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기자..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내리비추고, 파란 바다가 넘실대는 괌에 다녀왔습니다. 이곳과는 천지 차이인 그곳에 가서, 몸은 피곤하지만 기분 전환은 확실히 하고 왔어요. 지난 주, 마감하면서 너무너무 추워서 울고 싶기까지 했는데, 그곳은 완전 덥더군요.. --;; 한여름으로 다시 돌아간 날씨 속에서, 이국의 정취를 나름 잘 느끼고 잘 놀다가 왔습니다. 돌아오니.. 남은 건 수많은 카드 영수증과, 피로.. 밀린 일거리들이네요. ^^;; 어찌됐든 올해가 가기 전에 외국에 한번 다녀왔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여행의 미몽에서 깨어나려구요.. 그리고.. 얼른 이 갈 길 바쁜 아이들의 살 길을 찾아 주려구요.. 더 바빠지기 전에 마무리를 해 줘야 하는데.. 지난 편에서 채경이 부모님이 동시에 위험에 처했습니다. 예고편 썰에서도 얘기했고, 예고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은형의 일은 우연이 빚어낸 결과였어요. 어쩌다 들어맞은 거지요. 소설 속 상황처럼 제 머릿속에서도 은형은 우연히 등장했답니다. 단순히 혜민사가 불이 난 게 아니라, 은형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렇게 되면 후에 펼쳐질 전개와 연결시키기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때때로 이런 우연한 생각들이 소설을 풀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곤 하는데요, 이번에도 그 덕을 보게 될 것 같아요. 뭐, 여러분은 깜짝 놀라셨겠지만요.. ^^;; 우리 임금님께서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하실지.. 그리고 대체 그 놈은 누구일지.. 제 예상으로는 다음 편에서 그 놈의 정체는 드러나게 될 것 같은데요.. 언제쯤 다음 편을 갖고 오게 될지는 장담하기가 어렵네요. 이번 주부터 약속이 많아서.. --;; 올해가 가기 전에 다음 편을 갖고 오면 좋겠는데, 가능할 수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창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라, 저도 연속해서 보여 드리고 싶은데.. 계속 이런 변명으로만 썰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그만큼.. 마음이 절박해요. 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실제로 엔딩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저는 대책이 없네요.. 보통 엔딩을 향해 중간 과정을 엮었는데.. 이번에는 중간 과정들은 줄줄이 이어지는데, 엔딩만큼은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저..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신이가 멋지게 복수해 주자는 생각만 하고 있어요. 음.. 또 썰을 쓰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졌네요. 오늘은 정말 짧게 쓰려고 했는데.. --;; 내일 모레면 크리스마스입니다. 모두가 축복 받아야 하는 아름다운 날이에요. 텔궁의 대감들 모두 행복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래요. 저는 시집 가기 전 마지막 아버지 생신이라, 가족들과 재미나게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애인도 버리고 식구들한테 간다고 주변에선 뭐라 하지만.. 그래도 뭐.. ^^;; 모두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되시구요.. 저는 다음 글로 또 인사 드릴게요. (__) **갠소 파일과 관련해서 공지 하나 해 드립니다. 궁 게시판에 가셔서 글쓴이 ‘라니냐’로 검색하시면, 쏭기자의 모든 소설 갠소 파일이 올려져 있을 거예요. 그동안 쏭기자 소설 갠소 파일 원하셨던 분들은 거기 가셔서 다운 받으시면 됩니다. 제게 메일로 부탁하셨던 분들도 그곳으로 가시면 원하는 파일 가져 가실 수 있으세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도 번거롭다 생각 안 하시고 기꺼운 마음으로 파일 업데이트 계속 하고 계시는 라니냐 대감님께 정말 고맙단 인사 드리구요.. 몇몇 분들에게는 약소하나마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길 바랍니다. ^^ ########################################################################################### 제51화 누가 더 빠를까? #1. 금산 우현: 괜찮은가? 종혁: (대답 대신 피를 토한다.) 우현: (안쓰러운 얼굴로 종혁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종혁: (자상을 입은 상태라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하지만 굳은 의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려 한다.) 우현: (종혁의 안간힘을 보며 한숨을 삼킨다.) 지혈은 했지만, 치료를 못했네.. (막막하다.) 종혁: (쿨럭) 송구합니다. 우현: (도리도리) 자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나? 함정에 빠진 건.. 자네 잘못이 아닌데.. 종혁: 하오나.. 우현: (소매를 찢는다. 그리고 종혁의 상처를 다시 한번 더 지혈해 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종혁: (우현이 상처를 만지자 호흡을 격하게 삼키며 고통을 참아낸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치밀한 함정이었다. 해금강의 다리가 끊어진 것부터, 금산으로의 경로 이동, 산속에서의 지체.. 그 모든 것이 그들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고, 사신단은 그들 손에 놀아났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호랑이굴로 겁도 없이 걸어 들어온 토끼 꼴이 되었다. 해가 질 무렵, 야영지를 물색하기 위해 걸음이 늦춰지기 시작했을 때, 기습은 시작되었다. 매복해 있던 무장병들이 대규모 화살을 쏘아대자 순식간에 대열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혼비백산한 대신들은 도망가다 자객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앞뒤에 배치되어 있던 호위병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우왕좌왕 하다가 공격 한번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사신단이었기 때문에 사신들이 주를 이루고 무관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둑어둑한 시각이었고, 낯선 산속이라 유리한 점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제대로 싸움 한번 못 해 보고 적들에게 승기를 내 주고 말았다. 공격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남은 자들을 어딘가로 끌고 갔다. 끌려 가면서도 이 사태가 믿기지 않은 우현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살려 달라고 하는 아우성 치는 목소리를.. 그리고 살려 달라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확인 사살하는 복면의 사나이들을.. 돌아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다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산채에 끌려 오게 되었다. 삐죽삐죽 솟은 나무로 성벽을 만들고, 횃불로 어둠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산적들의 비밀 기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살아남은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언뜻 세어 봐도 스물을 넘기기 어려웠다. 복면의 사내들은 우현을 비롯한 살아남은 사신들을 산채의 마당에 도열시켰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주변을 살폈다. 얼마 후.. 그 자가 왔다. 보는 순간 우현의 눈을 의심케 하던 그 자가.. 왔다. 그는 우현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의 목적이 우현임을 숨기지도 않았다. 남자: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두 죽어도 상관 없어. 우현: ………………………….날 이용해 폐하를 잡을 생각이냐? 남자: 못할 거 없지. 우현: (피식 웃는다.) 남자: ??? 우현: 그런 생각으로 날 잡은 거라면, 자넨 폐하를 잘 모르나 보군. 남자: 무슨 소리지? 우현: 폐하는.. 절대 나를 위해 움직이지 않으실 거네. 남자: 과연 그럴까? (믿지 않는다.) 우현: 내 목을 걸고 얘기하지. 절대.. 움직이지 않으실 거네. 남자: ………………………….그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내가 널 풀어 주진 않아. 우현: 내가 살고 싶어 이런다고 생각하나? 이렇게 된 이상, 난 살 생각 따윈 이미 접었네. 남자: ……………………………..왜.. 그러지? 충정을 보여 주기 위해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우현: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네. 운우국의 백성으로서, 더러운 계획에 내가 이용되는 게 싫은 것 뿐이니까.. 남자: (입술 깨무는) 우현: 자네 계획이 뭔지 폐하가 간파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남자: 간파한다 해도 널 버리진 않을 거야. 우현: 아니! 폐하는 너무도 쉽게 날 버리실 거네. 두 번 생각하지도 않으실 거야. 자네가 그걸 깨닫게 될 땐.. 이미 너무 늦었겠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물릴 수도 없겠군.. (남자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했다는 듯한 눈빛이다..) 남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내 화를 돋우려고 헛소리 하나 본데.. 우현: 난 진실을 알려 주는 것뿐이네. 남자: (우현 보는) 우현: 폐하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냉철한 분이시지. (무엇이 운우국을 위한 일인지를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분이란 말이다! 너 따위 그 분의 생각을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할 게야. 그래서 안심이 돼. 넌 폐하의 적수가 못 될 것 같으니..!!) 남자: …………………………………..그럼.. 네가 키운 왕에게 버림 받는 기분은 어때? 우현: .. 남자: 그때도.. 그렇게 의연한 얼굴을 할 텐가..? 우현: 되려 자네가 내 화를 돋우려 하는군. 그래서 자네가 얻는 게 뭐지? 남자: (없다. 아무것도.. 우현의 화를 돋워서 뭘 얻자는 건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조차 의연한 얼굴로 그 자식 편을 들어 주고, 나 따위 그 자식에게 못 미친다 말할 수 있는 당신이 밉다. 당신은.. 그래, 당신은 우현: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남자의 뒤로 복면의 사내 한 명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남자: (눈썹이 휘어진다. 그리고 의외라는 듯이) 이신이.. 혜민사에 나타나? 우현: (남자 보는) 남자: 확실해? 사량: (고개를 끄덕인다.) 예.. 남자: (이건 예상 외의 전개였다. 혜민사에 불을 지른 건 혜민사가 갖는 위상 때문이었다. 궁 다음으로 성지(聖地)로 여겨지는 혜민사마저 공격을 받는다면, 백성들에게 파급될 충격이 클 거란 예상에 감행한 일이었다.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적격지였다. 결코.. 왕이 움직일 거라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엉뚱한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우현: (혜민사에 불이 난 것을 모르는 터라, 폐하가 헤민사에 나타난 것이 왜 저리 놀랄 일인지 감이 안 잡힌다. 하지만 큰일이 난 것 같은 느낌은 든다.) 남자: (사량에게) 저들을 가두고 다음 지시를 기다려. 사량: 직접 가시겠습니까? 남자: 간만에 직접 봐야겠어. 사량: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남자: 글쎄.. 불 끈다고 정신 없겠지. 우현: ??? 사량: (걱정스럽지만 말리지는 않는다.) 남자: (우현 보며) 우리 회포는 다음에 제대로 풀지.. 우현: .. 남자: (사량에게) 잘 감시하라고 해. 사량: 예.. 남자: (주변을 한번 휘둘러 보다가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그렇게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 우현과 일행들은 감옥에 갇혔다. 걱정 어린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보며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죽어도 괜찮을지 모르나, 저들마저 죽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저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생각해 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우현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거의 백지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생각하는 게 부질 없었다. 우현: (종혁에게) 우리가 있는 곳이 금산은 맞는가? 종혁: 예.. 금산이 틀림 없습니다. 우현: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고을이 해동시라고 했지? 종혁: 예.. 중부 지방 최대 고을입니다. 우현: 그럼.. 이곳 산채는 어떻게 마련된 거지? 해동시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런 대규모 산채가 마련될 수 없지 않은가? 종혁: 이곳은 원래부터 병부에 귀속된 산채입니다. 우현: !! 그걸.. 어찌 아는가? 종혁: 산채의 구조와 지형이 그렇습니다. 절대 민간인들이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우현: (믿기 힘들지만..) 그렇다면.. 병부의 배신이란 말인가? 종혁: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병부와 관련되어 있다면, 중앙에서 사람이 온다 해도 따돌려지기 십상일 겁니다. 우현: (역적 무리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도성과 이리 가까운 곳에서 병부의 반란이 있다니..) 종혁: 그러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사신단을 비호하던 그림자 아이가 둘 있었습니다. 우현: (종혁 보는.. 그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림자 애들이 사신단에 붙었었다고?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셨군..) 종혁: 하나는 좀 전 전투 중에 크게 부상을 입었으나, 다른 하나는 사상자 중엔 보이질 않습니다. 우현: (그런 건 또 언제 챙겨 본 건지.. 무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도성에 소식을 전할 수 있겠군.. 종혁: 이 부근이 놈들에게 장악되어 있다면, 산을 빠져 나가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가져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우현: (흠..) 그 시각.. 산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굴.. 팔에 부상을 입은 그림자 하나가 수색대를 피해 은신 중이다. 세유: (하..) ‘피 냄새는 곧 들킬 텐데.. 저 사냥개들을 죽일 수도 없고.. 어떻게 빠져 나가지?’ #2. 혜민사 유서 깊은 고(古) 사찰에 붙은 불은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았다. 시커먼 어둠 속에 유독 붉게 타오르는 화염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포효하는 듯한 불길은 이 절이 지나온 시간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다. 마치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앞에 두고, 명상과 무념무상을 수행해 온 스님들조차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 바라보며, 미칠 듯이 타오르는 화염에 압도당했다. 한편으로는 불길을 잡아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공력이 출중한 스님들 중에는 바람을 쏘아 불길을 잡아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혜민사는 대규모 사찰이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불길을 잡아 절을 구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게 더 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화염 속에서 우왕좌왕 하는 신도들을 이끌어 대피하는 스님들이 더 많았다. 그 때문에 불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어 커졌고,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절은.. 6년 전 그날처럼 다시금 한 줌의 재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렇게 망연자실, 눈앞에서 보배 같은 절이 화염에 스러지는 걸 바라만 보고 있을 무렵.. 거대한 광풍이 하늘에서부터 휘몰아치더니, 혜민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아지는 일이 발생했다. 무서운 불길에 이어 거센 광풍이 몰아치자, 사람들의 머릿속으로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사람들의 불길한 예감과 달리, 광풍이 휘몰아치는 발원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임금이었다. 처음부터 알아본 이도 있었고,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 했다가 나중에 알게 된 이도 있었다. 어찌됐든 임금의 등장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기 빛처럼, 햇살처럼 반갑고 또 반가운 등장이었다. 신: (속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날아온 탓에, 혜민사에 도착하는 순간 본의 아니게 거센 바람을 동원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하는 듯했으나, 금세 중심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그 고즈넉하고 아름답던 혜민사가.. 화마(火魔)가 되어 하늘을 덮치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이제는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 그 대단한 기세를 뻗치고 있었다. 불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방화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불은 악몽이었다. 6년 전 그 밤.. 불화살 하나로 시작된 화염은, 그의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 갔다.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모든 악(惡)과 화를 한꺼번에 표출시킨 건, 다름 아닌 불이었다. 궁을, 승하한 아바마마를, 살아 숨쉬던 어마마마를, 그에게서 앗아가려 치솟던 불.. 활활 타오르는 불을 마주하고, 어렸던 그가, 이제 막 왕이 된 이신이 할 수 있었던 건, 그 불에 그의 소중한 것을, 그가 지켜야 할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맞서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분연히 일어섰고, 그가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끌어올려 불에 맞섰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는 불을 진압하고, 그 불을 점화시킨 이들을 끝장 내 버렸다. 그날.. 그의 광기(狂氣)는 궁극에 달했고, 내재돼 있다가 폭발해 버린 힘은 다시 잠들지 않았다. 그렇게 폭풍 같은 밤을 보낸 것이 어언 6년 전이었다. 이젠.. 잊을 만도 한데.. 다시금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니, 잊혀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밤.. 이 혜민사에도 불길이 치솟았다고 했다. 그때.. 채경이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무섭게 치솟은 불길 속에서, 그녀는 소중한 이를 잃었다고 했다. 만약 이번에도 소중한 이를 잃는다면.. 그녀에게 혜민사는 슬픈 이름이 될 것이다. 그녀를 살려 주었고, 그녀를 키워 주었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잊을 수 없는 슬픈 기억으로 남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놔 둘 수 없었다.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되었다. 그녀가 아파선 안 된다. 신: (당장 내려가서 부부인을 찾아볼까 하다가, 일단 불길을 잡는 게 나을 것 같다 판단한다. 그래서 혜민사의 중심으로 날아간다.) 사람들: (신을 올려다본다. 임금님이 분명했다. 분명.. 이 사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간절한 바램을 담아 신을 바라본다.) 신: (두 팔을 하늘 향해 크게 벌린다. 눈을 감고 기(氣)를 끌어 모은다.) 사람들: (숨죽이고 신을 바라본다.) 신: (머릿속으로 구름과 비를 생각한다. 구름과 비의 규모를 생각한다. 그리고 간절한 바램을 담은 주문을 외운다. 남들은 신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운우술(雲雨術)이라는 건, 사실 별다를 게 없었다.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라면 어느 순간 소망하던 구름과 비가 눈앞에 나타나곤 했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술수를 부리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았다. 그저 스스로 체득했고, 스스로 통제했다. 어떤 왕들은 늘 성공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그저 약간의 운우술 능력을 지니고 평생을 왕위에 있던 왕들도 있었다 했다. 그래서 자신이 역대 최강이라는 얘길 듣게 됐는지도 모른다. 운우국을 연 태성왕 이후, 운우(雲雨)를 자신만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술수를 부릴 수 있는지.. 왜 하필 자신만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왕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진부한 핑계를 대며 넘어갔다. 지금은 그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고민은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당장은 저 귀하고 중한 절을 구해야 했다. 물론 그 절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사람들도..) 휘영청 밝은 달이, 반짝반짝 빛나는 무수한 별들이, 점점 밤하늘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화염 때문에 더더욱 메마르고 뜨겁기만 하던 공기가 점점 습하고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이 훅 부는가 싶었으나, 이내 머리에 떨어지는 차가운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들: (한두 방울 떨어지는 것이 진정 빗방울인지 확인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어 본다.) 쏴~~~~~~~~~~ 순식간에 뚝뚝 떨어지던 빗방울은, 빗줄기로 변해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비가 맞는지 의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비가.. 저 무시무시한 화마를 잠재울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신: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긴 숨을 내쉬어 본다. 그리고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의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화염을 내려다본다. 물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불길의 노력이 눈물겨워 보인다. 어쨌든.. 급한 불은 끈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사람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얼굴엔 함박웃음이다. 춥다면 추울 수도 있는 가을밤,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면서도 기분만은 좋았다. 스님도 중생도 남녀노소까지 구분 없이 모두들 비를 맞으며 행복해 했다. 빗줄기에 피시식 흰 연기를 내뿜으며 사그라드는 불길을 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신: (불길은 비가 잡아 줄 것 같으니, 이제부터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러 가야겠다. 장모님을 찾아야 했다. 지금 궁에서 노심초사하고 있을 채경에게 비보(悲報)를 전하지 않길 바라며.. 비를 맞으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가 찾는 사람이 있길 기대한다. 아니, 간절히 기도한다. 살면서 몇 번 해 보지 않은 기도를, 지금 이 순간 간절히 해 본다.) 신, 공중에서 땅으로 수직 하강 했다. 땅에 가까워지자 그의 뒤를 따라온 그림자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간 이동을 하는 그를 쫓아 열심히 날아온 그의 그림자들의 노력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이 붙지 않아 무너지지 않은 건물의 지붕 위에서 월희와 조우한 신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는다. 신: 주지 스님과 부부인을 찾아! 월희: 예! 신: (간결하게 명(命)하고, 다시 날아 올랐다. 사람들의 키만한 높이로 날아 다니면서 부부인과 주지 스님을 찾는다.) 사람들: (신이 머리 위 가까이에서 날아 다니자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올린다.) 신: (사람들의 감사 인사는 눈에 안 들어온다. 그저 빨리 두 사람을 찾고 싶을 뿐이다.) 재빠르게 사람들을 훑어 보는데, 유독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왠지 느낌이 온 신은 그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정말 바람처럼 날아갔다. 모여 있는 사람들 머리 위를 지나 중심에 도착해서 내려다보니 누군가 무너진 대들보 아래에 깔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불 붙은 대들보를 건드리지 못하다가, 비 때문에 불이 꺼지자 남자들 몇이 붙은 모양이었다. 기대했던 수확이 아니라는 판단이 즉시 들었지만, 그냥 보고 넘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 손을 뻗고 만다. 이내 무너져서 꼼짝도 안 하던 건물이 뒤로 밀리며 날아가 버렸다. 이에 놀란 얼굴이 된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다가, 어느 순간 일제히 머리 위의 신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임금님 솜씨인 것 같았다. 신: (담담하게 대들보가 있던 곳만 쳐다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눈에 들어와 눈이 커진다.) !! 은형: (대들보를 밀어내다가 갑자기 손으로 밀고 있던 대들보가 사라져서 어리둥절하다.) 신: (땅으로 착지해서 척척척 빠른 걸음으로 은형에게 다가간다.) 은형: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 때문에 신을 당장은 알아보지 못한다.) 신: (조금은 당혹스럽고, 조금은 안심이 되는 마음으로) 괜찮으십니까? 은형: (신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놀란다. 하늘 위에 계셔야 할 폐하께서 어찌 자기 눈앞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신: 괜찮으십니까? (다시 한번 묻는다. 안도감에.. 온몸에 있던 긴장이 다 풀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은형에게 안부를 묻는다.) 은형: 폐하.. 어찌.. 신: (은형을 위아래로 훑어 보며) 사내들도 있는데, 어찌 이런 일에 힘을 쓰고 계십니까? 회정: 부부인께선 원래 이런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분이라 그렇습니다. 신: (돌아보는..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돌아보는.. 회정 대사가 눈앞에 있자 다시금 안도감 드는..) 회정: (빙긋 웃는 얼굴로) 참으로 적절한 시간에 오셨습니다.. ^^ 신: (대사의 반가워하는 얼굴을 보니, 조금 죄책감이 든다. 원래는 혜민사까지 날아와서 직접 불을 진압할 생각은 아니었다. 부부인께서 여기 계시다는 얘길 듣지 않았다면, 아랫것들을 시켜서 원조해 주라는 말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사가 고맙고 반가워해서 민망하다.) 회정: (신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주변의 스님들에게) 일단 부상자들을 돌보게나.. 스님들: (고개를 끄덕이며 대들보 아래에 깔려 있던 사람을 수습해 어딘가로 부지런히 이동한다.) 사람들: (부상자도 구했겠다, 불은 진화되고 있겠다, 임금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릴 여유가 있을 것 같다.) 폐하.. 감사합니다!! 신: (사람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몸을 살짝 튼다. 그 전까지 무심히 보고 있던 사람들을 그제서야 바라본다.) 사람들: (폐하를 직접 뵈는 것도 영광스러운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더군다나 폐하 덕분에 이 귀한 곳이 보전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다. 성은이 망극하다. 그래서 폐하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린다.) 신: (당혹스럽다. 그에게 최고 예우를 갖춰 인사를 올리는 이는 얼마든지 있었다. 궁 밖으로 나갔을 때 만나게 되는 모든 백성들은 그를 향해 무릎부터 꿇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빗물이 웅덩이를 만들어 질퍽거리는 땅에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비를 맞고, 그 질척거리는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런 인사는.. 별로 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 일어서지도 않는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난감하다.) 회정: 민망하십니까? 신: (돌아보는) 회정: (얼굴에 웃음 머금고) 인사치레를 다 마다하시고.. 왜 그리 쑥스러워 하십니까? 신: 불이 꺼지고 있다곤 하나,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말 한다.) 회정: ………………………그게 걱정이십니까? 신: 나한테 인사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사는 게 더 급한 것 같아서요.. 회정: (신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겠습니다. 신: 저는 불이 꺼지는 대로 비를 멈추겠습니다. 이러다간.. 혜민사가 빗물에 쓸려 갈 것 같네요. 회정: (신의 농담에 빙긋 웃으며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신: (사람들은 회정에게 맡기고 은형에게 돌아선다.) 은형: (얼굴을 때리는 빗물을 훔쳐 내며 신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신: 혼자이십니까? 은형: 아니오. (슬쩍 뒤돌아보며) 폐하 앞이라 쑥스러워 숨었습니다. 신: (은형 뒤를 흘깃 본다. 그러자 빗줄기 사이로, 채경의 집에 갔을 때 보았던 향이라는 여종이 눈에 들어온다.) 향이: (쭈볏거리며 신에게 꾸벅 인사 올린다.) 신: (은형과 향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린다.) 은형, 향이: !!!!!!!!! (갑자기 비가 몸에 안 닿았다. 무언가가 몸 주변을 감싸고 비를 막아 주는 것 같았다.) 신: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은형과 향이에 이어 회정 대사가 일으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거대한 투명막을 만들어 비를 피하게 해 주었다.) 사람들: !!!!!!!!!! 회정: (살짝 눈썹을 치켜 뜬다.) 신: (회정 바라보며 사람들을 부탁한다는 눈짓을 보낸다.) 회정: (신의 남다른 배려에 흐뭇한 미소를 속으로 삼키고, 염려 말라는 눈짓을 보낸다.) 신: (사람들에게 할 건 다 해 준 것 같아 은형을 다시 본다.) 은형, 향이: (여전히 놀란 듯 자신들의 방패가 되어 주는 투명막을 보며 신기해한다.) 신: (은형에게 한 발 더 다가간다.) 은형: (신의 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신에게로 돌린다. 그러면서 머리 한 구석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자기가 정말 미쳤나 보다. 하늘 같고 태산 같은 폐하를 앞에 두고, 이 무슨 무례한 짓인지 모르겠다. 며칠 한 집에서 지냈다고, 그때의 폐하가 소문처럼 무섭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이렇게 편하게 대할 분은 아닌데.. 난생 처음 보는 투명막에 시선을 빼앗겨 폐하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신경도 안 썼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자마자 다시금 긴장한 얼굴로 신을 마주 본다.) 신: 댁으로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형: 허나 이곳 상황이.. 신: 이곳에 불을 지른 자들을 아십니까? 은형: (신 보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빛..) 신: 혜민사는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을 한 자들은 저와 왕실에 폐를 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요.. 은형: (침 삼키는) 신: 저들이 부부인께서 여기 계시다는 걸 알고 노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계속 계시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부상당한 사람들과 무너진 혜민사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저를 위해, 중전을 위해 댁으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은형: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다. 부드럽게 말하고 있다 하나, 분명 부탁이 아닌, 명령을 하고 있는 신의 마음이 강압이 아니라 염려라는 것도 알아 들었다.) 신: 이제 곧 지원병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들을 따라 댁으로 귀가해 주십시오. 불이 난 것도 위험한 일이었으나.. 이 비를 계속 맞는 것도 몸에 이로울 게 없을 겁니다. 은형: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신: 중전께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은형: 예.. 걱정 말라 전해 주십시오. 신: (그제서야 입가에 설핏 미소가 감돈다.)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빗속을 뛰어 다니는 소리도, 물이 튀기는 소리도 들린다. 어두운 산야를 환하게 밝히던 화염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씻겨 날아가 버리고, 다시 또 시커먼 어둠이 오래된 사찰과 산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고마운 비를 맞으면서도 웃는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비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래서 신은 회정 대사의 부름으로 비를 그쳐 주기 위해 다시 또 힘을 끌어 보았다. 간절한 바램을 주문으로 외고, 이제 그만 먹구름이 물러가도록 재촉하기 시작했다. 곁에서 보기엔 별다른 동작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표정도 짓지 않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식은땀 하나 흘리지 않고, 그 짙은 먹구름을 사라지게 하는 신은.. 정말 신(神) 같았다. 빗줄기가 잦아들 무렵, 때마침 환익이 지원병들을 이끌고 혜민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혜민사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인근에 잔당들이 없는지 알아보러 다녔다. 신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듬직하기만 했다. 월희와 환익이 돌아가면서 신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신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해 나갔다. 그런 모습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시선 하나..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 “대군 마마!” “..” “마마!”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어.” “???” “그렇게 엄청난 힘을 써 놓고, 기색 하나 달라지지 않았어.” “..”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 있는 거지? 난.. 난 힘을 쓰고 나면 한나절은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어찌 저 녀석은..’ “………………………………….황남 평야 전부를 빗물에 흠뻑 젖게 한 사람입니다.” “(사량 보는)” “가물어서 땅이 쩍쩍 갈라지던 그곳에.. 끝이 보이지 않는 운우국 최대의 곡창 지대에.. 사흘 내내 비가 왔습니다. 논에 댈 물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노약자들이 죽어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자가 와서 하늘 향해 손 한번 뻗었더니, 오라고 빌 땐 코빼기도 안 보이던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더군요.. 사람들은 감동했습니다. 죽어가던 사람들을.. 땅을.. 살렸다고 감동했습니다. 허나.. 저는 주먹을 움켜 쥐었습니다. 저리 쉬운 일을 왜 그제야 와서 해 줬는지.. 조금만 빨리 왔어도 그리 허무하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후..)” “…………………………………..걱정 마. 네 복수는 내가 해 줄 테니..” “(남자 보는)” “이만 가자. 더 지체하다간 네 말대로 놈들에게 잡힐 것 같다..” “예.. 퇴로는 정화산으로 정했습니다.” “(고개 끄덕이고는 몸을 돌린다.)” 그리고 어둠 뒤편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두 남자. 이미 자취도 없다. #3. 다음 날 신: (밥 한 술 뜨다가 채경과 눈이 마주쳤다. 피할 새도 없었다. 안 마주치려고 그리 애썼건만.. 아, 저 처량한 눈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채경: (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폐하.. 신: 안 돼! (피하긴 했으나, 맞닥뜨리고 나선 어쩔 수 없이 이 말이 튀어 나가고 만다.) 채경: (울상 짓는) 신: (채경의 실망하는 표정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순 없었다. 그래서 더 단호하게 얘기하게 된다.) 지금이 어떤 땐지 몰라? 채경: 알지만.. 신: 그럴 거면 차라리 부부인을 궁으로 불러. 나갈 생각하지 말고.. 채경: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어제 그런 일을 겪은 분을 어떻게 오라 가라 해요? 이 추운 계절에 그 큰 비를 맞으시고.. 아무리 별일 없었대도 몸 져 누워 계실 거예요. 또.. 궁에 들어오는 게 옆집 드나들 듯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폐하는 암것도 모르셔!) 신: (채경의 말이 다 맞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안 돼. 채경: 어머니 얼굴 잠시만 뵙고 올게요. 신: 당신이 나가는 건 작은 일이 아냐. 채경: 몰래 갔다 올게요. 신: (눈썹 꿈틀) ??? 채경: 변장하고, 날아가면.. 신: 안 돼!!!! (행여나 그럴 생각 하기만 해~! 가만 안 둬!!) 채경: (지지 않고) 집까지 한 시진이면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요. 신: 절대 안 돼!! 채경: 폐하!! 신: 당신 마음 모르는 거 아냐. 하지만 지금은 자중해야 돼. 채경: 허나.. 신: 부부인 괜찮아. 다친 데 하나 없으시고, 댁까지 무사히 귀가하셨어. 2~3일만 더 쉬시다가 궁에 오시라고 해. 그때까지만 좀 참아. 참아 봐.. 채경: .. 신: 입 그렇게 내밀지 마~ 채경: (신 보는) 신: 눈 그렇게 치뜨지 말고~ 채경: (팩 토라지는) 신: 정말.. 안 도와준다~ (어깨에 힘이 빠진다.) 채경: (폐하가 뭘 걱정하시는지 안다. 그래서 더 고집 부릴 수 없음을.. 그 또한 안다. 하지만.. 정말 아주 잠깐 아무도 몰래 나갔다 오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직접 내 눈으로 어머니를 뵈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입으로 전해 듣는 소식이 아니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집 부리게 됐다. 힘든 폐하, 신경 쓰시게 못 되게 굴고 있었다.) 신: (채경의 뚱한 표정을 보고 일순 화가 났다가-자기 마음을 몰라 주는 것 같아서-, 또 금세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더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버린다. 어차피 이 얘긴 더 해서 소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논란만 가중시킬 것 같다. 차라리 얼른 아침을 먹고 이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일 것 같다. 오늘도 할 일이 태산이었다. 추격의 고삐를 죌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채경: ………………………………..서신은.. 보내도 돼요? 신: (밥 숟가락 다시 놀리다가 채경 보는) 채경: (신 보는) 신: (침을 꿀꺽 삼킨다. 채경이 한 발 물러서 줄 것 같은 예감에,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만다.) 서신이야.. 못 보낼 거 없지. 채경: 그럼.. 사람을 보내도록 할게요. 신: 그래.. (그렇게라도 고집을 접어 준다면 나야 고맙지.. 부부인의 친필 서신을 보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채경: ………………..죄송해요.. 신: 뭐가? 채경: 신경 쓰이게 해서요.. 신: (피식) 그래도 넋이 완전히 나간 건 아니라 다행이네.. 채경: ??? 신: 앞뒤 분간 못하고 덤벼들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채경: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은..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 반박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억울하다.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아니, 조금은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애써 눈 감고 나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그래서 그 언젠가 대비전으로 갔을 때처럼 폐하의 심기를 진정으로 건드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 자꾸 보채면, 그대 집까지 공간 이동이라도 해서 날아가야 하나.. 했어. 채경: (눈 커지는) !!!!!!! 신: 그렇게 보지 마~ 나 그럴 시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기대에 찬 눈으로 열망하지 말라구..) 채경: (아쉬운 눈길 보내는.. 그 생각까진 못했었는데.. 그 방법이면 정말 안심하고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신: 지금 일이 얼마나 많이 터졌는지 알지? 혜민사까지 더해져서 정말 정신 하나도 없어. 채경: 한 식경(食頃)이라도 빼 주시면.. 신: 이렇게 나오면 나 교태전에 못 온다~ 채경: (신의 귀여운 엄포에 다시 또 입 다무는) 신: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에 찼다가, 불가능성이 야기되면 순식간에 우울해졌다가..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채경을 지켜보는 게 쉽지만은 않다.)…………………..가족은.. 정말 다르구나.. 채경: (신 보는) 신: 이치 바르고 경우 잘 따지는 채경: .. 신: ………………………………….뭐.. 그건 사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니까 길게 말하면 안 되겠다.. 채경: ??? 신: (자신의 혼잣말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채경을 보며 피식 웃는다.) ‘나도.. 나도 그대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뒤 분간 못하고 날뛰겠지..?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하고 싶은 대로 하겠지..? 불구덩이인지도 모르고 달려들겠지..? 그러니까.. 그럴 걸 아니까.. 미리 예방해야 돼. 그댈 위험에 노출시킬 수가 없어. 밖에 나간다고 당장 큰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에 하나 라는 것조차 상상하기 싫어. 위험한 곳엔 아예 그림자도 못 비추게 할 거야. 갑갑해도.. 속이 타도.. 이 자리에 있어 줘. 그냥..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여기에 있어.’ 채경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은,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한다. 그리고.. 더는 신을 곤란하게 할 수 없는 채경은, 묵묵히 그 앞을 지킨다. 둘의 마음은 같았다. 그들의 가족이 무사할 것.. 그들의 백성들이 더는 아프지 않는 것.. 그래서 하루 빨리 이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고 있는 반역자들을 색출해 내는 것.. 더는 한숨 짓는 얼굴 보이지 않게.. 더는 무슨 일이 생겼나 귀를 쫑긋 세우지 않게.. 그저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오길 바라며, 왕과 왕비는 조용히 아침을 시작한다. #4. 사정전 환익, 월희, 원호에게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조사와 추적 상황에 대한 보고를 모두 들은 신. 각각의 업무에 대해 다시 또 지시 사항을 내려 주고, 잠시 대화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신의 최측근인 세 사람은 생각에 골몰해 있는 신을 바라보다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다. 이 사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언제쯤이면 놈들의 본거지를 덮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눈치다. 신: 해루국은 어때? (갑자기 툭 내뱉듯 말을 한다.) 월희: (자신이 정찰 업무를 책임지고 있기에)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신: …………….고심.. 중인가? 환익: 실익을 따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신: (환익 보는) 환익: 감정적으로야 공주의 복수를 감행하고 싶을 겁니다. 허나.. 전쟁을 선포했을 때 발생할 피해를 따져 보지 않을 수 없겠지요. 해루국이 우방국 중 제일 강대하다 해도, 우릴 이길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걸 해루국이 모를 리 없죠. 그러니 결정이 쉬이 나진 않을 겁니다. 신: 결정은.. 그들이 전쟁을 통해 뭘 얻을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세 사람: (신 보는) ??? 신: 해루국도 우릴 이길 거라고 생각진 않을 거야. 그걸 목적으로 전쟁을 하지도 않을 거고.. 그러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 방울이라도 떼 버리겠다고 생각하면 달려들 수도 있어. 고양이를 이기겠다는 게 아니라, 방울을 떼서 고양이한테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는 거지. 그걸 목적으로 하겠다고 하면, 고양이를 공격하지 말란 법도 없어. 그리고 난.. 그게 걱정이야. 환익: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하겠습니까? 신: 글쎄.. 원호: 저들도 희연 공주가 우리 궁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됐을 겁니다. (전령이 급파된 상태임.) 공주의 죽음이 억울한 면이 있긴 하나, 떳떳한 입장은 아닌 거지요. 정치적으론 더 그렇구요.. (환익의 말을 거든다.) 신: (고개 끄덕이며) 그래.. 그래.. 그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 때의 얘기야.. ‘하지만.. 이성을 상실했다고 가정하면, 얼마든지 문제될 게 없는 것들이기도 해. 예전 같으면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나도 그럴 수 있음을 알아. 내 피붙이, 아니, 내 소중한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면, 이성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감정을 앞세워 일을 그르치게 될 수도 있어. 이런 걸 이해하게 돼서 다행인 건지.. 괜한 걱정을 하게 돼서 불행인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불리한 상황이 눈에 전혀 안 들어올 수도 있다는 거야.’ 세 사람: (신의 생각을 알지 못하다 보니,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지 않을 땐 어떻다는 건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서로 눈치를 본다. 왜 폐하께서 저리 고민 중인지 아냐는 눈빛이다.) 신: (턱에 손을 대고 이런저런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월희: (조심스럽게) 해루국이.. 전쟁을 발발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환익, 원호: (월희 보는.. 그리곤 곧 신 보는..) 신: (픽)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해루국을 초전박살 내야지. (고민 많은 머리와 달리, 대답은 매우 간단하게 나온다.) 세 사람: (신 보는.. 너무 간단하게 대답하셔서 정말로 저게 진심인지 궁금한 표정..) 신: 최대한 신속 정확하게 전쟁을 끝낼 거야. 그러려면 내가 날아가서 단판을 지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환익: ………………………….궁을 비우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은 시국엔 더더욱.. 신: 그래도 그게 최선이야. 환익: 안방을 내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저들이 노리는 건 폐하의 부재(不在)일 수도 있습니다. 신: (픽 웃으며) 운우국의 안방은 그리 호락호락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아냐. 그건.. 내가 장담해. 그리고 저들이 원하는 목적이 완성되려면 나의 부재(不在)론 어림도 없어. 저들은.. 날 죽여야 하니까.. 세 사람: !!!!!!!!!! 폐하!! 신: 흥분할 거 없어. 내가 죽지 않으면, 운우국은 누구에게도 왕좌를 허락하지 않아. 그게 정통이고, 그게 역사야. 이신이 죽어야 다음 왕이 나올 수 있어. 그래서 만에 하나, 궁이 저들 손에 넘어가더라도 반역은 성공하지 못해. 세 사람: .. 신: 다만.. 내가 걱정인 건, 궁보단.. 할마마마와 중전이야. 세 사람: (신 보는) 신: 궁은.. 무너지고 깨져도 재건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잖아. 만일 두 사람이 잘못되면.. 그런다면.. 누구도 두 사람을 대신할 수 없잖아. 난.. 그게 걱정이야. (그게 두려워. 그게.. 진심으로 두려워..) 세 사람: (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이런 순간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 이런 순간 빈말이라도 괜찮을 거라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언변이.. 송구스럽다.) 신: (머리를 살짝 흔들며 화제를 돌린다.) 요즘.. 대신들은 어떻지? 세 사람: ??? (급작스런 하문에 어리둥절해 하는) 신: 여기저기 일이 계속 터지고 있는데.. 왜 대신들이 조용한 거지? 세 사람: (신 보는) 신: 영상이야 족보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고, 좌상은 출타 중이라 그렇다지만.. 다른 대신들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세 사람: .. 신: 특히.. 병판이 침묵하는 건 좀 이상한데..? 환익: …………………..하긴.. 이상하네요.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시는 분인데.. 원호: 태평성대에도 나라의 위기론을 들고 나오시는 분인데.. 정말 이상하군요. 신: 뭐.. 이번 사태는 공식화된 게 아니고, 최대한 물밑 작업으로 진행해 온 게 맞지만.. 이 정도면 눈치챘을 법도 한데.. 월희: ………………………………….. 신: (월희 보는) 월희: 두 분께선 병부의 중심에 계십니다. 헌데 너무 침묵하시는군요. 신:.........................................(월희에게) 네가 좀.. 알아 볼래? 월희: (신 보는) 신: 만약 이 일이 조정 대신들과도 연관돼 있다면, 내게 반감을 갖고 있는 신료들이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아.. 세 사람: .. 신: 신출귀몰한 놈들의 본거지를 찾는 것보다.. 어쩌면 의심 가는 대신들을 미행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어. 세 사람: (하긴.. 왜 미처 그 생각은 못 했을까?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는 놈이, 신료들과 손을 잡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명망 있고 권력 있는 자들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러니 폐하 말씀대로 놈들보단 신료들을 파고드는 게 쉬울 수도 있었다.) 신: (월희에게) 도성을 감시하는 그림자들에게 병판과 홍참판의 뒤를 미행해 보라고 해.. 월희: 예.. 신: (환익에게) 이연은 어디쯤 왔지? 환익: 이제 곧 신: 이제 슬슬 위치를 노출해야 하지 않나? 월희: 예.. 미오가 서서히 일행을 노출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쯤 저들 눈에도 띄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신: 그럼.. 놈들이 미끼를 물길 기다려야겠군.. 세 사람: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말로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이연의 일은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어찌됐든 이번 작전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이연으로 저들의 꼬리를 잡든, 이연의 희생을 감수하게 되든,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는 폐하의 수심에 찬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전마마가 간택된 순간부터 혼례를 치르고 이 일이 터지기 전까지, 평생 제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는데.. 시련은 너무 일찍 찾아왔고, 행복한 미소를 뵌 게 너무 짧았다. 그래서.. 얼른 그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못 봤다면 모를까, 그 미소를 뵙고 나니 폐하가 행복해지는 게 그들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폐하의 얼굴에 다시 그 미소를 찾아 드릴 수만 있다면, 지금 이런 마음고생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제발.. 이 마음고생 끝에 낙이 있기를.. 그리고 그 시간이 길지 않기를.. 바래고 또 바래 본다.) #5. 이튿날 밤 정신 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고, 차분히 그동안의 일들을 곱씹으며 정리해 나가는 신. 아른거리는 촛불 옆으로는 그를 위해 채경이 올린 영양가 가득한 다과상이 놓여 있다. 하나만 먹어도 속까지 든든할 것 같은 두툼한 떡갈비와 머리를 맑게 해 준다는 견과류, 속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머리의 열을 내려 준다는 생강차와 부드러운 단호박찜까지.. 조합이 이상해서 그렇지 제각각 몸에 좋은 것들로 한상 차려 올려 보낸 마음이 예뻤다. 그래서 단순히 음식을 먹어 배고픔을 달래는 게 아니라, 채경의 예쁜 마음을 받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미소 짓게 되는 입이, 웃음 짓는 눈이, 바쁘고 정신 없는 와중에도 신을 기분 좋게 했다. 신, 간간이 젓가락을 놀려 한 입 두 입 먹으며, 그간의 일들을 따지고 점검해 나가는데.. 신: (수많은 보고서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다른 서찰들을 내려 놓고 그것에 집중하는데..) 하나는 해동시에서 올려 보낸 서찰이었고, 다른 하나는 거지촌 몰살과 관련된 보고서였다. 해동시에서 보내온 감찰 보고서에는 얼마 전부터 주민이 아닌 자들이 눈에 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해동시는 원래 화북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외지인들이 오가는 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헌데 주기적으로 신원을 알 수 없는 자들이 인근 지역을 둘러보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게 주된 골자였다. 해동시라면 그저께 무영국 사신단이 지나쳐 갔을 고을이었다. 이걸 미리 알았다면, 좌상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건데.. 놓친 듯하다. 좌상이라면 짧은 방문이라도 사건의 추이를 파악해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해동시는 도성과는 거리가 있으나, 도성의 외곽을 담당하는 주요 고을이었다. 최근과 같은 시국에서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게 신의 입장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혹자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거라고 비아냥댈 수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었다. 돌다리도 두드려 봐야 한다는 게 그가 배운 가르침이었다. 원래 담대하고 추진력이 강한 그에게, 좌상이 늘 주입시킨 것이 신중함이었다.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체득하긴 어려웠으나, 배움의 결과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신: (내일 날이 밝으면 해동시로 사람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서찰을 넘겨 보다가 발견한 것이 거지촌 몰살 사건 초동 수사 보고서였다.) 객점에서 처음 거지촌 몰살 사건에 대해 들은 후, 그날 밤 당장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었다. 다음 날 오후에 환익이 보고를 하러 왔고, 보고를 들으면서 반역자의 능력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모르게 밤에 급습해서 불을 지르고 물을 뿌려 불을 껐다는 것에 주목했다.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간 거지들이 안 됐다는 생각을 한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터진 사건들로 인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각각 따로 놀고 있었다. 딱히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저 역도들의 성향을 알게 된 게 다였다. 하지만 지금.. 어쩌면 공통점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토산.. 도성 취객 살인 사건을 조사 중이던 그림자 아이가 죽은 곳은 정토산 입구였다. 그곳에서 죽은 그림자 아이는 그 전에 죽은 별 아이들과 달리 사체가 수습되지 못한 채였다. 상대도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예상했는데, 다음 날 유력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물론 사체에서 아무런 단서가 나오지 않아,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에만 그쳤는데.. 어쩌면.. 정토산에서 싸움이 난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곳의 거지촌 중 한 곳이 정토산과 가까운 곳의 거지촌이었다. 일을 저지르기엔 본거지와 가까운 곳, 먼 곳 둘 다 장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 어쩌면.. 어쩌면, 본거지와 가까운 곳에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림자 아이는 본거지로 귀가하는 자객을 뒤쫓다 당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정토산은 도성의 북쪽 외각을 감싸는 산으로, 산세가 험해 출입이 적은 곳이다. 어떤 일을 은밀히 진행하기에 썩 괜찮은 장소였다. 여러 모로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많았다. 신: 정토산이라.. 혹.. 이곳에..? 신의 눈빛이, 아른거리는 촛불 사이로 반짝거리며 빛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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