인다. 이전까지 알던 여인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채경: (절망적인 눈빛으로 신을 본다.) 신: (땅을 살짝 박차고 뛰어 오른다.) 채경: ??!!!!!!!!! 신: (어느새 채경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채경: (눈이 커다래져서 신을 본다. 분명.. 글이나 읽는 샌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입은 도포는 무관들이 입는 것과는 달랐다. 윤기 나는 비단 도포자락은, 은은한 비취색의 도포자락은, 글 깨나 읽는다는 서생들이 즐겨 입는 옷이었다. 그래서 기방에 놀러 왔다가 술에 취해 길을 잃은 서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중 부양술을 자유자재로 할 줄 아는 자라니..! 부양술을 하기 전에 아무런 준비 동작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임에 틀림 없었다. 더군다나 부양을 마치고 옆에 앉은 남자의 얼굴엔 아무런 힘든 기색이 없었다. 그건 방금 전에 부린 술수가 이 남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런 술수를 부리는 데 매우 능숙하다는 의미였다. 즉! 이 남자, 고수였다!) 신: 그건 어디서 배웠지? 채경: (침 삼키는) 신: 심해루(深海樓)에 무공에 능한 기녀가 있다는 얘긴 못 들어봤는데.. 채경: (눈 감는.. 역시나 이 남자는 자길 기녀로 알고 있었다. 왜 안 그러겠는가? 기방 가장 은밀한 후원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이리 노닐고 있는데, 어찌 기녀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신: 그런 무공으로 왜 기녀가 됐지? 채경: .. 신: 무슨 사연이지? 채경: (신 보는) 신: (제대로, 정식으로 채경을 마주 보게 되니,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저 응시하게 될 뿐이었다.) 채경: …………………………………………..말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신: ??? 채경: 저를 숨기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으리께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신: (피식) 비밀이 많은 여자로구나~ 채경: (그걸 인정한다는 듯, 입을 가리며 살포시 고개를 돌린다. 조신하게 보이기 위해 그녀답지 않게 연기를 펼친다.) 신: (돌아간 채경의 옆얼굴을 보며) 머리를 풀면 어떤 기분이지? 채경: ??? 신: 기분이 어때? 채경: (신 보는) 신: (손을 뻗어 채경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채경: ??!!!!!!!! (낯선 남자에게 머리카락을 만지게 하다니!! 아니, 내 몸에 손대게 하다니!! 아버지께 치도곤을 맞아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신: (채경이 놀란 건 전혀 모르고 머리카락에 시선 고정한 채) 이렇게 하면 자유로워? 채경: (신 보는) 신: (애잔하게) 자유로움이 느껴져? 채경: (그런 걸 물어보는 당신 눈빛이 더 자유를 갈망하는 것 같은데..?)…………..날아다닐 때 자유로워요? 신: (채경 보는) 채경: 머리 푸는 거랑은 비교도 안 될 것 같은데.. 신: (피식 웃으며)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나만 날아 다니는 게 아닌데.. 채경: (딸꾹질 나올 것 같은) 신: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채경: ………………………………………………..절에서요.. 신: (이 질문에도 아무 말 안 할 줄 알았는데, 대답을 하자 의외라고 생각한다.) 절..? 채경: (끄덕끄덕) 네.. 신: (고개 갸웃하며) 절에다 공양 많이 한다고 이런 무공을 알려 줄 리 없는데.. 또 웬만한 수련으로는 그 나이에 완성하기 힘들었을 텐데.. 점점 더 궁금해지네~ 채경: (더는 말하기 곤란해 다시 입을 다문다.) 신: (씨익 웃으며) 나랑 술래잡기 할까? 채경: ??? 신: 도망가 봐~ 채경: 네??? 신: 붕붕 날아보라구~ 채경: 네??!!! 신: (피식) 날아 다니는 여자 쫓아가 본 적은 없거든.. 채경: (어이 없다.) 신: (장난 치듯) 한번 날아가 봐~ 채경: 장난 치려고 배운 거 아니에요. (그럼 노스님한테 너무 미안하다구요..) 신: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채경: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귓뒤로 넘기는 행동으로 신의 말을 무시한다.) 신: (채경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채경: !!!!!!!!!!!! 신: (씨익 웃으며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러면서 채경을 자신에게로 끌어 당기려 하는데..) 채경: (자기도 모르게 손을 뿌리치고 다섯 걸음 뒤의 망루 난간으로 날아간다.) 신: (빈 손을 허공에 띄운 채 멀리 날아간 채경을 보며 재밌어 한다.) ‘잡으려고 하면 도망치는 나비로군~’ 채경: (침을 꿀꺽 삼키며 경계한다. 자유를 갈구하는 눈빛에 한순간 흔들린 게 화근이었다. 남자라곤 아버지와 동생인 호경, 어릴 적부터 친분을 쌓아온 규현 오라버니가 다였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난 낯선 남자에게 너무 많은 걸 내어 주고 있었다. 보여 줘선 안 될 모습도 다 보여 주고.. 어쩌면 이런 모습으로 만났기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아 더 자유로운 것 같긴 했으나,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건 있었다. 더는.. 말려들면 곤란했다.) 신: 시작.. 한 건가? 채경: ??? 신: 술래잡기 말이야.. 시작한 건가? 채경: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 왜? (이렇게 재미있는데..) 채경: 밤이 늦었습니다.. 신: 원래 이런 건 밤에 하는 게 더 신나.. 채경: 저는 밤나들이가 익숙치 않습니다.. 신: ??? 기녀들의 주 활동 시간은 밤이 아닌가? 채경: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 신: …………………………………………………………..이름이 뭐지? (이상하게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채경: (신 보는) 신: ……………………………………………이름이 뭐야? 채경: (이름을 밝힐 순 없었다. 그래서 남자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엉덩이를 띄워 누각 지붕으로 날았다.) 신: (고개를 빼서 채경의 위치를 살핀다.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이 처마 사이로 보였다.) 술래잡기 안 한다더니, 계속 날아다녀 주시네.. 채경: (하늘 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냥 이대로 연이한테 갈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몰래 숨어 든다면 아무에게도 안 들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 차라리 모습을 감출까? 기를 많이 써야 하긴 하지만, 못할 것도 없는데.. 아니다! 차라리 이 남자에게서 모습을 감춰 버릴까? 안 보이면 그냥 가지 않을까?) 그런데 이때.. 신: (휙 날아 올라 채경 곁에 와서 선다.) 채경: !!!!!! 신: (누각 지붕 위에서 후원을 내려다보며) 와~~ 되게 작다.. 채경: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신: (미소 띤 얼굴로) 하늘 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독수리 눈에 이 땅은 어떻게 보일까? 채경: ??? (신 보는) 신: 누각 위에 올라와서 보는 땅도 이리 하찮은데..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이 나라는 얼마나 작고 하찮을까..? 채경: .. 신: (애잔한 눈으로) 그 작은 땅에서 아웅다웅 다투는 인간들은 또 어떻고.. 채경: .. 신: 서로 못 잡아 먹어 매일이 싸움이지.. 서로 더 갖겠다고 매일이 전쟁이지.. 가진 자는 더 갖기 위해.. 없는 자는 덜 뺏기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데.. 만백성의 왕이라는 자는 백성들의 고통을.. 아픔을.. 잘 듣고 살긴 하는 걸까..? 채경: (이 남자.. 좀 이상하다. 아까부터 간간이 그런 느낌이 들었다. 농을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때때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이 될 때가 있었다. 그건 결코 가벼운 남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거기엔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좋아했던 노스님이 자주 짓는 눈빛이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고, 모든 걸 다 이해한다고 말하던 눈빛.. 그건 많은 이들의 고통을, 많은 이들의 목숨을 짊어져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젊은 남자가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지..?) 신: 왕이 뭐라고 생각해? 채경: (신 보는) 신: (천천히 뒤돌아 채경 보는) 채경: .. 신: 넌.. 이 나라 왕을 좋아하니? 채경: .. 신: 괜찮아.. 여기서 말한다고 들키는 건 아니니까.. 채경: ……………………………………………………………………무섭고.. 잔인한 분이라 들었습니다. 신: .. 채경: ………………………………………………….혈육을 무참히 도륙하고 보위를 차지하여 실성했다는 소문도 있구요.. 신: .. 채경: …………………………………..왕가의 후손 중 제일 강력한 힘을 물려받아 세상 천지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도 하죠. 신: .. 채경: ……………………………허나.. 겉으로 보이는 상처보다 속에 새겨진 상처가 더 깊다 들었습니다.. 신: (채경 보는.. 이전까지는 그냥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얘기에는 시선이 채경에게로 집중되었다.) 채경: ………………………….속에 새겨진 상처는.. 치유되지 못하고 그대로 곪아가고 있다 들었습니다.. 신: ‘누구에게서 들었지..?’ 채경: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진실로 실성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걱정이라 들었습니다. 신: ‘대체 누가 그대에게 그런 얘길 해 준 거지? 누가?!!’ 채경: 허나.. 왕께선 명민한 분이라더군요.. 미천한 저 같은 것이 어떻다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신: .. 채경: 그래서.. 이름 없는 백성으로서, 그저 태평성대를 이끌어 줄 성군(聖君)으로 무탈하시길 빌 뿐입니다.. 신: ……………………………………………………………(피식) 채경: (뭐가 재미있다고 웃는 거지? 난 웃긴 얘긴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신: …………………………………..이름이 뭐지? 채경: (윽! 다시 또 이름을 물어보다니..! 낭패로다~) 신: 난 훈이다.. (훈은 그의 어릴 적 아명(兒名)이었다. 백성들 대부분은 모를 이름.. 가끔 암행에 나올 때 이름을 밝혀야 할 순간에만 사용하는..) 채경: (남자가 이름을 말하자 더는 물리지도 못하겠다.)……………………….은..입니다.. 신: 은..? 채경: 네.. 그냥 은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신: 기녀 이름치곤.. 특이한데..? 채경: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거짓말도 술술 나오시네~ 신: 머리 올린 지는 얼마나 됐지? 채경: ??? 신: (채경이 못 알아 들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채경: .. 신: 그래서 남자 손길에 너무 민감한 건가..? 채경: (시선 피하는) 신: (슥~ 발돋음으로 채경 코앞까지 다가간다.) 채경: !!!!!!!! (흠칫 놀라 반 발짝 뒤로 물러난다.) 신: 순발력은 봐 줄 만한데..? ^^ 채경: (침 삼키는) 신: (채경에게 손을 뻗는다.) 채경: (반사적으로 세 걸음 뒤로 물러난다.) 신: (픽) 내 손에 역병이라도 들었을까 봐 그러는 거야? 채경: (그저 다시 한번 침을 삼킬 뿐이다.) 신: (조금 약이 올라서 채경을 향해 난다.) 채경: (신의 동작을 눈치 채고 본격적으로 공중으로 뛰어 오른다.) 그렇게 누각을 사이에 두고 신과 채경은 붕붕 날아 다녔다. 말 그대로 ‘붕붕’ 날아 다녔다. 누각 오른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으면, 이내 왼편에서 머리가 보이고, 발이 보이고, 연못 위로 둥실 떠올랐다가 신이 다가가는가 싶으면 어느샌가 채경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넓지 않은 후원 마당을 휙휙 날아 다니며 달밤에 숨바꼭질 하는 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 정신 없이 날아 다니는 통에, 신과 채경의 눈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상대방이 어디에 있나 살피느라 사방팔방 둘러보느라 단 1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식경쯤 날아 다니고 나자, 채경은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건, 쉬지 않고 날아 다니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처음 공중 부양술을 익히고 대나무숲을 날아 다닐 때도 이렇게 오래 비행하진 않았다. 솔직히 그땐 한가로이 하늘을 날며 새처럼, 나비처럼 부양 자체를 즐기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피하면서 날아 다니는 거라 너무 힘에 겨웠다. 채경: (결국 누각의 망루에 걸터앉아 버린다.) 신: (쓱 하니 채경 앞을 지나가다가 대들보를 잡고 휙 돌아 다시 채경이 있는 망루로 온다.) 채경: (후~ 후~ 숨을 몰아 쉬며 전혀 힘든 기색 없어 보이는 신을 존경의 눈길로 쳐다본다.) 신: (채경 옆에 와서 앉으며) 벌써 지쳤어? 채경: (여전히 숨을 고르며 신을 째려 본다.) 신: (픽 웃음이 난다. 감히 왕에게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불손한 눈빛으로 왕을 바라보는 여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일 것이다.) 한창 재미있었는데.. 채경: (어쩜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는지.. 존경을 넘어 신기하다.) 신: (지쳐 있는 채경 향해 손을 뻗는가 싶더니, 뒤로 물리는 손에는 어느새 비단 끈이 들려 있다.) 채경: ??!!!!!! 신: (만족스런 얼굴로 끈을 바라보며) 내가 이긴 것 같으니까 이건 전리품으로 가져갈게. 채경: (순식간에 자기 손목에 묶여 있던 끈을 가져간 이 남자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에 혀를 내두르겠다.) 신: 만약 이거 돌려받고 싶으면 만월의 밤에 다시 만나.. 채경: (신 보는) 신: 돌아오는 만월에.. 여기서 다시 봐.. 채경: .. 신: 기다릴게.. 채경: .. #3. 궁궐 성내관: 폐하.. 신: (의복을 갖추다가 돌아보는) 성내관: (족자 하나를 공손하게 올린다.) 신: (곁에서 옷 시중을 들어 주던 궁녀들을 물리며 족자에 관심을 보인다.) 뭐지? 성내관: 해루국에서 보낸 서찰이옵니다.. 신: 거기서 서찰을 왜? 성내관: 일전에 해루국에서 사신을 보내겠다는 전갈이 있었사온데.. 신: (픽) 사신이 아니라 매파..? 성내관: .. 신: 이 궁 안뿐만이 아니라, 이젠 나라 밖에서까지 날 혼례 치르게 하려고 열심이군.. 성내관: (그저 신이 족자를 거둬 주기를 기다린다.) 신: (낚아 채듯 족자를 가져다가 펼쳐 본다.) 성내관: (고개를 조아리고, 신이 서신을 다 읽어 볼 때까지 기다린다.) 신: (족자를 덮고 하~ 짧은 한숨을 쉰다.) 성내관: (분부를 기다린다.) 신: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아야 할 것 같군.. 성내관: ??? 신: 해루국 공주께서 납신다는구나.. 성내관: !! 신: (팩 돌아선다.) 성내관: (일이 너무 빨리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걱정이.. 된다.) 신: ………………………………………………….감히 해루국 공주 따위가 운우국의 내전을 넘보겠다~? 성내관: (결국.. 역정을 내시는 걸 보니 일이 커질 것 같다.) 신: …………………………………………….해루국 공주에 대해 들은 거 있나? 성내관: …………………….절세미녀라 들었습니다. 신: 머리는 텅 비었다는 얘기도 있지.. 성내관: 금수(禽獸)까지 그 아름다움에 고개를 조아린다 들었습니다. 신: 금수는 사람 볼 줄 모르는 걸 모르는군.. 성내관: ………………………………………..들이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신: ……………………………..들이는 건 어렵지 않아. 들여놓고 살려 둘 수 있을지가 문제지.. 성내관: !!!!! 신: ……………눈에 거슬리는 거 싫어. 텅 빈 머리로 자기집 앞마당인 것마냥 돌아다니는 건 더 싫고.. 성내관: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신: ……………………………………………운우국 내에서 황후를 찾겠다 전해.. 성내관: ??!!!!!!!! 신: 할마마마 소원 풀이 해 드리지 뭐.. 성내관: 폐.. 폐하..!!!! 신: (피식) 이제 내전에도 주인이 들어야 한다며? 성내관: (그렇지만.. 혼인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전혀 생각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런 생각을..!!) 신: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서둘러야지~ 성내관: 네??? 신: 움직이라고~ 성내관: 아, 예!! (공손히 인사하고, 부리나케 자리를 뜬다.) 신: (평소엔 절대 당황한 모습 보이지 않던 굳건한 저 내관이 꽁지 빠진 강아지마냥 달려가는 모습이 우습다. 그래서 킥킥 웃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늘밤이 만월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오늘밤에 있을 만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신: (가슴 앞섶에서 비단 끈을 꺼낸다. 그리고 한동안 그 끈을 내려다본다.) #4. 그날 밤 오늘도 여전히 이곳은 인적 드물고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듯 꽃과 나무가 즐비한 후원에는, 휘영청 뜬 만월의 달빛만이 한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신: (망루에 앉아 후원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그러나..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밤이 다 가도록.. 만월이 서녘 하늘로 질 때까지.. 신: (점점 밝아져 오는 동녘 하늘을 바라본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왕의 손에는, 비단 끈이 꼬옥 쥐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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