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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닛/드라마

[스크랩] <상상소설>왕(王)의 여자(37) 맘씨 좋은 왕비님이 사는 나라

 

저 이번에는 글 갖고 왔습니다~~ ^^

 

늘 새 글을 들고 입궁할 땐 기분이 설렙니다.

가끔은 완성했으나 맘에 안 들어 보여 드리기 찜찜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글을 올릴 땐 뿌듯하고 기분 좋은 떨림이 울리곤 합니다..

최근엔 글 쓰는 속도가 더뎌서 한 편 완성할 때마다 더 설레요.

, 이제 드디어 글을 올릴 수 있겠구나.. 대감들께 보여 드릴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이 들면서 얼른얼른 입궁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요..

빈 백지를 앞에 뒀을 땐 언제 이걸 다 채우나 싶다가도,

어느새 완성된 글을 보면 스스로 신기하고 대견하고..

그렇게 3년 넘게 반복되어 온 일상이 제게는 참 소중합니다..

 

 

이번 편은 예고를 통해 많이들 보셔서 아시겠지만, 조금은 맘을 놓고 보셔도 됩니다.

당분간은 두 아이의 신혼 모드가 이어질 예정이구요.. 투닥투닥해도 행복한 일상을 그릴 생각입니다.

서서히 시작될 음모는.. 야금야금 두 아이를 옥죄어 오겠지만,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음모를 도모하는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계속 고민 중이라, 사이사이에 잠깐 등장하고 말 거거든요.

 

 

한 편 한 편 참 어렵게 가고 있는 왕녀.. 어느새 40편을 바라보고 있네요.

시작할 때쯤엔 의기충천하여 재기발랄한 입담을 과시했던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제 자랑을 제 입으로 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 소설이 진행될수록 글이 무거워져 두 아이 역시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어쩌면.. 신이도 채경이도 소설이 진행되면서 자라는지도 모르겠어요.

 

.. 이번 소설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만큼이나, 제가 빠져서 쓰고 있는 부분이 군신의 관계에 놓인 신과 우현입니다..

처음엔 막연히 채경의 아버지로 명망 높은 충신을 설정한 것이었는데, 어느새 주인공만큼이나 사랑하게 된 캐릭터입니다.

채경이에게는 하늘 같고 바다 같고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으며 존경에 마지 않는 아버지지요..

그런데 신이에게도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키워 준 부모 같은 신하이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준 스승이자 인생의 선배.. 그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어른..

인정 받고 싶고 잘해 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어 투정도 부리고 객기도 부려 볼 수 있는 가족..  

이런 우현이기 때문에 신이랑 마주 앉은 씬이 자주 등장하고, 둘의 대화가 길어지나 봐요.

그냥.. 이번 편 쓰면서 유독 길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며 왜 이러나 생각해 보다가 이런 결론까지 이르렀어요.

 

 

이제는 곧 관직에서 물러나실 좌상 신우현 대감님.. 끝까지 신이에게 믿음직한 충신의 모습을 보여 주길 기도하면서~

 

저는 이쯤에서 조용히 물러갈게요.. 스산한 바람이 부는 요즘, 구독료까지 한산해지면 저 얼어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쏭기자의 마음을 녹여 줄 따뜻한 구독료 많이들 챙겨 주시구요.. 모두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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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맘씨 좋은 왕비님이 사는 나라

 

 

 

 

 

#1. 다음 날

 

 

 

늘 그렇듯 소주방의 아침은 분주하기만 하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되는 수라 준비는 바쁘지만 활기차게 이뤄진다.

소주방 상궁마마의 지휘 아래, 삼십 여 명의 나인들이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아침..

 

재료를 씻어 우물터와 소주방을 분주히 오가는 어린 나인부터, 능숙한 솜씨로 재료를 썰어내는 나인, 불을 지키는 나인,

뒷마당 장독대에서 맛깔스러운 장을 들고 나르는 나인, 상에 올릴 그릇을 손보는 나인까지 쉼 없이 움직이는 시간..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느라 바쁜 가운데,

갑작스럽게 소주방 입구에서 나인들 몇몇이 합창으로 내지르는 소리가 있었으니..

 

 

중전마마!!”

 

 

자기들도 모르게 터져 나온 비명과도 같은 부름은, 소주방 모든 궁녀들의 시선을 모았다.

 

 

 

채경: (빙그레 웃는 얼굴로 소주방 입구에 서 있다.)

 

궁녀들: (화들짝 놀라 일하던 손을 모두 놓고 채경을 바라본다.)

 

윤상궁: (소주방 최고 상궁으로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중전마마에게 달려간다.)

 

채경: (눈인사를 하며 소주방 안으로 들어선다.)

 

윤상궁: 마마..

 

채경: ^^ 이렇게 소주방에서 뵈니 반갑네요, 윤상궁..

 

윤상궁: (여전히 어리둥절하여) 이 시각에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채경: (소주방을 둘러보며) 아침 수라 준비 다 끝났어요?

 

윤상궁: 아직 준비 중이온데.. 혹 폐하께서 기침 하셨습니까? 그럼 연통을 넣어 주시지 왜 직접 오셨습니까?

 

채경: (도리도리) 그게 아니에요..

 

윤상궁: ??

 

채경: 폐하는 아직 꿈나라에 계세요.. 기침 하시려면 한참 멀었구요..

 

윤상궁: 허면..?

 

채경: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윤상궁: 무슨..?

 

채경: 미안하지만.. 오늘 아침 수라.. 내가 준비해도 될까요?

 

윤상궁: ??!!!

 

궁녀들: !!!!!!!!!!!!!!! (중전마마가 직접 음식을 한다고? 그런 얘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윤상궁: (놀란 마음 수습하고) 마마.. .. 저희가 올리는 음식이 맘에 들지 않아..

 

채경: 아니에요.. (윤상궁의 말을 막는다. 더 오해하기 전에 사전에 방지한 것이다.)

 

윤상궁: (믿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걸 보면,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워낙 행동파이시다 보니, 행동으로 무언가를 피력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이 다급해진다. 평소 차분하기로 소문난 그녀이지만, 이번만큼은 당황스러워 앞뒤 분간이 되지 않아 말부터 나가는데..) 아닙니다. 맘에 안 드시는 게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

 

채경: (빙그레 웃으며) 폐하께 내가 만든 아침을 드리고 싶어 이러는 거예요..

 

윤상궁: (말 삼키는)

 

채경: 소주방에 불만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해 주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윤상궁: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채경을 본다.)

 

채경: 내 행동이 이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사전 통보도 없이 와서 자리를 내 달라는 것도 비상식적이구요..

그래서 부탁하고 싶어요. 갑작스럽게 결정한 거라 미리 언질을 못 넣은 거 미안하지만.. 그래도 허락해 줘요.

 

윤상궁: (너무 놀라서 중전마마의 말씀을 온전히 들어오질 않는다. 대체 원하는 게 뭔지.. 파악이 잘 안 된다. 그러나 마마께서 허락해 달라고 공손하게 부탁하는 것을 보니, 우릴 타박하려고 납신 건 아닌 것 같다. 그것만은 알 것 같다.)

 

채경: (애원하듯) 부탁해요.. 오늘.. , 오늘.. 밥을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날 받아 줘요..

 

윤상궁: 마마..

 

채경: 여긴 윤상궁이 주인이잖아요. 주인 허락 없이 객이 무단 침입해선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 줘요..

 

윤상궁: (지엄하신 중전마마께서 이리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되려 죄를 짓는 것만 같은 느낌에 더 버티지도 못할 것 같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행여 마마께서 잘못되면..

 

채경: ~정 하지 마요~! 절대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니까! (호언장담한다.)

 

윤상궁: (중전마마의 너스레에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을 짓는다.)

 

채경: …………………….허락.. 한 거죠?

 

윤상궁: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채경: ^^ (활짝 웃으며 윤상궁의 손을 그러잡는다. 고맙다는 인사였다.)

 

윤상궁: (당황하며 중전마마의 과도한 애정 표현에 얼굴이 붉어진다.)

 

채경: (윤상궁과의 격한 악수를 끝내고 기분 좋은 얼굴로 소주방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선다.) ~~ 비켜요들~~

 

윤상궁: (당혹스러운 표정을 다 감추지 못하고, 이래도 되는 건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허락하긴 했으나 마음 속 불안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 중전마마의 뒤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채경: (요리조리 살피며) 식자재들은 다 있나~~?

 

윤상궁: 진정.. 직접 음식을 하실 겁니까? (마지막으로 여쭌다.)

 

채경: (소매 걷어 부치며) 그럼요~ 진짜로 할 거 아니면 해도 안 떴는데 일어날 리가 없죠~

 

윤상궁: 허나..

 

채경: (몸을 획 돌려 윤상궁 마주 보는)

 

윤상궁: (흠칫 하는)

 

채경: 걱정 마세요. 저 칼질 서툴지 않으니까..

 

윤상궁:그거야 시험 때 봐서 잘 알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 내가 당혹스러운 건 그게 아니라..’

 

채경: (윤상궁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궁중법도에 중전이면 소주방에서 요리하면 안 된다는 법 있어요?

 

윤상궁: ??

 

채경: 중전이 소주방에 출입 못한다는 법.. 있어요?

 

윤상궁: 그건 아니지만..

 

채경: 그럼 저 말리지 말고 도와주세요.

 

윤상궁: (채경 보는)  

 

채경: 폐하 깨시기 전에 끝마쳐야 해요. (큰 눈을 꿈뻑이며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윤상궁: (.. 결국 한숨 쉴 수밖에 없는.. 교태전 상궁과 나인들이 쩔쩔매면서도 중전마마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을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더 고집을 부려봤자 물러나실 분도 아니고, 마마의 말씀대로 폐하께서 기침하시기 전에 아침 수라를 다 준비해야 할 상황이니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을 듯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데..)

 

채경: (금세 윤상궁의 최종 허락을 눈치 채고 씨익 웃는다. 그리고 핑그르르 몸을 돌려 소주방에 완전 입성에 성공한다.)

 

 

 

기세 좋게 소주방에 입성해 자신만만하게 식칼을 들고 불쏘시개를 주무르며 채경은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 뒤에서 하늘 같은 중전마마께서 요리하는 모습을 난생 처음 지켜보게 된 나인들은 안절부절이었다.

마마!!”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그게 아니에요!” 지적을 하고, “불이요, !! 마마!”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운우국 정궁이 생긴 이래로 제일 시끄럽고 정신 없는 소주방의 아침이 지나가고 있었다.

 

 

 

 

 

 

#2. 교태전

 

 

 

따스한 햇살이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에 아침이 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완전한 어둠이 아닌.. 눈만 뜨면 찬란히 비치는 햇살을 맞이할 것 같은 희미한 어둠..

감은 두 눈 너머로 느껴지는 아득하고 따스한 아침을, 눈을 뜨기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눈을 뜨기는 싫어 누운 몸을 한번 뒤척여 보는 젊은 왕..

자신이 움직임에 따라 덮고 있던 비단 이불이 사박거리며 몸을 휘감아 따라다닌다.

이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소리가 행복하게 들려서 신은 살짝 미소지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아침을.. 새 날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최근에야 알았다. 혼례를 치르고 누군가와 함께 맞는 아침이 일상이 된 이후로..

 

그렇게 오늘도 행복한 아침을.. 어제와는 다른 아침을 맞이하여 작은 미소를 띠고 있는 신에게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슬며시 눈을 뜬다. 고개는 여전히 베개에 박고 있는 상태다.)

 

채경: (조용히 방으로 들어서면서 이부자리쪽을 살핀다. 신은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각쯤 일어나시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분을 깨워도 되는지 잠깐 고민한다. 그러면서 걸음은 점점 이부자리쪽으로 가까워지는데..)

 

: (눈을 꿈뻑꿈뻑한다.)

 

채경: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신의 얼굴을 살피려고 하는데, 그는 고개를 병풍 쪽으로 돌린 채 자고 있어 표정을 볼 수가 없다.)

 

: (눈에 병풍에 새겨진 그림이 선연히 들어오자 자기가 깨어났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채경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는 건 왠지 조금 귀찮아서.. 지금 이렇게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고 있는 게 무척 마음에 들어서.. 고개만 획 돌려 채경 쪽으로 바라보는데..)

 

채경: (흠칫 하는.. 갑자기 신이 고개를 돌려 자길 쳐다보자 놀라서 멈춰 선다.)

 

: (선명하게 뜬 눈으로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채경이라는 사실에 슬쩍 미소가 떠오른다. 나른하고 감미로운 미소.. 보드라운 비단 이불 사이에서 언뜻 비치는 미소가 무척이나 싱그럽다.)

 

채경: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깨어나셨어요?

 

: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채경: (신 곁으로 와서 앉으며) 시장하지 않으세요?

 

: (채경 보는)

 

채경: 수랏상.. 차리라 할까요?

 

: 왜 그렇게 들떴어? (아직은 잠이 많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채경: (손으로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들떠 보여요?

 

: .. 무슨 일 있어?

 

채경: (도리도리) 아무 일도 없어요.. 한동안은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 (피식.. 채경이 말하는 아무 일이라는 게 뭘 뜻하는지 알 것 같아 헛웃음이 나온다.)

 

채경: 수랏상.. 차리라 할까요? (다시 한번 묻는다.)

 

: ………………………………………(고개를 끄덕거린다.)

 

채경: (싱긋 웃으며 쾌활하게 방 밖으로 달려가듯 나간다.)

 

: (채경의 발랄한 뒷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난다.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지.. 어젯밤 내내 걱정스런 얼굴로 잠도 잘 못 드는 것 같았는데.. 기분 전환이 참 빨리도 되는 사람이다 생각하게 된다.)

 

 

 

 

잠시 후..

 

 

 

: (밥상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채경: (신 보는)

 

: ……………………………못 보던.. 음식들이네..?

 

채경: 그렇게 많이 달라요?

 

: (채경 보는.. 채경이 묻는 질문의 뜻을 몰라 멀거니 채경 보는..)

 

채경: 내가 보기엔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 (꿈뻑거리며 상 위에 올려진 찬들을 바라보는데.. 역시나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소주방 상궁이 바뀌었단 얘긴 못 들은 것 같고.. 어제 일 때문에 기분 전환하라고 상차림을 바꾼 건가?

 

채경: (피식 웃는다.)

 

: ???

 

채경: 눈치가 빠르시네요..

 

: ??

 

채경: (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폐하 기분 전환하라고 이리 상을 차린 거 맞아요..

윤상궁이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우겨서 이렇게 차리자고 했어요. 아마 지금쯤..

소주방은 내가 어질러 놓고 온 거 수습하느라 정신 없을 거예요.. (말하며 피식 웃는다.)

 

: (채경이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 듣겠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멍한 건지, 아님 채경이 횡설수설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서로가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주앉아 있는 것 같다. 이해 못할 말을 하고 있으니 넘어가고 싶은 맘도 들었지만, 채경의 웃는 얼굴을 보니 그 연유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소주방에 갔었어? (그럴 리 없겠지만, 왠지 그런 투로 말하는 것 같아 이리 물어본다.)

 

채경: (신 보는)

 

: (채경 보는)

 

채경: (고개를 끄덕인다.)

 

: (살짝 놀라는.. 진짜로 소주방에 가서 상차림에 대해 지시를 했다는 게 놀랍다. 아무리 여장부답던 어마마마께서도 이러진 않았었는데..)

 

채경: (신이 놀란 건 안중에도 없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 (놀란 건 놀란 거고, 채경이 왜 소주방에 갔는지 알 것 같아 이 여자의 오지랖에 대해 다시금 감탄한다.) 어제 일 때문에.. 내가 밥도 못 먹을까 봐 그래?

 

채경: (신 보는)

 

: 나 그렇게 어리지 않아.. 응석을 부려야 할 때와 왕으로서의 결단에 책임져야 할 때를 구분 못하는 어린애 아냐..

 

채경: ..

 

: 날 걱정해 주고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이렇게 새벽부터 고생할 필욘 없었어..

 

채경: ………………………………..알아요.. 폐하께서 응석을 부리는 건 늦은 밤 제 품 안에서만 그러신다는 거..

 

: 그럼 앞으론 힘들게 잠 못 자고 이리 수선 떨지..

 

채경: (신의 말 끊고) 그래도 제가 지은 따뜻한 밥 한 술 드시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 ………………………..!!!!!!!! ‘그대가.. 직접 지은 밥이라고?!!’

 

채경: 맛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제 손으로 밥을 해 드리고 싶었어요..

 

: (놀라서.. 가슴이 뛴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잘 들린다.)

 

채경: 맛있는 밥보단.. 이 음식들 속에 담긴 제 마음을 양껏 먹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소주방 나인들도 정성 들여 음식을 해서 올리겠지만.. 내 마음과는 다를 테니까..

폐하의 허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이는 이 궁 안에 나밖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미천한 솜씨지만 상을 차려 봤어요.. (쑥스럽게 신 보며) 드셔.. 주실래요?

 

: (울컥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채경의 시선을 피해 버린다. 고개를 들고 있으면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채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 창가 어디쯤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고르지 않은 숨결을 들켜 버릴 것 같았다. 남자답지 못하게 밥상머리 앞에서 눈물이라도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채경 몰래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스려 채경을 쳐다봐도 감정을 들키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됐을 때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채경을.. 그의 아내를 바라본다.)

 

 

 

나를 위해 밥을 해 주는 여자.. 나의 허한 마음을 걱정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눠 주고 싶어 하는 여자..

중전이라는 지엄한 이름을 짊어지고도 소매를 걷어 부치고 아랫것들과 어울려 음식을 할 수 있는 여자..

남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면 자신의 위엄은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여자.. 그래서 아내일 수 있는 여자..

 

 

지금 이 순간, 신은 다시 한번 채경의 소중함을 느낀다.

평소보다 훨씬 간소하고 소박한 수라상 앞에서..

자신이 좋은 아내를 얻은 행복한 사내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기도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스스로가 신()이었으므로..

그 자체로 완벽하고 온전한 존재였기에 다른 무엇에 기대어 빌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이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 준 인연에.. 그 인연을 예정해 준 하늘의 누군가에게..

 

 

 

채경: (말이 없어지고 표정이 진지해진 신을 보며 좌불안석이 된다.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이번에도 짧은 생각이었던 건가 싶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때문에 호흡도 불안정해지는데.. 방금 전까지 느꼈던 뿌듯한 기분은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수저를 집는다.)

 

채경: (움찔 하는.. 움직임도 없고 표정도 없던 신이 미소를 짓고 수저를 쥐자 살짝 놀라게 되는..)

 

: 아까워서.. 먹을 수 있을까?

 

채경: ???

 

: 음식은 먹으면 없어지잖아.. 그게 아까워.. 두고두고 볼 수 없다는 게.. 내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게..

 

채경: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네..) 폐하 몸속으로 들어가면 더 좋죠..

 

: 어찌 해서?

 

채경: 그게 다 폐하의 피가 되고 살이 될 테니까요.. 그럼 평생 몸에 간직되는 거잖아요.

 

: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채경을 물끄러미 보다가)…………………..그댄.. 정치를 하면 아주 잘 할 것 같아..

 

채경: ??? (갑자기 무슨 소리지?)

 

: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가 참~~ 남달라~ 듣고 있으면 뭐든 다 맞는 것 같다니까~

 

채경: (말투가 어째 놀리는 것 같다. 그래서 칭찬으로 들리질 않는다.)

 

: (고개 끄덕이며) 좌상의 딸이라 그런가?

 

채경: (아버지까지 들먹이자 표정을 숨길 수가 없다. 기분 나쁜 게 얼굴로 드러나는데..)

 

: (채경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의 평가가 썩 유쾌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건 나름의 감탄을 표하는 것이었는데, 우리 중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보다. 이렇게 소중한 아침을 선사해 준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더는 이 화제를 입에 담지 않고 따뜻한 국이 더 식기 전에 숟가락을 국에 푹 꽂는다.)

 

채경: (신이 국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자 방금 전 굳어졌던 표정은 긴장으로 변한다. 입맛에 맞으셔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 (채경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국 한 모금을 먹는다.)

 

채경: (침을 꿀꺽 삼키며)……………………………입에.. 맞으십니까?

 

: (채경 보는)

 

채경: (두근두근)

 

: (씨익 미소 짓는다.)

 

채경: ??!!

 

: (활짝 웃으며 숟가락 가득 밥을 뜬다. 그리고 먹성 좋게 한입에 털어 넣는다.)

 

채경: (신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나자 온몸에 팽배해 있던 긴장이 빠져 나가는 것 같다.)

 

: (맛있게 밥을 먹으며) 근데 이 찬들은 어떻게 만든 거야?

 

채경: (이제는 편안한 음성으로) 사가에 있을 때 제가 즐겨 먹던 찬들이에요.

 

: (채경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는 말에 새삼스레 밥상을 쳐다보게 된다.)

 

채경: 어머니 솜씨까진 아니겠지만, 맛있게 먹어 주셔서 고마워요..

 

: 부부인(왕비의 친정 어머니를 이르는 말)께서도 요리를 하시나?

 

채경: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한 음식을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쉬시는 날엔 어머니가 솜씨 자랑을 하셨어요.

그 덕에 호경이랑 제 입이 호사했죠.. 한참 어렸을 적엔 아버지가 쉬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빌기까지 했었어요.. ^^

 

: (채경이 말하는 가정을 가져 본 적도 없고, 그런 가정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터라, 상상이 잘 안 된다. 식구들끼리 모여 앉아 음식을 먹고, 하하호호 웃으며 휴일을 함께하는 일상이..)

 

채경: 그래도 궁중 음식에 비할 바가 못 돼요.. 여기 와서 저 정말 깜짝 놀랐어요. 너무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요..

 

: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궁중 음식에 대해 화제가 넘어오자 마음이 편안해져 놀고 있던 수저를 다시 놀리기 시작한다.)

 

채경: 저 이러다가 살찌겠어요..

 

: ??

 

채경: 먹는 음식마다 맛있어서 살찔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벌써 많이 쪘을지도 몰라요..

 

: 그럼 운동 좀 해야겠네..

 

채경: ???

 

: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

 

채경: 그건.. 왜 물으세요?

 

: 무슨 일정이 잡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다 취소해.

 

채경: ??

 

: 오늘은 나랑 정화산에 가자..

 

채경: 사냥..터에요?

 

: .. 몸을 좀 놀려 줘야겠어..

 

채경: (몸을 놀려 줘야겠다는 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 (심각해지는 채경 보며 설핏 미소를 짓는다.) 무슨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너무 머리 쓰지 마~

 

채경:그래도 걱정이 돼요..’

 

: 난 심화를 달래서 좋고.. 남문 밖 백성들은 잔치 벌일 건수 생겨 좋고.. 서로서로 좋은 일이야..

 

채경: (사냥한 고기를 남문 밖 평민들에게 하사하곤 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마을에선 잔치가 벌어진다고 들었다.)

 

: 정화산에 한번 데려가고 싶었는데.. 오늘이 좋을 것 같아.

김상궁한텐 내가 일러 둘 테니까, 늦지 않게 준비하고 있어. 알았지?

 

채경: ..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오늘은.. 폐하의 원()은 모두 들어 드리고 싶었기에..)

 

: (기분 좋은 얼굴로 다시금 밥 한 술 크게 떠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3. 사정전(思政殿)

 

 

 

어제 일 때문인지, 오늘 아침 정무회의는 병무(兵務)와 관련된 안건이 많이 올라왔다.

해루국의 미유왕이 어떤 용단을 내릴지 신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탓이었다.

왕의 선언으로 미유왕이 공주를 살려 줄 시에, 운우국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은 허언을 하지 않는 존재이므로, 전쟁은 이미 선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만약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해 대비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대체로 우려보다는 활기차게 의견을 개진하며 전쟁을 대비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운우국의 전력상 해루국과의 전쟁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신이 있지 않았던가?

왕께서 마음만 먹으면, 해루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싹 쓸어 버릴 수 있었다.

왕의 호언장담은 말로만 그치는 허풍이 아니었다. 분명한 경고이자, 예고나 다름 없었다.

 

다만..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우방국이 사라지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해루국은 조공 국가들 중에서는 친우(親友)라고 이름 붙일 만한 나라였고,

자원이 풍부하여 운우국에도 다방면으로 도움이 되어 온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통째로 잃는다고 생각하니, 아쉽다는 의견도 꽤 오고 갔다.

 

그렇게 실체는 없지만, 명확한 주제에 대해 설전을 벌인 후에야 정무회의가 끝이 났다.

 

 

그리고 현재, 신은 편안한 자세로 다과상을 앞에 두고 우현과 마주앉아 있다.

 

 

 

우현: 정화산에 가신다구요?

 

: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우현: 대전에 들어서다가 류대장과 잠시 얘길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 (농담조로) 호위대장이 그리 입이 가벼워서야~ 입단속 좀 해야겠는데요?

 

우현: (신의 농담은 가볍게 들어 넘기고) 중전마마도 동행하신다구요?

 

: (멈칫.. 입꼬리 잦아들며 우현 보는..)

 

우현: 추계 사냥(왕실 공식 사냥 대회)도 아닌데.. 중전마마를 동행하는 연유가 뭔지 여쭤 봐도 될는지요?

 

: ……………………………..왜요? 걱정되십니까?

 

우현: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궁금해서 여쭙는 것인걸요..

 

: (고개 갸웃하며) 난 늘 좌상이 묻는 말엔 두 번 세 번 생각하게 됩니다.. 표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지 몰라서요..

 

우현: ………………………제가 그리 무섭습니까?

 

: (피식) .. 무서워서 그런 건가..?

 

우현: ?? (농담으로 던진 말에 이리 대답하시니 당혹스럽다.)

 

: ………………….제 스승님이셨잖아요..

 

우현: (신 보는)

 

: 아무리 무서울 것 없는 황태자라 해도, 스승님은 두려운 존재였어요.

 

우현: …………………………그러셨습니까?

 

: (끄덕끄덕) ..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우현: (신 보는)

 

: 좌상이 내 주는 숙제를 열심히 했던 것도.. 좌상의 수업은 절대 빼먹지 않았던 것도..

좌상의 표정을 살피는 버릇이 생긴 것도.. 모두 좌상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어요..

 

우현: ..

 

: 다른 스승들에겐 그런 마음이 안 들었는데.. 유독 좌상한테만 그랬어요.

 

우현: ……………..그리 맘에 들고 싶어 한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칭찬을 안 해 드려서 실망이 크셨겠군요.

 

: (피식) ~~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근데 더 분통이 터지는 게 뭔 줄 아십니까?

 

우현: ???

 

: 실망했다는 티를 내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절대 좌상한테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우현: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걸 참고) 왜 그렇게 숨기셨는데요?

 

: 우습게 보일까 봐요..

 

우현: (신 보는)

 

: 어린애가 유치하게 군다고 생각할까 봐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우현: 어찌 제가 태자 저하를 우습게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 ……………………………………..좌상이라면.. 못난 인간은 우습게 여길 것 같았어요.

 

우현: ..

 

: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이 못됐다 생각하면, 준엄한 눈길로 쳐다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솔직히 지금도 조금 떨려요..

 

우현: ???

 

: 어제.. 내가 못난 모습 보였잖아요..

 

우현: …………………………그리 생각하십니까?

 

: 조금요..

 

우현: ..

 

: 제 결정이.. 잔혹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우현: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 아니오! (곧바로 나오는 대답)

 

우현: (남몰래 미소 짓는.. 후회하지 않는다는 대답에 남몰래 만족하는..)

 

: 솔직한 심정으론 더 잔인하게 굴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왕으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우현: …………………………………미유왕이.. 공주를 제 손으로 처단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 .. (망설임 없는 대답)

 

우현: (자기도 그럴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부모 마음이라는 게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측은 금물이었다.)

 

: 잠시 갈등은 하겠지만, 나라를 담보로 딸을 살리진 않을 거라 생각해요.

 

우현: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형벌을 선택하셨습니다..

 

: 그래도 난.. 나름 배려해 준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현: 어찌해서요?

 

: 적어도.. 마지막으로 딸을 볼 수는 있잖아요. 이리 보내지 않았다면, 미유왕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딸을 맞았을 거예요..

 

우현: 어쩌면 그게 더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제 손으로 딸을 쳐야 하는 아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 딸의 죄가 아무리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해도, 부모는 자식 편을 들어 주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걸 모르지 않아 이리 마음이 쓰이는 거겠지요.. 나도 자식을 둔 아비니까요..)

 

: (우현의 눈빛을 보고 뭔가 항변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문다.)

 

우현: (신이 삼킨 말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 (잠시 찻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우현: ..

 

: 어떤 일이든 장단점이 있어요. 이번 일도.. 그럴 거구요..

 

우현: (신 보는)

 

: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재회할지에 대해서까지 생각해 주고 싶진 않아요.

어차피 칼자루는 그쪽으로 넘어간 거고, 난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요.

 

우현: (그렇다. 이미 끝난 일이다. 더는 왈가왈부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나간 일에 대해 따질 게 아니라,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하는 게 급선무다. 작은 나라라고는 하나 저력이 있는 해루국이었다. 실제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운우국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관직을 놓으려 할 때마다 이렇게 큰 일이 하나씩 터져 떠나는 발길을 붙잡곤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 편히 조정에서 물러날 수 있을지.. 마음이 복잡하다.)

 

: 내 대답이.. 맘에 안 들어요? (복잡해진 우현의 표정을 보고 이리 짐작한다. 어쩌면 도둑이 제 발 저려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우현: (도리질한다.) 아닙니다, 폐하..

 

: 진짜.. 아니에요?

 

우현: .. 그리고.. 어제의 처사도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우현 보는)

 

우현: 왜 그리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생각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더 확실한 복수는 없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 (조금 놀라서 우현 보는.. 좌상이 이리 말해 줄 줄 몰라 살짝 당혹스럽기도 하다.)  

 

우현: 어제 희연 공주 앞에서 흥분하지 않으신 것도.. 희연 공주를 손수 처단하지 않으신 것도..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 ..

 

우현: 당장의 분노를 표출해 끝내기보단, 순간의 분노를 참아 더 큰 벌을 줄 수 있는 건..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절제력입니다. 헌데 폐하께선 끝까지 참아내셨지요.

희연 공주를 물린 후, 해루국 사절단 회귀 건에 대해 논의할 때조차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신하로서 감히 폐하를 평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감탄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

 

우현: 지켜보는 제가 감탄할 정도인데.. 어찌 스스로를 못났다 여기십니까?

 

: (우현이 이리 말해 주니 감정이 복잡미묘하다.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하는 것도 같고, 칭찬 받을 일이 아닌데 칭찬을 듣고 있으려니 창피한 것도 같고.. 잘 모르겠다.)

 

우현: 어찌 그리 참을 수 있었습니까?

 

: (우현 보는..)……………..…………………………………..(결국엔 피식 웃는다.)

 

우현: ???

 

: 내가 참을 수 있었던 건.. 단 한 가지 연유밖에 없습니다..

 

우현: (신 보는)

 

: 분노를 참았던 것도.. 그런 처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사람 덕이었습니다.

 

우현: (그 사람이 누구일지.. 짐작이 되어 숨을 죽이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 그 자들은.. 그 사람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겁니다.

아마 지금도 정확히 모를 거고.. 죽을 때까지도 모를 겁니다. 어쩌면..

저조차 그 사람의 존재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그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숨을 조금 고르고..)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벌을 내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우현: ..

 

: 내가 분노를 참아야만 내가 원하는 벌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지지 않으면, 제일 잔인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참았습니다.

그 사람을 내게서 앗아가려고 한 자들을 그리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 있었습니다.

 

우현: ..

 

: 순간순간 잔인하고 못난 내 모습을 발견했지만.. 눈 감았습니다.

좌상에게 밑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좌상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으니까요.

좌상에게는 훌륭한 제자, 훌륭한 주군, 훌륭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었으나..

그 사람은 굳이 내가 훌륭하지 못한 인간이라도 안아 줄 사람이거든요..

조금 못났더라도 조금 모자라더라도 그저 나란 인간을 보듬어 줄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멈추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현: (채경이가.. 폐하께 그리 위안이 되는 사람입니까? 그리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때로 왕과 왕비로 만난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권력의 중심축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는 그들이 부부이기보다는 권력자로서 경쟁하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느 부부들처럼 살지 못하는 게 왕과 왕비라는 불쌍한 인간들이지요. 오롯이 부부로도 살지 못하고, 오롯이 적대 관계도 되지 못하는.. 양날의 검처럼 버리지도 취하지도 못하는 불행한 공동체.. 그래서 행여나 폐하께서 그런 배우자를 만나 그런 삶을 살까 걱정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폐하를 보며 진실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선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아내를 얻으셨군요.. 잃어 버리면 심장을 도려낸 듯 아플 반려를 맞으셨군요.. 다른 무엇보다 그 점이 마음이 놓입니다.. 이 어지러운 시국에도 폐하께서 마음 줄 곳을 찾았다는 사실이.. 이제는 더는 외롭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이 늙은 신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군요..)

 

: ………………………………….좌상에겐 늘 받기만 합니다..

 

우현: (신 보는)

 

: 좌상의 20여 년 세월을 내게 준 것도 모자라.. 평생을 함께할 가족까지 주셨어요.

 

우현: (우리 채경이가.. 폐하의 가족이 되었나요..? 벌써.. 가족이 되었나요?)

 

: …………………………………고맙다는 말을..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습니다.

 

우현: (울컥 하는.. 신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 흔한 말이 이리 심장을 내려앉게 할 줄은 몰랐다.)

 

: 고맙습니다, 좌상.. (고맙습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

 

우현: (빙그레 미소 짓는.. 그 어떤 대꾸도 이 웃음을 대신하지 못할 것 같다.)

 

: (쑥스러운 말을 내뱉고 나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서 괜히 먼 산을 보며 손 부채질을 한다.)

 

우현: (신의 귀여운 모습에 입을 가리고 킥킥 웃음을 흘리고 만다.)

 

: (귀까지 빨개져서) 흠흠.. 끝으로 좌상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우현: (웃는 얼굴로 신을 본다. 무슨 말인지 해 보라는 표정이다.)

 

: …………………………………………좌상에게 마지막으로 큰 임무를 주고자 합니다..

 

우현: ???

 

: 관직에서 물러나기 전.. 마지막 일이 될 것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좌상밖에 해 줄 사람이 없을 듯합니다.

 

우현: (무슨 일이길래 이리 뜸을 들이시는지 모르겠다.)

 

: (침을 삼킨다.)

 

우현: (신 보는)

 

: ……………………………………………..무영국에 다녀와 주십시오.

 

 

 

 

 

 

 

 

#4. 후원

 

 

 

시해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자 채경의 금족령(禁足令)도 풀리게 되었다.

그래서 채경은 내내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 있던 대비전으로의 아침 문안을 감행했다.

대비께서 독침을 맞은 후 건강 회복에 주력하고 있다는 얘길 전해 듣기만 하는 게

얼마나 마음을 무겁게 했는지는 하늘만 알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대비마마의 얼굴을 뵙고 말씀을 직접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이전에는 일상이었던 이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으며 행복한 아침을 보냈다.

서로 며칠 만에 마주하다 보니, 더군다나 큰 일을 겪은 후 만난 것이다 보니,

두 여인의 수다는 끝날 줄 모르게 이어져 해가 제법 높아질 때까지 문안 인사가 계속되었다.

채경이 인사를 올리고 대비전을 나서는 순간에도 어찌나 아쉽던지.. 걸음이 떼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화산으로 떠날 채비를 해야 했기에, 아쉬워도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교태전에 일찍 도착하고자 채경 일행은 길을 가로지르기 위해 후원을 지나쳐 갔다.

그런데 마침 후원 입구를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역시나 오랜 만에 보는 해윤 공주였다.

 

 

 

양국의 왕비와 공주는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깍듯한 인사를 올리고 안부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비마마와 마찬가지로 해윤 역시 그 일이 있고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비마마만큼은 아니더라도 해윤이 다친 것에 대해서도 마음의 빚이 있는 채경이었다.

인편을 통해 안부를 묻고 전해 듣긴 했으나 이리 직접 보는 것과는 달랐다.

이제 곧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해윤의 얘기를 듣고, 채경은 이 순간이 더 반갑게 여겨졌다.

중전이 되고 처음으로 맞은 타국의 왕족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솔직히 외국인을 처음 봤다.)

우연히 험한 일을 함께 겪으며 생긴 동질감이 해윤을 의미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이 당찬 공주님이 좋은 기억을 안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적국으로서 운우국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데다 이런 일까지 겪은 마당에

그런 바램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기적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랬으면 했다.

 

 

 

해윤: 그런데.. 그 손은 어찌 된 거예요?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대화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던진 질문.. 처음 인사를 할 때부터 내내 눈길이 가던 걸 묻고야 만다.)

 

채경: (해윤이 가리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손 여기저기 고약과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해윤: 다치셨어요?

 

채경: (쑥스러운 미소 지으며) 밥 하다가 기름이 좀 튀었어요.

 

해윤: ???

 

채경: 괜찮다고 했는데, 약이라도 안 발라 주게 하면 다들 날 죽일 태세길래.. (말하다가 킥킥 웃는다. 요리에 익숙치 않은 채경이 실수하면서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자 치료해야 한다며 궁녀들이 어찌나 무섭게 닦달하던지.. 그 상황만 놓고 보면 누가 상전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이 모두 나를 걱정해서라는 걸 알기에, 되돌아보면 웃음이 났다.)

 

해윤: ………………………..직접.. 음식을 하셨단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 얘기 같은데..)

 

채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오늘 소주방이 저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해윤: (채경의 확답에 조금 놀란다. 운우국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서도 왕족이 음식 따윌 한단 얘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우리나라에서도 내가 주방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런데.. 대국 운우국의 왕비가, 손이 저리 되도록 음식을 한다고? 대체.. 당신은 어디까지 나를 놀라게 할 셈이지?)

 

채경: (소주방에서의 소란들과 폐하와의 따뜻했던 아침, 대비마마와의 만남까지.. 오늘 아침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해윤: 역시.. 마마는 특이하세요..

 

채경: (해윤의 말에 고개를 돌려 공주를 본다.)

 

해윤: (채경의 크고 동그란 눈을 바라보며) 마마 덕분에 운우국이 좋아지려고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채경: ???

 

해윤: 저는.. 운우국이 싫어요..

 

채경: !!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직접 얘길 들으니 심장이 쿵 내려앉을 것 같다.)

 

해윤: 솔직히 싫다는 표현으론 부족해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고.. 운우국이 산산이 부서지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채경: (좀 전에 너무 놀랐는데, 밉고 싫었다는 해윤의 말과는 달리 표정은 온화해 보인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왠지 모르겠지만..)

 

해윤: 두 분의 국혼을 보기 위해 운우국을 가로질러 오는 동안에도 그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내 나라 내 백성들이 그리 헐벗고 죽어가는 게 다 이 사악한 운우국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채경: …………………….이런 얘기.. 해도 돼요?

 

해윤: (채경 보는)

 

채경: (진심으로 걱정되는 마음으로) 제가 이래 보여도.. 운우국의 왕비거든요.

정치.. 외교.. 그런 건 잘 모르지만 이런 얘기 맘 편히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잖아요.

 

해윤: (피식) 맞아요.. 내가 운우국에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건 들켜선 안 되는 일급 비밀이죠.

더군다나 이 나라의 군사를 움직이는 임금님과 한 이불 덮고 자는 왕비님껜 절대 해선 안 되구요..

 

채경:그런데.. 왜 그렇게 즐거운 듯 얘기해요? 이런 무시무시한 얘기.. 막 해도 되는 거예요?’

 

해윤: 하지만.. 마마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얘기.. 해도 될 것 같아요.

 

채경: ???

 

해윤: 전쟁을 치를 때만 해도.. 운우국에는 뿔 달린 악마들만 산다고 생각했어요.

운우국 병사들이 피 흘리고 쓰러지는 모습을 봐도 우리랑 같은 인간으로 보이질 않았어요.

내 아픔이 너무 커서.. 내 분노가 너무 커서.. 그들의 아픔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마를 보고.. 상대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마음이 뭔지 알게 됐어요.

 

채경: (해윤 보는)

 

해윤: 난 늘.. 내 나라 내 백성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난 공주로서.. 그들의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인 그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했던 거더라구요..

완전히 나를 버리고, 나보다 그들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함께 아파한다 하면서도 공주로서의 위엄은 잃지 말아야지.. 자존심은 지켜야지.. 했거든요.

 

채경: ..

 

해윤: 그런데..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면.. 자존심도 위엄도 버리되 지켜질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마마가 다친 이들을 위해 왕비로서의 체통을 벗어 던졌을 때 비로소 더 빛이 나는 걸 보는 순간..

자신을 모두 내던져도 내가 버려지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여전히 나라는 걸.. 알았어요. 그때서야 알았어요..

 

채경: 그런 얘기 들을 만큼 내가 희생 정신이 투철하지 못해요.

 

해윤: 희생 정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마마는 몸이 먼저 움직이잖아요.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뻗어 나가고 발이 먼저 움직이잖아요.

알아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그리 하는 게.. 더 대단한 거예요.

 

채경: (그래도.. 이런 칭찬을 듣고 앉아 있을 인간은 못 되는데.. 쑥스럽고 민망하다.)

 

해윤: 이런 왕비님이 있는 나라라면.. 운우국도.. 좋아질 수 있겠다.. 싶었어요.

 

채경: (해윤 보는)

 

해윤: 운우국에 뿔 달린 악마만 살지 않는다는 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만난 평범한 운우국 백성들을 보며 알게 됐지만..

이곳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우리랑 다를 바 없는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완전히 감정이 사라지진 않았어요.

 

채경: ..

 

해윤: 하지만 마마를 보면서.. 궁 안의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을 보면서..

운우국은 우리가 쓰러뜨려야 하는 적이 아니라 동지일 수 있겠다.. 싶었어요.

 

채경: 그리 생각을 바꿔 주셨다니 감사한데요? 험한 꼴을 많이 당하셔서 악감정이 늘었으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좋게 봐 주셔서 고마워요..

 

해윤: 감사는 제가 해야 되는걸요.. 마마의 목숨도 마다하고 살려 주셨잖아요.  

 

채경: (손사래 치며) 아니에요~ 저는 독에는 쉬이 죽지 않는 몸이라 시간이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그걸로 희생 정신이 투철하다느니, 자기 목숨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한다느니 하면 진짜 창피해요.

 

해윤: (채경 보는)

 

채경: …………………………………………….왜 그렇게 보세요?

 

해윤: 그렇게 대단한 몸을.. 엄청난 힘을 가졌으면서.. 아무 욕심이 없어 보여서요..

 

채경: ???

 

해윤: 나한테 마마와 같은 힘이 있다면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다녔을 거예요.

 

채경: ..

 

해윤: 힘겹게 전쟁을 치를 때마다 나한테도 큰 힘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운우국 왕이 갖고 있다는 그 힘이 왜 나한텐 없는 거냐며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그런 힘이 있으면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상상할 때도 정말 많았어요.

정말.. 마마 같은 힘만 있었으면, 그렇게 힘들게 고생 안 해도 됐을 텐데..

 

채경: ..

 

해윤: 그런데 마마는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도 너무 태평해 보이세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른다는 얼굴로, 그런 힘은 없다는 듯 행동하세요.

어떻게..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서 안 쓸 수가 있어요? 아깝지 않아요?

 

채경: ..

 

해윤: 나라면.. 내가 그런 힘을 가졌다면.. 마마처럼 살지 않았을 거예요.

 

채경: 내 힘이.. 부러우세요?

 

해윤: (당연하지 않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채경: 하지만 난.. 내 힘을 자랑스러워한 적이 별로 없어요.

 

해윤: ??!! (채경의 말이 충격적이다. 어떻게 그런 힘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지?)

 

채경: 뽐내기보단 숨기는 데 급급했고, 행여 내 힘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며 살았어요.

 

해윤: 어째서요? (자기가 답답해서 거친 질문이 나간다.)

 

채경: 알려져서 좋을 것 없는 과한 힘이고.. 양반가 규수 체면에도 맞지 않는 힘이니까요..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힘이 알려지고 간택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거셌어요..

 

해윤: (그건 들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채경: 공주님도 알다시피 운우국에서 여인의 삶이라는 게.. 아주 단순 명료해요.

남편 내조 잘하고 자식을 잘 키워내면 그 여인의 삶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해윤: (그래서 운우국 규수들을 온실 속 아가씨라고 얕잡아 봤다. 그렇게 말했다가 운우국 왕에게 한소리 듣긴 했지만..)

 

채경: 집안을 잘 이끌어 가기만 하면 되는 여인네에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를 탐지하고, 독에도 끄떡 않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 따위.. 불필요할 뿐이에요.

아니, 소문나면 되려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고 흉측한 술수를 부린다고 손가락질 받겠죠..

그래서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집안 망신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힘을 숨겨야 했어요.

남들한테 떳떳하게 드러낼 수도 없는 힘이.. 뭐 그리 자랑스러웠겠어요?

오히려 짐 같을 때가 더 많았는걸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더 간절했는걸요.. 

 

해윤: …………………………..그래도.. 부러워요..

 

채경: (피식.. 해윤의 갈망은 못 말리겠다 싶다.) 힘에 집착하면.. 힘에 굴복 당할 수도 있어요.

 

해윤: ???

 

채경: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힘을 넘어선 과한 힘을 갖게 됐을 때.. 필연적으로 인간은 오만해지고 말아요.

나보다 약한 사람을 깔보고..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욕심도 커지지요..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세상 누구도 날 대적할 수 없다고.. 오만 방자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돼요..

그래서.. 그 대단한 힘으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힘을 권력 삼아 결국엔 세상을 괴롭히는 데 쓰게 돼요..

 

해윤: ………………………….마마도.. 그러셨어요?

 

채경: 그럼요~ 나도 인간인걸요..

 

해윤: (믿기지 않는다.)

 

채경: 처음엔 마음껏 뛰어다녀도 숨이 차지 않는다는 게 신기해서 내 힘을 마구 분출하고 다녔어요.

내 몸안에서 넘쳐나는 힘이 너무 좋아서.. 이 충만한 힘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산을 뛰어다녔어요.

그러다가 달리기뿐 아니라 이 힘으로 하늘도 날 수 있고, 장풍도 쏠 수 있고, 장소도 이동할 수 있고,

숨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아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거예요..

그때부터 내가 가진 힘을 사람들을 상대로 쓰게 됐어요.. , 날 봐라~ 난 이런 인간이다~ 과시하고 싶어서..

 

해윤: 어렸잖아요.

 

채경: .. 어렸죠.. 그래서 유치한 자기 자랑이 큰 해를 끼치지 않고 끝날 수 있었어요.

내게 좋은 스승님이 안 계셨다면.. 아버지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실수할 뻔했어요..

 

해윤: (채경 보는)

 

채경: 큰 힘은.. 검처럼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해윤: ..

 

채경: 나는요.. 사람을 살리는 데 내 힘을 쓰고 싶었어요.

활인검(活人劍)처럼 내 힘도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길 바랬어요.

그게.. 운좋게 큰 힘을 갖게 된 내가 빚을 갚는 유일한 길 같았거든요.

 

해윤: ..

 

채경: 그리고.. 살아가는 데 내 힘은 굳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 하셨어요.. 그래서..

내 힘을 감췄어요. 힘을 발휘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어요. ^^

 

해윤: ..

 

채경: (해윤 보는)

 

해윤: (채경 보는)  

 

채경: ??? (해윤이 왜 자길 뻔히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너무 이상한 말을 늘어놓아 저리 보는 걸까?)

 

해윤: …………………………………..끝까지 특이한 말씀만 하시네요..  

 

채경: ??

 

해윤: 마마의 그 순수한 마음이..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서 바래지 않길 바래요..

 

채경: ..

 

해윤: 구중궁궐 속에 갇혀 간신들의 눈과 귀에 속지 않길.. 권력 암투에 빠져 지금의 모습을 잃지 않길.. 바랄게요.

 

채경: ..

 

해윤: 그리고.. 잊지 않을게요. 운우국에 고운 마음씨를 지닌 왕비님이 살고 계시다는 걸요..

 

채경: (해윤 보는)  

 

해윤: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보이며 채경을 바라본다.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될 것 같다. 과거의 감정들은 모두 놓고 가리라.. 새로운 삶이 시작된 이곳에.. 과거는 모두 놓고 가리라..)

 

 

 

 

 

 

#5. 도성 외각

 

 

 

도성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정토산은 산세가 험해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산이다.

그러나 기암절벽이 이루는 풍광이 아름다워 찾아오는 이 또한 줄을 잇는 명산이었다.

워낙 면적이 넓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산인지 알 수 없는 정토산의 어느 으슥한 움막..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천혜의 요새에 위치한 움막은 그나마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아는 사람만 찾아올 것 같은 허름한 움막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또한 곧 쓰러질 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움막 안은 아늑하고 정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겉과 밖이 이리 다른 것만 봐도 이곳이 얼마나 비밀스러운 공간인지 짐작할 수 있을 듯..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볕이 잘 들어오지 않는 실내가 답답하지도 않은지, 쉴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희연 공주가 어젯밤 궁을 떠났다구요?”

 

그렇다네.. 떠날 채비를 마치자마자 떠났지..”

 

완전 쫓기듯 떠났어.. 일국의 공주의 행차 치곤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

 

그래도 살아서 제 발로 궁을 걸어 나간 게 어딥니까? 난 그 자리에서 즉살 당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 나도 처음엔 왜 돌려 보내나 했어. 헌데, 역시 우리 임금이더군.. 즉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처벌을 찾아냈잖은가?”

 

그걸 감탄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때문에 해루국은 끌어들이기 영 어렵게 됐습니다.

임금이 저리 나오는데, 어떻게 운우국에 반기를 들겠습니까? 아마 죽었다 하고 지낼 게 뻔합니다.”

 

그리고 태오가 죽은 것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태오 패거리가 물어다 줄 수 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이번 참에 희연 공주 손에 중전이 죽어 줬으면 일이 훨씬 쉬워졌을 텐데.. 그것도 아쉽습니다.”

 

어차피 이번엔 왕을 찔러 보는 게 목적이었잖습니까? 난 그리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 (모두들 입을 연 사내를 쳐다본다.)

 

희연 공주의 손을 빌려 중전이 제거됐으면 더 바랄 게 없겠으나, 그래도 알아낸 사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운우국 왕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건.. 예상치 못한 큰 소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어쩌면.. 피도 눈물도 없는 저 무적 왕을 무너뜨리는 길은.. 매우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지금의 승리에 도취해 안일해진 이 순간.. 우리는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을 감싸고 있는 두터운 성곽을 조금씩 갉아 먹으면 됩니다.. 결국엔 무너져 버릴 성곽을요..”

 

“..”

 

 

 

천벌을 받아 마땅한 역모(逆謀)를 논하는 사내의 얼굴은 덤덤하기만 하다.

말을 마친 종내에는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자신만만하고 잔인한 미소..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을 닮은 사내의 찢어진 눈은.. 누군가와 무척 닮아 있다.

그리고.. 그 미소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6. 정화산

 

 

 

채경: (멀뚱멀뚱 신을 쳐다보며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짓는다.)

 

: 뭘 그렇게 뻔히 봐? 이거 안 받을 거야?

 

채경:그러니까요~! 그걸 왜 주세요? 그 흉측한 건 왜 주는 건데요?’

 

 

 

 

 

눈으로 불평을 표현하는 채경에게 신은 매끄러운 목검을 내밀고 서 있다.

 

 

 

 

 


출처 : 시나리오 창작방
글쓴이 : 쏭기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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