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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닛/드라마

[스크랩] <상상소설>왕(王)의 여자(39) 행복한 하루

 

 

본의 아니게 너무 늦게 왔습니다.. 죄송하다는 인사부터 하고 시작할게요.

 

월요일에 마감이 끝나고, 목요일까지 또 다른 마감이 있었어요.

우리 잡지 마감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게다가.. 최근에 주중에 하는 드라마를 다 섭렵하다 보니..

글 쓸 시간이 상대적으로 너무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늦었습니다.

안 풀리던 스토리는 머리가 좀 개이다 보니 윤곽이 잡혔는데요..

그걸 글로 풀어낼 시간이 없어서 짬짬이 쓰다 보니 오늘에서야 왔네요.

목요일에 올리고 싶었는데.. 정리하다 보니 금요일 새벽이 되고 말았어요.

이번 주엔 열심히 달린다고 해놓고, 이것밖에 못 해서 두 배로 미안합니다..

 

 

.. 지난 편 댓글을 보면서, 작가보다 더 훌륭하게 글을 읽는 독자들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 주셨는데요.. 제가 기대한 것보다 더 잘 선물을 받아가셔서 고마워요.

신이랑 채경이.. 지금은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 같은 행복을 보내고 있는데요..

이들의 행복한 순간을 지켜보는 검은 시선은, 어느 정도 둘의 삶을 파괴할 테지만,

여러분의 예상대로 신이랑 채경이가 멋지게 이겨낼 테니.. 믿고 기다려 주시길 바래요..

 

이번 편도 두 아이의 행복한 한때를 그렸습니다. 언젠가 채경이가 간택령 중에 한 얘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쓴 에피소드구요..

우리 임금님이 난생 처음으로 손에 흙을 묻히면서 고생 좀 하십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고생이니 평생 추억이 될 거예요..

만만찮은 부인 만나 고생 많으시지만.. 그래도 이게 다 행복이라는 걸 우리 임금님도 잘 아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짬짬이 시간 날 때마다 써내려가고 있어서, 장면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에요.

더군다나 그리고 싶은 장면들을 다 우겨 넣다 보니, 내용이 산으로 가기 직전에서야 턴을 하곤 했어요.

그래도.. 제가 이번 편에서 하고 싶었던 요지는, 두 아이가 행복하고도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니..

이 아이들의 그 시간 속에서 여러분들도 행복한 느낌을 받아 가시면.. 그것으로 성공이라 생각할게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늦게 온 것에 대해서도, 내용에 대해서도, 주저리주저리 변명만 하고 가네요..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갈수록 뻔뻔해지는 기분이에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쫓기게 됐는지.. 못났습니다, 정말..

 

주말 재미있게들 보내시구요.. 건강하게 10월 한 주 마무리하시기 바래요..

저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남친 외국으로 다시 보내고 나면.. 여유가 있길 바라며~

(제가 이런 얘길 하기 때문에 남친에게 여기를 알려 줄 수가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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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행복한 하루

 

 

 

 

 

 

#1. 명운산 암자

 

 

 

해가 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늘 아스라한 안개가 끼어 있는 명운산은 희미한 어둠에 싸여 있다.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로 접어든 이후, 아침 안개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 희미한 어둠이 내려앉은 명운산 산자락, 안개가 휘감아 돌고 있는 아담한 암자..

아직은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있어야 할 시각.. 그곳에 조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는 다름 아닌 밤새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하던 꿈 때문에 이른 시각 깨어난 이연이었다.

 

 

일주일 전, 도성에서의 일을 모두 마무리 하고 암자로 돌아온 이후.. 계속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녀의 예상대로 되었고, 폐하는 자신의 짝을 잘 찾아 평생의 반려를 맞이하셨다.

헌데.. 왜 이리 불안한 걸까..? 지난 1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리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6년 전 큰 변고가 일었을 때도, 이렇게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폐하께서 하늘의 선택뿐 아니라, 만백성의 왕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한 통과 의례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만약.. 그때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그리 일찍 왕권을 공고히 하진 못하셨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자 시절 폐하께선 기반도 약하고, 지지 세력도 많지 않은 힘 없는 후계자였다.

오로지 적통 후계자라는.. 폐하를 대신할 왕자가 없다는 태생적 조건만으로 버틸 수 있는 위태로운 자리였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혈통을 중시하는 운우국이었기에, 왕가 대대로 전수된다는 힘이 약하다 하더라도..

비범한 재주가 없다 하더라도 오직 적통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백성과 신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워낙 왕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강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무엇 하나 검증되지 않은 태자도 믿고 따랐다.

 

그래도.. 불안한 일이긴 했을 것이다. 선왕은 병이 깊으셨고, 왕비 마마는 자애로웠으나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믿을 건 태자 마마뿐인데, 심중을 알 수 없는 어린 왕을 진심으로 따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 일이 터졌다. 선왕이 서거하자 마자 역모의 불길이 치솟았고,

백성들의 우려를 이용한 오만방자한 권력가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폭발했다.

그들은 쉽게 왕권을 손에 넣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쉬워 보였을 테니..

절대 권력을 구사하던 왕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것은 여인인 왕비와 힘 없는 태자였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그들 눈에 왕비와 태자는 함락하기 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화려하게 타올랐던 욕망의 불길은.. 온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몰고 온 거센 비에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운우국의 왕들이 구사할 수 있는 궁극의 비기(祕技).. 바로 구름과 비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것이었다.

왕가에 태어난 사내 중 운우(雲雨)를 부리는 이는 왕으로 태어난 자밖에 없었다. 각기 능력의 차이가 있긴 했으나,

비와 구름을 부릴 줄 안다면 그건 운우국의 왕으로 하늘이 지정했다는 뜻이었고, 추호의 의심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온 운우국이 떠내려갈 만큼 비를 뿌려댄 폐하의 능력을 목격한 자 누구도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우려는 그 비와 함께 쓸려가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기회를 제공해 준 꼴이 되었다.

폐하가 만 백성에게 왕으로 설 수 있는 기회..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왕으로 천명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런 걸 세상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한다. 백성들의 언어로는 죽 써서 개 줬다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어찌됐든 폐하는 탄생부터 남달랐고, 태자 시절도 남달랐으며, 보위에 오르는 순간조차 남다른 과정을 거치셨다.

그 이후 6년이 흐르는 동안 등장만큼이나 충격적인 국정 운영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운우국을 장악하셨다.

 

남들은 놀랍다고 하나, 이연은 그리 생각지 않았다. 폐하는.. 원래 그런 분이었다. 원래.. 남다른 분이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이 언제 나서야 할지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놀랄 만큼 치밀하고 영악하며 인내심이 강한 분이셨을 뿐..

그래서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태자 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그 결과 왕이 되어 나래를 펼 수 있었다.

 

풍문으로 전해 듣는 폐하의 얘기만으로도 이연은 왠지 모르게 흡족했고, 안심이 되었다.

온몸에 피를 덮어 쓰고 그녀의 꿈자리를 어지럽히던 왕자님은 이제 옛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헌데.. 요 며칠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원인은, 파악하기 힘든 꿈에서 비롯되었다.

본디 꿈에서 본 걸 명확하게 떠올리는 편이었는데, 최근 며칠간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불안한지도 모르겠다. 분명 무언가가 눈앞을 휘젓고 다녔는데.. 깨어난 후

다시 떠올리려 하면 도저히 떠올려지는 것이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나이 들어 예지력이 떨어져 그런 거라고 하고 싶지만, 기색(氣色)은 더 예민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늘 잘 보이던 꿈마저 뿌옇게 보이자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나의 눈을 멀게 한 것은.. 하늘의 뜻일까?

세상사에 미련도 없고.. 개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모르지 않지만..

요 몇 달간 세상에 나갔다 온 탓인지 세상에 간섭하고 싶어진 것 같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눈을 막고 있는 뿌연 장막을 걷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연: (자신의 눈처럼 뿌옇게 안개가 낀 명운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2. 도성 인근 농가

 

 

 

끝이 안 보이게 펼쳐진 노랗게 익은 고개 숙인 벼의 물결.. 풍년의 상징..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는 풍년의 상징들 사이로 끝이 안 보이게 서 있는 병사들..

병사들의 물결을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집 대문과 연결되어 있는데..

 

 

높지 않은 초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에도 사람이 수북하다.

평소 입고 있던 옷과는 다르지만, 반듯하고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여느 여염집 남자와 여인들이라고 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절제된 자세와 달리, 표정에서는 은근한 웃음과 설렘이 엿보였다.

그건 모두 궁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해방감.. 자유로움.. 같은 것이었다.

병사들보다 궁 밖 외출이 제한되는 내관과 궁녀의 경우, 외출 자체가 신나는 일이었다.

하여, 중전마마께서 계획한 뜻하지 않은 가을날의 소풍(?)이 즐겁기만 한 이들이었다.

 

 

폐하 납십니다..”

 

 

낭랑한 성내관의 보고에, 마당에서 웅성대던 사람들 모두 예를 갖추고 어떤 방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 (어기적거리며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온다. 표정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감하다.)

 

채경: (신의 뒤를 따라 나오며 연신 싱글벙글한 미소를 띠고 있다.)

 

: (댓돌로 내려서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본다. ..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채경: (신 옆으로 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훑어 본다. 다시 봐도 흡족한 듯 활짝 웃는다.)

 

: (자신의 몰골(?)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 채경이 이해가 안 된다. 아니, 이 순간만큼은 약간 밉기까지 하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됐는지.. 정말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검술 배우는 조건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세요.”

 

“???”

 

폐하와 꼭 한번 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같이 해 주시겠습니까?”

 

뭔데?”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논에 데려가 주십시오.”

 

??”

 

“^^ 가을걷이에 동참하고 싶어요. 폐하와 함께..”

 

“!!!!!!!!”

 

내년이나 내후년에도 할 수 있겠지만.. 올해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마침 수확철이라 시기도 적절하구..”

 

.. 그걸 왜 하고 싶은데?”

 

기분이 좋거든요.”

 

“……………………………해 봤다는 뜻이야?”

 

..”

 

"언제.. 해 봤는데?”

 

“(손가락으로 하나, , 셋 세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몇 개나 굽어졌다가 펴지는지 모르겠다. 그걸 보며 놀란 표정 감추지 못한다.)”

 

“(손가락 세는 데 정신 팔려 있다가, 폐하의 진지한 시선을 느끼고 동작 멈추고는 배시시 웃는다.)”

 

“???”

 

“(손가락 열 개를 쫙 펴며) 실은 열 번도 못 해봤어요.”

 

“(그게 어디냐는 표정) 좌상은.. 딸을 어떻게 교육시킨 거야?”

 

밥 한 톨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시려고 노력하셨지요..”

 

“..”

 

내가 편히 먹는 밥이 얼마나 고생해서 얻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

 

헌데 전.. 재미있기만 했어요.”

 

“???”

 

질퍽거리는 논에서 모를 심는 것도.. 뙤약볕에서 땀 흘리는 것도.. 서툰 솜씨로 벼를 베는 것도 모두 재미있었어요.”

 

“..”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새참을 먹는 즐거움은.. 말로 다 못할 정도예요.”

 

“..”

 

그 즐거움을.. 내 낭군과도 꼭! 나눠야지 생각했었구요..”

 

“..”

 

운우국 양반들 중 누구도 쉬이 들어주지 못할 부탁이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런 바람을 갖고 있었어요.

헌데.. 내 낭군님이 폐하가 되셨으니..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품었던 바람인지라..”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함께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마지막으로 그 큰 눈을 들어 애원하듯 부탁하는 말에,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늘도 그 큰 눈은 방실방실 웃으며 그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농가로 떠나오는 이른 아침부터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지금 그의 심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행복해 보이기만 하다.

저 큰 눈이 행복과 미소로 가득할 수만 있다면 못할 게 없는 그였지만.. 그래도,

막상 농민들이 입는 차림 그대로 복색을 갖추고 나니..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날 때부터 태자로 태어났고, 왕이 되기 전이나 후나 우러름만 받고 자란 그였다.

모양 빠지는 일 같은 거.. 행동 같은 거.. 평생 단 한번도 안 하고 살아온 그였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를 보고 웃음을 참아야 하는 모습 같은 거 보인 적이 없었다.

 

헌데.. 툇마루에 들어선 그를 향해 예를 갖추던 내관과 궁녀, 병사들이 일제히 어깨를 들썩거렸다.

눈치 없는 녀석들은 손으로 급하게 입가를 막는 경우도 있었다. 애써 입술을 깨무는 이도 있었다.

행동은 각기 달랐으나, 그들이 그리 행동하는 연유는 단 하나.. 그의 모습이 황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감히 그를 보고 웃음을 흘린 간 큰 놈들을 벌 주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으나,

누가 봐도 농민의 복장을 하고 있는 그가 위엄 있게 벌을 내리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았다.

지금의 그는 그저 한 손에는 낫을, 한 손에는 곡괭이를 들고 논으로 가면 딱이었다.

그걸 스스로도 알기에 더 울화통이 터졌다. 그 누구를 탓할 것인가? 다 자신의 업보인 것을..

 

이 일을 허락한 것도 그였고, 이곳에 오겠다 한 것도 그였다.

 

그렇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자신이 허락하게 하고 이곳으로 오게 결정적 역할을 한 부인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눈치 없는 부인께선 자기 흥에 겨워 남편의 심기가 엄청 불편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받아 주는 이가 모르는 상황에서 기분 나쁘다고 표현하면 무엇 하겠는가?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인 것을..

 

 

 

: (무표정한 얼굴로 댓돌 위로 내려선다. 그리고.. 짚신을 신는다. 그 옆에 곱게 벗어 둔 비단신은 슬쩍 쳐다보고 만다.)

 

채경: (신이 짚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자, 그 뒤를 따라 곧바로 마당으로 내려온다.)

 

: (멋쩍은지 괜스레 소맷자락을 툭툭 치며 먼지를 털어내는 척한다.)

 

채경: (이 집의 주인이자 이 마을의 촌장인 남자에게 다가가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촌장: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전마마의 얘기를 듣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워 이 일을 제안 받고 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멍한 상태다.)

 

: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주고받나 궁금하다. 그러나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많아 선뜻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뒷짐을 지고 숨을 고르며 이 일의 주모자인 채경이 다가와 다음 지시 사항을 알려 주길 기다린다.)

 

채경: 그럼 길 안내를 부탁하네..

 

촌장: .. .. (굽신거리며 알았다고 한다.)

 

채경: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촌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신에게 다가온다.)

 

: (멀어지는 촌장을 슬쩍 봤다가 채경을 본다.)

 

채경: 이제 밖으로 나가시면 돼요.

 

: 분명히 얘기가 된 거지? 

 

채경: 무엇이요?

 

: 내가 가을걷이에 나서는 대신, 올해의 조세(租稅)를 감면해 주겠다는 약조 말이야..

 

채경: (난 또 뭐라고..) 그 얘긴 이곳을 선정할 때부터 협의가 된 사안이에요.

 

: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나는 그저 유흥으로 나온 거지만, 여기 백성들에겐 한 해 농사가 걸린 일이잖아..)

 

채경: 조세 감면 해 준다는 얘기에, 촌민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들었어요.

폐하께서 직접 납셨다는 게 긴장된 일이긴 하겠으나.. 나쁜 일은 아닐 거예요..

올해 수확한 곡식을 모두 가질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 얘깃거리로 남을 테니까요..

 

:무슨..?’

 

채경: 지금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떨리겠지만, 우리가 돌아간 후엔 추억이 될 거예요.

크게 잃는 거 없이 잠시 저들의 땅을 내어 주는 것뿐이니까.. 다른 걱정은 하지 마세요..

 

: ..

 

채경: 대신! 해 떨어지는 건 걱정해야 돼요.

 

: ???

 

채경: 해 떨어지면 추수고 뭐고 아무것도 못해요. 그러니까 더는 지체하지 말고 논으로 가요~

 

: (해 떨어지는 걸 걱정할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정오를 넘긴 후라, 해는 쨍쨍하기만 하구만.. 이내 툴툴거리며 재촉하는 채경에게 이끌려 대문을 나선다.)

 

 

 

끝없이 펼쳐진 황금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저곳에.. 곧 발을 내디딜 것이다.

그것이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촌민들만큼이나 신에게도 기대되는 일이었다. 어찌됐든, 황당한 하루가 시작된 것 같다.

 

 

 

잠시 후..

 

 

 

: (채경을 멀뚱히 쳐다본다.)

 

채경: 안 받으시고 뭐 하십니까?

 

: (채경이 내밀고 있는 물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선뜻.. 건네 받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채경: (손에 든 그것을 살짝 흔들어 대며 신에게 좀 더 가까이 내민다.)

 

: (오늘따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미적대는 자신이 맘에 안 들지만 마음이 그래서인지 몸이 잘 안 따라주는 것 같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 발 밑을 내려다본다. 그런데 그때 재미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채경의 그림자가.. 참으로 오묘한 동작으로 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채경: (신이 딴청을 피우자) 낫 안 받으실 거예요?

 

: (채경 보는)

 

채경: 이거 안 갖고는 벼 못 베십니다~

 

: (채경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턱 끝으로 그림자를 가리킨다.)

 

채경: ???

 

: (계속 턱짓으로 아래를 가리키며) 여기 좀 봐봐..

 

채경: (고개를 갸웃하며 신이 가리키는 대로 땅을 내려다보는데..)

 

: 이거 꼭.. 그대가 날 낫으로 찍으려는 거 같지 않아?

 

채경: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만다. 신의 상상력이 어이 없기도 하면서, 실제로 그래 보여서 재미있기도 했다.)

 

: (채경의 웃음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고는 기분 나빠 한다.) 그렇게 생각 안 해?

 

채경: (장난기가 발동하여 낫을 세워 잡고는 신의 그림자를 향해 콕콕콕콕 찌르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해야 찍는 거죠~

 

: ??!!! (아무리 그림자라도 낫으로 자길 찍어 버리는 채경의 행동에 충격 받는다.)

 

채경: (장난 멈추고 신을 올려다본다.)

 

: (기분 상한 얼굴로 채경 마주 본다.)

 

채경: ……………………………………하기.. 싫으십니까?

 

: (채경 보는)

 

채경: ……………………………폐하께서 목검을 쥐어 주실 때.. 저도 그런 표정이었습니까?

 

: (움찔)

 

채경: 싫은 티 팍팍 내면서.. 자꾸 시간만 끌었었죠..? 팔 아프시다는 폐하의 말씀을 무시하고.. 못 들은 척하면서..

 

: ..

 

채경: 하기 싫은 거 해야 할 때.. 특히 누군가 강요해서 하게 될 땐 모두다 피하고 싶어 해요.

그 맘 이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저 역시 폐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되돌려 드릴 수밖에 없군요..

 

: ..

 

채경: 저를 위해 해 주세요..

 

: (채경 보는)

 

채경: 저들뿐 아니라 제게도 잊지 못할 추억 하나 선물해 주세요..

 

: ..

 

채경: 싫으시겠지만.. 망설여지시겠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한 발 물러서는 건..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 ..

 

채경: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니, 왕은 허언(虛言)을 해선 안 되잖아요. 그러니.. 낫을 들어 주세요. 

 

: …………………………..사람 할 말 없게 하는 데 뭐 있어..

 

채경: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다.)

 

: (한숨을 푹 쉬고 낫을 받아 든다. 거친 재질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까슬까슬하게 와 닿는다.)

 

채경: (신을 위아래로 훑어 보며) 이제 완성이네요~

 

: 뭐가?

 

채경: 완벽한 농부의 모습을 갖추셨어요.

 

: (순간적으로 눈살 찌푸리는..)

 

채경: (흡족한 표정 짓고 신을 계속 훑어 본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을 놓칠 수가 없다.)

 

: (낫을 꼭 움켜 잡으며) 이거.. 가만 보면 목검보다 훨씬 더 흉측하게 생겼어.

 

채경: 그래도 얘는 엄연히 농기구입니다~.

 

: 낫으로도 사람 죽일 수 있거든?

 

채경: 그건 본분을 벗어났을 때 얘기죠.. 처음부터 사람 죽이려고 만들어진 검이랑 비교가 되겠습니까?

 

: (반박을 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래서 결국 울화통 터지는 속을 달래며 논으로 몸을 튼다.)

 

채경: 들어가실 거예요?

 

: (고개를 끄덕인다.)

 

채경: (주변에 늘어선 병사들과, 나인들, 내관들에게 고개짓 하고는 들어가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사람들: (병사들과 내관들은 신과 마찬가지로 벼를 베러 논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그 옆으로 이곳 농민들이 벼 베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 몇 명 끼어 있다. 나인들은 걱정 어린 눈길로 신과 동료들을 바라본다. 그 중에는 나이 지긋한 성내관도 끼어 있다.)

 

성내관: (살아 생전 이런 폐하를 뵙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지라, 감격스럽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저 크게 역정내지 않으시고 오늘 하루가 마무리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채경: (솔선수범하여 논으로 먼저 들어선다. 차가운 논물이 종아리를 감싸는 느낌에 온몸이 찌릿하다.)

 

: (태어나서 처음으로 논물에 발을 담가 본다. 질퍽거리는 흙바닥과 차가운 물이 닿는 감촉이.. 썩 유쾌하진 않다. 대체 종아리를 스쳐 지나가는 정체불명의 부스러기들은 뭐란 말인가? 찝찝함에 혀를 내두를 것 같다.)

 

채경: (신이 뒤따라 들어온 걸 보고는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는다.)

 

: (채경 곁에 선다.)

 

채경: (벼를 몇 포기 움켜 쥐고는 신을 바라본다.) 낫을 이렇게 드시구요..

 

: (진지하게 설명을 들으며 채경이 하는 대로 따라 한다. 하지만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왠지 어설퍼 보인다.)

 

채경: (능숙하게 벼 줄기를 싹둑 잘라낸다.) 이렇게 베시면 돼요.

 

: (살짝 감탄한다. 나무랄 데 없는 낫 솜씨였다.)

 

채경: 한 번 해 보세요~

 

: (침을 꿀꺽 삼키고 낫으로 벼를 베어 본다. 그런데 힘 조절이 잘못 됐는지 얼기설기 베어진다.)

 

채경: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망설이면 안 돼요. (다시 벼를 한 움큼 잡고는 싹둑 자른다.) 이렇게 한번에 잘라야 돼요.

 

: (못한다고 지적 받자 오기가 생긴다. 그래서 이번엔 과감하게 벼를 벤다.)

 

채경: ~~ 괜찮은데요~? 그렇게 하면 돼요.

 

: (금세 의기양양해져서) 별 거 아니네~

 

채경: ^^ 그렇죠? 별로 안 힘들죠?

 

: (벼를 싹둑싹둑 베어내며) 이렇게 하면 하루 종일도 하겠다~

 

채경: 여기 다 베려면 한나절 내내 해야 될 거예요.

 

: (동작 멈춤.. 허리를 세우고는) 여길.. 다 벤다구?

 

채경: (고개 끄덕이며) 여기 10마지기는 우리가 해 주기로 했어요.

 

: ??!!

 

채경: 궁에서 온 사람들이 몇인데요~ 서로 힘 합쳐서 하면 반나절도 안 걸릴 수 있어요.

 

: (채경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저 끝도 안 보이는 벼를 다 베야 한다구?)

 

채경: (신이 망연자실해져서 논을 가늠해 보고 있는 사이, 뒤를 돌아본다. 논두렁 위에는 무장을 갖추고 있는 환익이 서 있었다.)

 

환익: (채경과 눈이 마주치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채경: (손짓 하며) 대장님도 들어와요~

 

환익: ???

 

채경: 들어와서 벼 베는 거 배워요.

 

환익: (당황하여) .. 저는 여기서 두 분을 지키는 게..

 

채경: (어림 없다는 듯이) 들어와요~~ 여기 무슨 적이 있다고 우릴 지켜요?

 

환익: 하오나 마마..

 

채경: 대장님이 벼 베는 걸 배워야 내가 나가죠~

 

환익: ???

 

채경: 저 가고 나면 폐하 곁에 누가 남겠어요? 대장님이라도 옆에서 거들어야죠~ 연세 지긋한 성내관이 할 순 없잖아요.

 

환익, : ???

 

: 무슨 소리야?

 

채경: 저는 곧 나가야 돼요. 

 

: 같이.. 안 할 거야?

 

채경: 지금은 같이 못할 것 같아요. 농가로 다시 돌아가 봐야 되거든요.

 

: 어찌 해서? (남은 죽어라 일하게 해 놓고, 그댄 집에서 쉬겠다구? 같이 벼 베자며? 남편이랑 이러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며? 근데 왜 나만 남겨 두고 가? ? !!)

 

채경: 새참 준비하려구요..

 

: (눈썹 꿈틀) 새참??

 

채경: ..

 

: 소주방 나인들 데리고 왔잖아.

 

채경: 그러니까 가야죠~

 

: ???

 

채경: 제가 없으면 아마도 수랏상을 차려 올 거예요. 근데 그건 새참이 아니잖아요.

 

: 무슨..?

 

채경: 논두렁에서 먹는 새참은 수랏상이랑 달라요. 제대로 된 새참 갖고 올 테니까 기대하고 계세요~ ^^

 

: (기대 안 할 테니까 같이 해~)

 

채경: (첨벙첨벙 물살을 가르며 논두렁 위로 올라선다.)

 

: (멀어지는 채경 보며 좌절감이 든다.)

 

채경: (논두렁에 올라와서는 여전히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는 환익에게) 신발 안 벗어요?

 

환익: (절망 어린 눈빛으로 채경을 본다.)

 

채경: (단호하게) 폐하를 혼자 두실 거예요? (환익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명분을 들먹이며 압박한다.)

 

환익: (눈을 질끈 감으며 허리에 찬 칼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채경: (환익이 무장 해제 하는 걸 지켜보다가 신을 내려다본다.)

 

: (채경 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절망감에 빠져 있다.)

 

채경: (해맑게) 맛있는 거 갖고 올게요~~ ^^

 

: (~~~~~~~~~~ 한숨만 나온다.)

 

 

 

 

 

 

 

 

 

 

 

 

#3. 두 시진 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단 한번도 이런 노동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풍년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올리거나 행차 중에 농촌을 지나친 적은 있었어도,

그때마다 높은 자리에서 또는 먼 곳에서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구경만 했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지 못한 게 아니라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은 그저 논밭과 같이,

하나의 풍경처럼 으레 농촌을 이루는 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헌데.. 구경만 하던 것을 직접 하게 되니,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허리는 똑바로 세 수조차 없었다.

체력이나 기력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안 진다 생각했던 신으로선, 충격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난전에서 보통 사람들처럼 싸움을 했을 때 느꼈던 그 생경하면서도 생생한 느낌과 흡사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땐 놀랄 만큼 짜릿했는던 것에 비해, 지금은 고통스러움에 주저앉고 싶었다.

힘 조절도 안 되고 체력 안배도 할 줄 모르다 보니, 어색한 노동의 결과로 몸에 무리가 온 듯 싶었다.

 

 

 

: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허리를 세우고 일어선다.)

 

환익: (묵묵히 벼를 베고 있다.)

 

: (목이 타는지 입 안이 마르다.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마셨으면 좋겠다. 논두렁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 청유 나온 듯 재잘대고 있는 나인들을 향해 지시를 해야겠다 생각한다. 아무리 급해도 성내관더러 촌락까지 갔다 오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환익: 왜 그러십니까?

 

: (환익 보는)

 

환익: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신을 바라본다.)

 

: .. 안 힘드냐?

 

환익: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 (눈썹 꿈틀) ‘안 힘들다구?’ (일부러 괜찮은 척하려고 답한 거라 생각하고 환익을 유심히 바라본다.)

 

환익: (살짝 웃으며) 어렸을 적엔 이게 생활이었습니다.

 

: 무슨 소리야?

 

환익: 어머니께서 집 마당에 텃밭을 가꾸셔서 농작물을 키우셨어요.

처음엔 조그맣게 시작했던 게, 점점 커져서 나중엔 거의 농사 수준까지 됐지요.

그래서 밭 고르고, 씨 뿌리고, 거름 주고, 수확하는 덴 이골이 났습니다..

(낫으로 벼를 자연스럽게 베더니) 이것도 오랜 만에 하니까 재밌네요~ ^^

 

: (자기처럼 환익이 힘들어할 줄 알았다가 결국 혼자만 그렇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든다. 오늘따라 자신이 모르고 있던 걸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아, 외롭다는 생각도 든다. 농사.. 왕은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헌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거야? 매일매일 세 끼 수라로 산해진미를 챙겨 먹고 있는 내가.. 너무 염치 없어 보이잖아? 이런 기분.. 유쾌하지 않은데.. 느끼고 싶지 않은데.. 땀 흘려 일하는 마당에, 왜 기분은 이 모양이어야 돼?)

 

환익: 폐하.. 괜찮으십니까?

 

: 괜찮아.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 될 것 같다.)

 

환익: 정말 괜찮으십니까?

 

: 괜찮다니까~ (너도 내가 거짓말 하는 것 같아? 괜찮다면 괜찮은 줄 알아!)

 

환익: 대단하시네요..

 

: 뭐가?

 

환익: 이게 쉬워 보여도 처음엔 손에 익질 않아서 힘들거든요.

 

: (환익 보는)

 

환익: 헌데, 처음부터 너무 능숙하게 잘 하셔서 놀랐습니다.

 

: (그렇게 말하면 좀 창피한데..)

 

환익: (신 너머를 보다가 눈이 살짝 커진다.)

 

: ??? 뭘 봐?

 

환익: 중전 마마께서 오십니다.

 

: (고개 획 돌리는)

 

 

 

신이 돌아본 그곳에, 논두렁 저 끝에서부터 소주방 나인들과 동네 아낙들을 대동한 채경이 앞장서 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바리바리 광주리며 물병이며 각종 가재들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새참이 당도할 모양이었다.

 

 

새참 소식은 신뿐만 아니라 논에서 일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귀에 들어간 듯했다.

모두들 열심히 일하고 있던 차-임금이 허리 한번 안 펴고 일하고 있는 터라,

다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었음-, 새참이 당도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반가운 것이었다.

하나 둘 손에 들고 있던 농기구를 내려놓고, 논두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논두렁의 중간쯤에 광주리가 내려지고, 새참 잔치가 벌어질 채비에 들어갔다.

 

신은 제일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잔치판으로 걸어가야 했는데, 걷다 보니 웃음이 났다.

이것 역시 처음이었기에.. 그는 늘 최우선으로 대우받아왔고, 모든 것이 그 위주였다.

그런데 지금 새참이라는 걸 먹기 위해 손수 상이 차려진 곳까지 행차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그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벼를 베던 이들은 새참의 등장에 흥겨워하고 있었고,

새참을 꺼내 보이는 여인들은 환한 웃음을 머금고 주막의 주모들처럼 손님 맞이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궐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 같지 않고, 영락없이 이곳 촌민들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 풍경과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완전히 동화된 그들은.. 어쩐지 행복해 보였다.

 

 

 

: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거의 다다른다.)

 

사람들: (앉아 있다가 일제히 일어나 신을 맞이한다.)

 

채경: ^^ 이리 오세요~

 

: (아낙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채경이, 오늘따라 참.. 듬직해 보인다.)

 

사람들: (신을 위해서 자리를 피해 준다. 아무리 농민 체험을 나와 동화됐다고는 하나, 엄연히 폐하와 중전마마와 함께하는 자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분을 잊지 않고 예를 갖춘다. 또 한편으로는 폐하와 중전마마가 빠져 주셔야 편하게 새참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있었다.)

 

채경: (잔치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그렇다고 해 봐야 논두렁 바닥인 건 마찬가지-에 신을 안내한다.)

 

: (환익과 성내관에게 눈짓 보이며 알아서 먹으라고 신호를 보낸다.)

 

환익, 성내관: (고개 숙여 화답한다.)

 

채경: (바닥에 주저앉은 채 보자기로 덮어 뒀던 광주리를 열어 보인다.)

 

: (채경 곁으로 가서 새참을 내려다보며 마른 침을 삼킨다. 이걸 보고 좋아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서고 있었다.)

 

채경: (신을 올려다보며) 앉으세요.

 

: (채경이 앉으라고 권하는 흙 바닥을 훑어보며 살핀다.)

 

채경: 송구스럽지만.. 의자 같은 건 없습니다..

 

: (채경 보는)

 

채경: (너무 물끄러미 쳐다보는 신의 시선에, 그냥 맨땅에 앉으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광주리를 덮었던 보자기를 임시방편으로 방석 삼아 신을 위해 깔아 준다.)

 

: (채경이 하는 행동을 보며 실소를 금치 못한다. 열악한 환경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이 바보 같다. 이번에도 실소 한번 터진 후에야 받아들이게 된다. 의자 대신 음식을 덮었던 보자기를 방석 삼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채경: (신이 자리에 앉자 안도한다. 거부하시면 어떡하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 (고르지 않은 바닥 때문에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애써 무시하고) 물 좀 줘..

 

채경: 목 마르세요?

 

: ..

 

채경: (물병에서 잔에 물을 따라 내민다.)

 

: (물잔을 받으며) 물 한 모금을 이렇게 갈망했던 적이 없었어..

 

채경: ???

 

: (물잔 속에 찰랑거리는 물을 내려다보며) 땅에 대한 숙연함보다도..

농민에 대한 경배보다도.. 물 한 모금의 절박함을 더 절실히 깨달았어..

 

채경: ……………………………………….. 드셨어요?

 

: (물잔에 시선 고정한 채) .. (솔직히 말한다.)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니까..

 

채경: (신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자괴감에 빠진 폐하의 옆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자기 흥에 겨워 낯설어 하는 폐하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못 말린다, 신채경~ 네가 좋다고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또 까먹은 거니? 넌 대체 누구랑 혼인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운우국의 임금님이셔, 임금님~! 이 세상에서 최고로 존귀한 분을 이렇게 몰아 놓고 어쩜 송구스럽단 생각도 하질 못했니? 왜 너만 생각해? 널 위해 기꺼이 숙여 주신 분에게 고맙다고 생각은 못할 망정 격려는 해 줬어야지!! 으이구, 바보! 바보! 바보!’

 

: (채경이 자기 머리를 마구 때리자 깜짝 놀라 채경의 팔목을 잡는다.)

 

채경: (신에게 팔목을 잡히자 흠칫 한다. 자기도 모르게 예전 버릇이 나온 모양이다. 스스로 못마땅하면 자기 머리를 마구 때리는 버릇.. 놀란 신을 보니, 주먹질이 꽤나 거셌나 보다. 꽉 움켜 쥔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채경을 막아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 오늘 정말 부끄러운 모습 많이 보이네..)

 

: 괜찮아?

 

채경: (어색하게 웃으며) .. 괜찮아요..

 

: (정말 괜찮은 건지 채경의 안색을 다시 살핀다.)

 

채경: (화제를 바꿔야겠단 생각에) 목 마르시다면서요.. 물 안 드세요?

 

: ..

 

채경: (신이 계속 쳐다보자 시선을 돌리며) 물 드시고 나면 이 고구마랑 감자랑 부침개도 드셔 보세요~ 동동주도 시원하게 띄워 왔는데..

 

: (묵묵히 채경에게서 손을 떼고 물을 먼저 마신다. 시원하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 한 잔에 일단은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다.)

 

채경: (신이 팔목을 놓자 안심한다. 그리고 고구마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물잔을 내려놓는다.)

 

채경: (기다렸다는 듯이 잘 익은 고구마를 신에게 내민다.)

 

: …………………………………..이게 새참이야?

 

채경: .. 지금 막 쪄서 얼마나 맛있는데요~ 묵은지 얹어 드시면 금상첨화예요~ 이렇게 안 드셔 보셨죠?

 

:.. 안 먹어 봤어.. 그래서 또 선뜻 손이 안 나가..’

 

채경: 폐하가 드셔야 다른 사람들도 먹을 수 있어요..

 

: ???

 

채경: 다들 폐하만 보고 있어요.

 

: (채경의 말에 뒤돌아본다. 그제서야 자신의 손끝을 주목하고 있는 시선을 보게 된다.)

 

채경: (신에게 고구마를 더 쭈욱 내밀며) 드세요~

 

: ……………………….진짜.. 맛있어?

 

채경: 보장해요!

 

: 뭘 걸고?

 

채경: 아버지 걸구요!

 

:좌상을 걸 정도면 손해는 안 보겠군.. 맛 없으면 보상하라고 하면 될 테니까..’ (그리 생각하고 채경이 내미는 고구마를 받아 든다. 그리고.. 뜨거운 김이 솔솔 나는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무는데..) !! , 뜨뜨뜨뜨..

 

채경: (!!!) 푸하하하! (폭소가 터져 버린다.)

 

: (너무 뜨거워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은데, 부인이라는 사람은 곤욕을 치르는 남편을 보고 동정은 못해줄 망정 배를 잡고 웃는다. 순간 서러움이 북받쳐 동동주로 손이 간다.)

 

채경: (신과는 다른 이유로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난다. 웃느라 눈물까지 났는데, 또 웃고 났더니 체통도 잊고 경박하게 웃었다는 사실에 뒷목이 뻐근해진다. 더군다나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동동주를 들이키고 있는 폐하를 뵈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것 같다. ~ 오늘 정말 왜 이러냐~)

 

: (뚱한 표정으로 동동주와 고구마를 번갈아 가며 벌컥벌컥, 우걱우걱 먹고 있다.)

 

채경: (조심스럽게 신 안색 살피는)

 

: (일부러 채경에게 사선으로 시선을 돌리고 먹는 데만 치중하는 척한다.)

 

채경: (안절부절 못하며 눈치를 본다.)

 

: (채경을 흘끔거리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표정이 시무룩한 걸 보니, 조금은 반성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걸 보니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다. 어찌 보면.. 화가 나는 일이라기보단, 창피한 모습일 수도 있었다. 뜨거운 음식에 혀를 대어 다급하게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왕이라니..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 아닌가? 굳이 왕이 아니라도 이런 행동을 하는 이가 있었다면, 면전에 대고 바보 같다 평했을 것이다. 헌데, 자기가 그 짓을 해 버렸다. 그래 놓고 위엄 있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얼마나 안 어울리는 행동이란 말인가? 오늘따라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 같아 우스워 죽겠다.)

 

 

 

그런데 이때 상념에 빠진 신의 얼굴에 채경의 손길이 닿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기도 전에 채경의 손은 물러났다. 그리고..

돌아본 채경은 언제 떼어냈는지 모를 고구마 부스러기-신의 입가에 묻어 있었을-

천에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으로 가져가더니 날름 먹어 버렸다.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고, 자기 행동이 만족스러운지 미소까지 지었다.

신을 마주 보고 해맑게 웃어 보이는 채경을 보고.. 신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어린 아이가 흘린 음식을 어미가 주워 먹는 것처럼, 스스럼 없는 행동이었다.

남의 얼굴에 묻은 음식인데 더럽다 생각 안 하고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다니..

어마마마에게서조차 받아 본 적 없는 대접이었다. 그 누구도 신을 그리 대우해 주진 않았다.

참으로 정겨웠고.. 거리낄 것 없는 가족 같았고.. 꼭 한 몸…………..같았다.

 

 

마침 이 순간, 땀으로 젖어 있던 신의 머리카락을 날려 주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으로 인해 황금 들녘을 채우고 있던 벼들이 서로 부딪히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벼들의 속삭임과, 시원하게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

모든 것이 평화롭고, 정겹고, 편안했다. 그래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온몸이.. 따뜻해졌다.

 

 

 

: …………………….내가.. 이름 없는 촌부였다면..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었겠지?

 

채경: (신 보는)

 

: .. 땀 흘려 일을 하고.. 그댄 새참을 이고 나를 찾아와 고된 하루를 웃으며 넘길 수 있게 했겠지?

 

채경: ..

 

: 이렇게도 살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데.. (.. 우린.. 왜 그다지도 복잡하게 살고 있는 걸까?)

 

채경: ..

 

: (채경 보며) 내게.. 이런 걸 알게 해 주고 싶었던 건가..?

 

채경: ..

 

: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건가..?

 

채경: (말 없이 신의 손을 잡는다.)  

 

: (채경 보는)

 

채경: 그리 큰 뜻을 품고 온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폐하와 이런 하루를 보내고 싶었을 뿐이에요.

 

: ..

 

채경: 헌데 폐하께서 이 시간이 행복했다면.. 제겐 더 바랄 게 없는 하루가 될 거예요.

억지로 오자고 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폐하께서 좋다고 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 (마냥 좋아하는 줄만 알았더니, 걱정을 하긴 했군..)

 

채경: 오늘 일.. 화내지 않으실 거예요?

 

: (끄덕끄덕)

 

채경: (안심한 듯 미소 짓는다.)

 

: (피식 웃는다.)

 

채경: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좀 더 드실래요?

 

: (고개 끄덕인다.) .. 이렇게 땀 흘려 본 적이 언젠지 기억도 안 나.

그리고 살면서 이렇게 배가 고팠던 적도 처음이야. 때가 돼서 밥을 먹었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배가 고파서 뭘 먹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채경: (쿡쿡 웃으며 동동주를 따른다.)

 

: (일어선다.)

 

채경: ??? (왜 일어서시지?)

 

: (허리를 한번 쭈욱 펴본다. 몸을 안 쓰다가 써서 그런지 허리가 조금 결렸다.)

 

채경: 불편하세요?

 

: 아니.. 조금 뻐근해서.. (그렇게 몇 번 허리를 펴 보고는 앉으려고 하는데..)

 

채경: ???

 

: ??? (채경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는데.. ?? 뭐지?)

 

소아: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 뛰는 데 재미를 붙였을 나이.. 조막만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신과 채경을 향해 뛰어오고 있다. 뛴다고는 하나 어른들의 걸음에도 못 미치는 속도로 느리게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중이다.)

 

: ???

 

채경: (흥미로운 눈길로 여자아이를 쳐다본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볼까지 상기되어 달려오는 모습이 너무 앙증맞다. 그러나 아이의 뒤편에서는 마을 백성들이 손사래를 치며 안달이 나 있었다. 여자아이를 미처 막지 못해서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채경에겐 재미있었다.)

 

: (처음엔 의아했다가 이내 담담해진 표정으로 다가오는 여자아이를 바라본다.)

 

소아: (두 사람에게 다다르자 가뿐 숨을 몰아 쉬며 헉헉댄다.)

 

채경: (무릎걸음으로 여자아이에게 다가가는데..)

 

소아: (손에 들고 있던 개떡을 쭉 내밀며) 줄게요..

 

, 채경: ??!!!!!

 

사람들: !!!!!!!!!!

 

소아: (정확하게 신을 향해, 자기보다 다섯 배는 큰 키의 신을 목이 꺾어져라 올려다보며) 먹으세요. (앙증맞은 목소리로 말한다.)

 

채경: (숨을 삼키고 신을 올려다본다. 지금.. 폐하의 심중이 어떨지.. 짐작이 잘 안 된다. 이런 행동.. 분명 무엄한 것이었다. 감히 폐하께 검증되지도 않은, 어찌 보면 하찮기까지 한 음식을 올리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허나,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모든 것이 궁에 있을 때와, 이전까지 폐하가 경험했던 환경과는 달랐다. 하여, 당장에 경을 쳐야 할 행동이 용인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은 기대감을 갖고 신을 보게 되는데..)

 

: (물끄러미 여자아이 내려다보는)

 

사람들: (숨죽여 신을 쳐다보는)

 

소아: (수줍은 듯, 그러나 미소 지은 채 신 올려다보는)

 

채경: (두 손을 움켜 쥐는)

 

사람들: !!!!!!!!!!!!!!!!!!!!!

 

채경: !!!!!!!!!!!!!!!

 

소아: ^^

 

: (무릎을 세워 앉아 아이가 내민 개떡을 받아 주고 있다.)

 

채경: (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손수 무릎까지 꿇어 받아 주실 줄은 몰랐다. 나마저 이리 놀라 기절할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천하의 폐하께서, 그 차갑고 잔인하다는 임금님께서 한낱 촌민의 아이에게 무릎 꿇어 주실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 (채경의 짐작대로 놀라서 얼음이 되어 버렸다.)

 

: (정작 당사자로서 담담하기만 하다.)

 

소아: (키가 큰 신이 눈높이를 맞춰 주자 기분이 좋아져, 그리고 자신이 내민 선물을 받아 줘서 기쁜 마음에 돋음발을 해 신의 볼에 입을 맞춘다.)

 

: !! (아이 보는.. 이번엔 조금 놀라서 눈이 커지는..)

 

채경, 사람들: !!!!!!!!!!

 

소아: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자 미련없이 신에게서 떠나간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간다. 놀라서 굳어 버린 자신의 어미에게로..)

 

: (아이가 달려가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숨을 내쉰다. 자기도 모르게 숨까지 멈추고 있었나 보다. 이런 자신의 반응이 웃겨서 헛웃음이 흘러 나온다.)

 

 

 

정말 귀한 음식 받으셨네요..”

 

 

 

: (채경 돌아보는) ???

 

채경: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다. 방금 전 일어난 충격적인 장면이, 어느새 흐뭇한 장면이었다고 판단을 마친 상태였다.)

 

: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채경을 본다.)

 

채경: 저 또래 아이들에게 양보나 배려 같은 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 ..

 

채경: 오로지 자기 것, 내 것밖에 없죠. 먹고 살기 힘든 촌부의 아이에게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은 더 대단할 거구요..

 

신: ..

 

채경: 헌데.. 그 대단한 걸 폐하께 드렸네요. 보기엔 그저 못난 개떡이지만 이건 보통 음식이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귀할 수도 있어요. 

 

: ..

 

채경: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그 아이와 눈을 마주쳐 주신 것도 감동이었는데요..

저런 꼬맹이가 자기 먹을 걸 아껴서 다른 이에게 양보한 것도 못지 않은 감동이에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폐하께서 무릎을 꿇으신 것에만 감동 받겠죠..

저 아이가 자기들인양.. 폐하께서 자기들 앞에서 무릎 꿇었다 여기겠지요..

높고 높으신 폐하께서 낮고 낮은 자신들을 존중해 준단 사실에 감격하겠죠..)

 

: 남기면 안 되겠군..

 

채경: ^^ 맞아요. 절대 남기시면 안 돼요~

 

: (왠지 신나 보이는 채경이 이해가 안 되지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린다. 땅을 밟고 있는데도, 그동안 발 딛고 살던 땅이 아닌 듯 어지럽다. 그래도.. 이런 세상을.. 이런 순간을 경험하게 해 준 채경이 고맙다. 확실히.. 고마운 것 같다, 오늘의 시간들을 선물해 준 채경이..)

 

채경: 근데 왜 폐하만 주고 난 안 주죠?

 

: (개떡 베어 물다가 눈썹 꿈틀대는)

 

채경: (일부러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잘생긴 남자한테만 먹을 거 주고.. 벌써부터 인물 밝히네, 저 꼬맹이~

 

: 투기하는 거야?

 

채경: ! (당당하게 말한다.)

 

: (어이 없다.) 투기는 칠거지악 중에서도 최고 악행이야. 중전이 그래도 돼?

 

채경: 뭐 어때요? 오늘은 논두렁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중전인걸요..

 

: (할 말 없다. 그래서 다시 개떡을 먹는다. 이것.. 먹을 만한 것 같다. 볼품은 없지만, 먹을수록 고소한 게 괜찮았다.)

 

 

 

맛있는 새참에.. 시원한 바람에.. 예상치 못한 환대에..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신은 행복하다. 행복.. 하다.

 

 

 

 

 

 

#4. 정토산 움막

 

 

 

그래.. 한바탕 잘 놀다 갔구나..”

 

“..”

 

평소답지 않게 백성들에게 인심도 크게 쓰고.. 무섭기만 했던 왕이 인정 있다고 소문 나겠는걸?”

 

“……………….그래선.. 안 되지 않습니까?”

 

안 되지 그럼~ 안 되고 말고..”

 

어찌.. 할까요?”

 

아름다운 기억 따위 심어 주지 말아야지..”

 

“???”

무서운 왕은 무서운 대로 있어 줘야지..”

 

“..”

 

잔인한 왕은 잔인한 대로 기억되어야지..”

 

“..”

 

배려 따위.. 온정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

 

왕의 이색 행보가 되려 우리를 도와줄 것 같구나..”

 

“..”

 

아름다웠던 만큼.. 따뜻했던 만큼.. 더 처절하게 짓밟힐 테니..”

 

“..”

 

그런 건 환상이라고.. 왕은 백성과의 소통 따윈 관심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

 

귀를 갖다 대거라..”

 

 

 

 

 

 

#5. 온천장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김이 노천 온천을 겹겹이 감싸고 있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태고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

왕가 대대로 왕족의 휴식처로 사랑받아 온 온천장에 오랜 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복잡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곳을 애용하던 왕과,

오늘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참내기 왕비님이 그 주인공이었다.

 

신은 궁으로 돌아가던 마차에 타고 있던 채경을 몰래 빼내와, 훌쩍 이곳으로 날아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따지는 채경에게 환익이 다 알아서 할 거라며 딴 소리를 하는 신.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감행한 것도 맘에 안 드는 마당에,

묻는 말에 제대로 답변해 주지 않는 신의 태도에 더 기분 나빠진 채경.

그래서 엄청나게 쏘아 주려는데, 이곳이 그 말로만 듣던 온천장이라는 걸 듣고는

호기심이 발동해 화를 내려던 걸 금세 잊어 버리고 온천장 구경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노천 온천에 입성하게 됐는데..

 

 

 

: (거리낌 없이 몸에 두르고 있던 옷을 벗고 온천 안으로 들어간다.)

 

채경: (침을 꿀꺽 삼킨다. 조금은 익숙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폐하의 알몸을 보는 건 긴장되는 일이었다.)

 

: (하루 종일 뭉쳤던 근육이 뜨거운 온천에 들어서는 순간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몸을 푹 담그고 늘어진다.)

 

채경: (자욱한 김 사이로 사라져 버린 신을 눈으로 뒤쫓다가, 사라져 버리자 안절부절 못한다. 이제는 자기 차례인데.. 꼭 옷을 다 벗고 들어가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 (눈을 감고 뜨거운 온천에 몸을 맡긴다.)

 

채경: (우물쭈물 하며 온천 가까이로 다가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 (채경이 왜 안 들어오나 싶어 채경 쪽을 쳐다본다.) 부인~~

 

채경: ??!! (갑자기 부르자 화들짝 놀란다.)

 

: 안 들어와?

 

채경: .. 들어가요..

 

: (채경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채경: (결국.. 저고리까지만 벗고 속곳 차림으로 들어간다.)

 

: (채경을 보고 피식 웃는다. 웬 부끄럼이야?)

 

채경: (그 와중에도 가슴을 손으로 가리며 신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는다.)

 

: (오늘 농가에서 그리 당당하던 여자는 어디 갔는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채경이 재미있다.)

 

채경: (민망해서 신은 못 쳐다보고 정면을 본다. 신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굳은 채 앉아 있는데, 슬슬 따뜻한 온천 기운에 맥이 풀리기 시작하는데..)

 

: (긴장한 채경을 보니 조금 놀려 주고 싶었다. 오늘 굉장히 뜻깊은 시간을 보낸 건 맞지만, 마음 고생도 했기에 그 일의 장본인인 채경을 골탕먹이고 싶었다. 다행히도 이곳은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처음 이곳에 온 채경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점을 십분 활용해 채경에게 복수(?)해 주고자 한다.)

 

채경: (두 손을 맞잡고 침을 꿀꺽 삼킨다.)

 

: (씨익 웃으며 조금 몸을 움직여 채경에게 다가간다.)

 

채경: (신이 다가오는 걸 느끼지만 애써 모른 척한다. 이 자욱한 김이 붉어진 뺨을 가려 주길 기대하며..)

 

: (웃음이 쿡 비어져 나오는 걸 참고, 좀 더 다가간다.)

 

채경: (침을 꿀꺽 삼킨다. 이제.. 팔을 뻗으면 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 (더는 다가가지 않고 채경을 응시한다.)

 

채경: ..

 

: (장난스레 물을 한번 튀겨 본다.)

 

채경: (살짝 놀란다. 얼굴에 물방울이 튀자 흘끔 신을 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리는데..)

 

: (웃음이 새어 나온다. 긴장 풀자고 온천에 왔더니, 저리 몸이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해 버리다니.. 몰래 데리고 나온 보람이 없다.)

 

채경: (남몰래 숨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다.)

 

: (턱을 괴고 채경을 응시한다.)

 

채경: (시선이 불안정하게 허공을 떠돌아 다닌다. 신의 시선이 온천보다 더 뜨겁게 느껴진다.)

 

: ..

 

채경: ..

 

: ..

 

채경: ..

 

: ………………………………….신채경..

 

채경: (멈칫.. 호흡도 멈칫.. 생각도 멈칫.. 눈동자도 멈칫.. 온몸도 멈칫..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 건가 싶어 당황스럽다. 그래서 천천히.. 심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을 바라본다. 여전히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고 있는 신이 눈에 박혀 들어온다.) ‘방금 전에.. 내 이름을.. 불러 주신 게 맞습니까?’

 

: 이름 불러 줘야 쳐다보는 거야? 그럼 자주 불러야겠네..

 

채경: (숨 삼키는)

 

: …………………………………신채경..

 

채경: !!!!!!!

 

 

 

그저.. 이름이 불리어진 것뿐인데.. 눈물이 날 만큼 설레었다.

 

 

 

채경: (눈물이 맺히는)

 

: (빙그레 미소 짓는)

 

 

 

 


출처 : 시나리오 창작방
글쓴이 : 쏭기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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