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일찍 오지 못해 미안한 마음 안고 입궁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잡지와 관련한 행사가 있어서 하루종일 신경 썼더니, 집에 와서 완전히 넉다운 됐어요. 허리가 너무 아프네요. 비까지 내려서 안 그래도 삭신이 쑤신데, 기름을 들이부었습니다. --;; 지금은 바닥에 이불 깔고 노트북 앞에 놓고 매우 불량스러운(?) 자세로 썰을 쓰고 있습니다. ^^ 갑자기 봄이 온 것처럼 날씨가 완전 풀렸어요. 그 바람에 찬바람 싫어하는 쏭기자는 살 것 같습니다. 며칠 코가 막혀서 답답하던 몸도 거의 다 나았고, 춥지 않은 바깥 공기에 출퇴근 길도 나쁘지 않네요. 그리고.. 텔궁에 돌아온 덕분에, 텔궁 창을 열 때마다 두근두근 설레는 재미까지 생겼어요. 집에 와서는 소설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자리에 누워선 다음 이야기 상상하며 잠들고.. 매일매일 비슷비슷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남들에겐 비밀인 쏭기자의 시간이 참 재미납니다. 한때 정말 열심히 소설 쓸 땐 쏭기자로서의 삶을 더 즐기고 우선시하느라 오프라인이 엉망이었더랬죠. 그냥.. 다시 소설 쓰게 되니 새로 시작하는 것 같아서 감회도 새롭고.. 이런저런 감상이 드네요. 네~ 서론이 길었습니다. 비도 오고 자세도 불량하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쓸데 없는 말이 많았습니다. 음.. 솔직히 썰 쓰는 것도 아직은 쑥스러운 게 많아요. 그냥 쿨하고 멋지게 당분간 글로서 내 마음을 대신한다며 썰을 생략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또 이러고 있습니다. --;; 말 길게 하는 병은 시간이 지나도 낫질 않네요. 불치병인가 봐요. ^^;; 두서 없는 제 이야기보단 헤어져서 힘들어하고 있는 신이랑 채경이가 더 궁금하실 테니, 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할게요. 혀니우기맘, 사과꽃향기, 신으네ㅋ, 그리움, 비사랑, 보보보, 달꿈이, 민이쭈니(사랑을 놓치다처럼 오래 헤어져 있지 않을 거예요..), 가을향기, 카시오페, 으네사랑, 비밀, -수정-. 희선맘, 여우비(우리 신이 해물된장찌개도 못 먹는 놈이 되고 말았어요. 못된 작가 땜에..), 쟁이공주, 가을하늘, mom(다시 쏭기자의 상상 속에 들어와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L군, 등꽃여인, 마라이, 로사리오, chihead, 에궁(우리 신이는 자신이 왜 버림 받았는지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더 답답해 하고 있지요..), 사랑jy, 파란하늘, 성준엄마, 보리수(우리 채경인 인복이 있는 아이죠~ 그래서 잘 살아내고 있어요.), 야구광, CocoMi, 이숙경(헤어진 이유..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알프스, 요술색연필(겉으로 보이는 신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그래서 더 이 녀석이 신경 쓰입니다.) young(첫 댓글, 감사해요~), hesun(오랜 만이에요. 저 1월 말에 삿포로 갔다왔는데요, 일본 가니까 대감 생각 나더군요. 우리 또 언제 보죠?^^), 소리새(담편 좀 늦었습니다. 죄송~), 오만과편견, tjmom, 미쁨(소설 잘 쓰는 기자 친구가 아니라, 속 썩이는 친구입니다. 그래도 제 상상은 재미있게 읽어 주셔야 돼요~), 저승사과, 햇살가득한(슬픔은 짧고, 재회도 짧고.. 단편으로 안 끝나면 다른 소설들이..;;), 선아, 그림자, 주사랑, 하늘미소(대감 땜에 헉!! 이유는..? --;;), Jean(왕녀는 일단 이 녀석들부터 해결하고 가능할 것 같아요. 저도.. 마음이 무거워요.), 좋은사람, 시베리안 꼬꼬, hyunju9220, 구찌, 프리티우먼, 가넷, 이미지, 배따라기, 가을하늘, 빈틈, 조조판사, 자유여행, 하늘바라기, park, rezroad, 큰손(예~ 이 아이들은 여전히 컨니뉴~입니다.), 시리우스(우연이 없다면 상상소설이 있을 수도 없겠죠? 채경이의 불쑥~! 커밍순..), 밥팅써니(그러게요, 해물된장찌개는 맛있을 뿐인데..), Reds, serendipity(비오는 날을 좋아하는구나.. 난 비오는 날은..--;; 그래도 너 보니까 반갑고 좋다. 환절기 감기 조심!), 꿈꾸는날, 이쁜엄마 대감님.. 그리고 난생 처음 수면 상승 하시면서 멋진 선물 선사해 주신 샤이나 대감님과,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텔궁을 지켜 주고 계신 좋은꿈 대감님.. 우울하고 부족한 글인데, 잊지 않고 구독료 챙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밝고 경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 드려야 하는데, 두 아이가 아직은 많이 아파요. 그래도..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될 날까지 응원 많이 해 주시구요.. 두 아이 많이 괴롭히지 말라고 쏭기자한테 협박도 많이 해 주세요. ^^ 그럼.. 저는 아직은 서로 떨어진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는 신이랑 채경이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갈게요. 다음 편도 빨리 갖고 올 수 있도록 열글 할 거구요, 환절기에 모두모두 감기 조심 하세요~!! #######################################################################################
“강현씨!!” 조제실에서 약을 조제하고 있던 강현은 갑자기 입구 쪽에서 들리는 자기 이름에 화들짝 놀라 멈칫했다. 하지만 곧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약통에서 약 몇 알을 꺼내는데.. “강현씨!!” 좀 전보다 더 크고, 더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자, 숙였던 허리를 세우고 안경을 고쳐 쓰는 강현. 대체 누가 이리도 애타게 자기를 찾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제실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이내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두 눈동자는 서로 크게 벌어지며, 강현은 의아함을, 신은 반갑고 안도하는 마음을 커진 눈에 담았다. 잠시 후, 소란스러운 자동차 소리가 난무하는 도로변에 서서, 신과 “그럼.. 강현씨도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아니.. 난 지금 신이씨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채경이가 없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 “저기요..”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믿어지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는데..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오! 아무 일 없었어요.” “근데 왜..?” “저도 궁금해요. 왜 이러는 건지..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왜 나한테 말을 못했는지..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두 사람.. 싸우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전혀요..” “..” “처음엔..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해서 하루 쉬는 줄만 알았어요. 그래도 걱정이 되서 전화를 했는데 안 받길래 전화 받기 곤란한가 보다 했구요.. 근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회사엔 계속 휴가라고만 하고.. 슬슬 걱정되기 시작해서 어떡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하고 있는데.. 뭐요?” “오늘 사직서가 제출됐어요.” “!!!!!!” “회사 경비실에 맡기고 갔다는데..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그런 일이..’ “근데 본인하곤 여전히 연락이 안 돼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 “그래서 말인데요.. 채경이가 자랐다는 고아원,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고아원이요?” “예.. 강현씨한테도 안 왔으면, 채경이가 갈 만한 덴 거기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채경이 따라 간 게 몇 번 안 돼서..” “대충이라도 알려 주면 찾을 수 있어요.” 그때의 절박하던 남자의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어깨가 쳐진 남자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강현을 찾아왔었다. 어쩌면.. 그 당시 남자를 지배하고 있던 감정은, 슬픔이나 아픔 따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에게 버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여자가 떠나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남자의 절박하고 처연한 눈동자에서 읽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후, 몇 번의 만남이 더 이어졌지만, 남자와 마찬가지로 친구와 연락이 끊겨 버린 강현은, 기대를 갖고 오는 남자를 번번이 실망시켰고, 마지막까지 축 처진 어깨를 배웅해야만 했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03 #. 약국 약국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신. 두 손을 깍지 끼고 꼼지락대며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때 신의 눈에 강현의 신발이 들어오고.. 이에 고개를 든다. 강현: (물과 소화제가 올려진 작은 쟁반을 신에게 내민다.) 신: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소화제와 종이컵을 집어 든다.) 강현: (신 옆에 조심스레 앉는다.) 신: (담담하게 소화제를 먹는다.) 강현: 밤 사이 호전되지 않으면 병원 가세요. 신: (물을 꿀꺽 삼키며 강현을 본다.) 강현: (다시 봐도 신기한지 이렇게 신과 마주하고 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그래서 도리어 더 가볍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거 같다. 복잡한 머리와는 달리, 입가엔 미소가 어린다.) 이렇게도 보네요.. 신: 그러게요.. 강현: 2년 정도 됐나요? 마지막으로 뵌 게.. 신: 그 정도 된 것 같네요.. 강현: (피식) 신: (약국 둘러보며) 언제 옮기셨어요? 강현: 1년쯤 전에요.. 이것저것 끌어 모아서 독립했어요.. ^^ 신: (강현의 해맑은 웃음에 설핏 따라 웃는다. 최근, 이렇게라도 웃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강현과 신의 입가를 맴돌던 미소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올라갔던 입꼬리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굳어진 입매와 함께 다시 닫혀 버린 말문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를 형성한다. 하지만.. 해도 될지.. 소리 내어 말해도 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강현으로선 헤어진 지 3년이 넘은 친구의 전 애인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묻고 싶었다. 신을 보게 되니,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현: 이런 말.. 실례일지도 모르지만요.. 신: (강현 보는) 강현: (침을 꿀꺽 삼키고는) 혹시.. 신: .. 강현: 채경이 소식 들은 거 있으세요? 신: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 같다.) 타인에게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듣는 그녀의 이름이 얼마 만인지.. 그녀를 미워하다 못해 천하의 죽일 년이라 생각하는 어머니에게서가 아니라, 그녀를 진심으로 보고 싶어 하고 걱정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그녀의 이름이,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숨이 멎을 만큼 설레는지.. 신 스스로도 놀랍기만 하다. 그녀를 알고 있는, 그래서 그가 신기루를 붙잡고 있다는 게 아니라고 확인시켜 주는 사람을 만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돼 버리는 존재의 무게 탓에, 채경은 점점 없었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없어지고, 그녀를 알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면서, 그녀가 그의 곁에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조차 꿈이었던 것처럼, 신기루였던 것처럼 되고 있었다. 진실조차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잔인함에 속상해 하고 억울해 해 봐도.. 남는 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간절하게 채경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놓아 버리면.. 정말로 없었던 일이 될까 봐.. 신은 두려웠다. 그렇게 오랫동안 홀로 채경의 기억을 붙잡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채경을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비록,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만큼, 반가움이 더 크게 와 닿는 신이었다. 강현: (기대에 찬 눈을 숨기지 못하고 신을 바라본다.) 신: (기대에 어긋나는 답변만 갖고 있는 입장으로서, 괜히 미안해진다.) 강현: (침을 꿀꺽 삼키고 신을 바라본다.) 신: 기대에 어긋나서 미안한데요.. 강현: (아.. 이미 신의 대답이 무엇인지 알아 버렸다. 그래서 기대로 부풀었던 가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내려앉는다.) 신: 그날 이후로.. 전혀 들은 게 없어요. 강현: 결국.. 못 찾으셨어요? 신: 예.. 강현: (하..) 신: (강현 보는) 강현: (시선을 내려 자기 손만 멀거니 내려다본다.) 신: ……………………………………강현씨한테도.. 연락 없었어요? 강현: 네.. 그래서 채경의 이름이 귓속에 파고드는 반가움만큼이나, 그 때문에 실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채경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강현: 독한 기집애.. (저도 모르게 야속한 감정이 삐져 나온다.) 신: .. 강현: 어쩜 그렇게 무 자르듯 연락을 싹둑 잘라먹을 수 있는지.. 신: .. 강현: 10년 우정도 다 소용 없어요. 그래도..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신: .. 강현: (푸념 같은 혼잣말을 내뱉다가 신을 본다.) 신: (강현 마주 보는) 강현: ………………………………………..다 지나서 하는 말인데요.. 신: .. 강현: 이제는 신이씨도 아무렇지 않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요.. 신: .. 강현: 채경이가.. 신이씨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 했던 거.. 아세요? 신: (숨 삼키는..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당한 공격에 숨도 못 쉬겠다.) 강현: (신의 안색 살피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젠 새삼스럽기까지 할 전 여자친구의 얘기가 실례일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강하게 든다. 하지만.. 왠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이 사람은 채경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예전 같은 감정은 아니더라도, 채경을 완전히 잊어 버릴 사람은 아닐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과거, 신을 만나던 순간에, 몇 번이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얘길 꺼내고 말았다. 채경이 끝끝내 지키려 했던 비밀이었기에,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영영 신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게 됐을 때, 그제서야 후회가 되었다. 이 사람에게 채경의 힘든 고민을 얘기해 볼걸.. 하고 말이다. 그랬다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바랜 기억이 되어 버린 후에야, 때늦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 신: 알고 있어요.. 강현: 네?? 신: 그 일.. 알고 있어요.. 강현: !! 신: (멋쩍은 듯이) 그래서.. 많이 속상했어요. 강현: 알고 계셨다면.. (채경이 그렇게 놓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떡하다가..) 신: (도리도리 고개 젓는) 강현: ??? 신: (한숨 쉬듯) 나중에.. 채경이 떠나고 한참 후에 알았어요. 강현: 아..! 신: 우연히, 어머니랑 아버지가 하는 얘길 듣고 알게 됐는데.. 그땔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아, 잠시 숨을 다듬는 신이다. 그런 신을 바라보며 이 남자, 아무래도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지독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래서 신의 여윈 얼굴이, 전보다 더 짙어진 눈빛이, 마음 쓰인다. 그녀 몫의 걱정이 아님을 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파해 주고 싶다. 신: 어머니도.. 채경이도.. 모두 원망스러웠어요. 강현: (신 보는) 신: 나 혼자 바보 된 느낌.. 강현: .. 신: 나만 모르고 다들 알고 있었다는 게.. 하.. 강현: .. 신: 아무것도 모르는 날 보고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어요. 하지만 그를 제일 많이 괴롭힌 건, 바보가 된 굴욕이 아니라, 채경 혼자 그 엄청난 고통을 겪게 했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앞에서 웃어 주었을 채경이.. 혼자 뒤에서 울었을 채경이.. 못 견디게 아프고 또 아팠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 약속했는데.. 세상 그 무엇도 널 아프게 하지 못 할 거라 큰소리 쳤는데..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고, 가혹한 불행과 아픔을 선사한 이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는 게 죽도록 싫었다. 그러니 누굴 원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신은 이기적이고 독한 놈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이라는 걸 했다. 그 모든 걸 혼자 참아낸 채경을 원망했고,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지 못한 속물스러운 어머니를 원망했다. 끝끝내 어머니의 방해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기 손을 놓고 떠난 채경이 원망스러웠고, 자기 아들이 원하는 것도 모르고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이를 등 떠민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강현: 아직도.. 채경이 기다려요? 신: (멈칫) 강현: 신이씨 만난 후로 계속해서 실례되는 말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신: (강현 보는) 강현: 왠지.. 그래 보여요. 신: ‘제가요?’ 강현: 예전처럼 다급하진 않은데.. 더 절박해 보여요. 표정은 아닌데.. 눈빛은 그래 보여요.. 신: ‘아마도..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어서 그럴 거예요..’ 강현: 채경인..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까요? 신: ‘글쎄요..’ 강현: 우리 생각.. 하긴 할까요? 신: .. 강현: 하.. 신: ‘후..’ 같은 사람을 떠올리며, 비슷한 마음으로 내뱉는 속 깊은 한숨.. 떠난 이가 원망스럽지만, 걱정되고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두 사람.. 떠난 사람도 저들처럼 두고 온 이를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떤 눈빛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 다음 날 오후 점심 장사를 마친 한적한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없던 일도 만들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간만에 허리 펼 새도 없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잠시 일손이 빌라치면, 행주를 든 채경은 여기저기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혜옥은 어제 내내 정신줄을 놔 버린 자신에게 시위하는 거라 생각하며, 왔다 갔다 혼자 바쁜 채경에게 가볍게 대충 하라며 잔소리를 던지곤 했다. 그러면 채경은 싱긋 웃고는 또 열심히 바닥이며 탁자며 창틀이며를 닦아댔다. 닦아도 티도 안 나는 오래된 탁자며 의자를 닦는 분주한 손길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드르륵 식당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섰다. 이에 탁자를 닦던 손을 멈추고 고갤 드는 채경. 아는 얼굴이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나자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 채경: 식사 하시게요? 태호: 예.. 채경: 점심이 늦었네요.. 아, 아닌가? 저녁이 이른 건가? 태호: 네.. 저녁이 이른 거예요. 배에서 대충 먹었더니 배가 빨리 고프네요.. 채경: (주방으로 향하며) 오늘 출항했었어요? 태호: 예.. 채경: 피곤하겠다.. 새벽부터 움직였을 텐데.. 태호: (머리를 긁적이며) 맨날 하는 일인데요 뭐.. 근데, 아주머니는..? 채경: 잠깐 낮잠 주무시러요.. 태호: 아.. (주인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웠다는 말에 괜히 들뜬다. 혹시나 싶어 들렀는데, 채경의 밥을 먹게 된 데다 단 둘이 있을 수 있다니.. 간밤에 돼지꿈이라도 꾼 모양이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채경: 오늘은 새우가 좋은데.. 시원하게 된장찌개 끓여 드려요? 태호: 예.. 채경: (분주히 상을 차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따스한 햇살이 비춰 들어오는 고즈넉한 식당에, 맛있는 밥을 기다리는 손님과, 음식을 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젊은 여자가 있는 풍경은, 생각보다 예쁘다. 모든 것이 옐로우톤으로 보이는 따뜻해 보이는 식당 안 정경이 포근한 것도 같다. 탁자를 살짝살짝 튕기는 남자의 손가락은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 즐거워 보이고, 할 일을 찾아 헤매던 여자는 진짜 할 일을 찾아 기쁜 마음으로 본업에 매진한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 안에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퍼져 나가고.. 그 구수한 냄새에 벌써부터 반응하기 시작한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밥솥에서 밥을 푸는지, 밥 냄새마저 솔솔 풍겨와 남자의 식욕은 한층 더 자극 받는다. 채경이 너른 쟁반에 밥과 반찬, 찌개까지 푸짐하게 담아 들고 나온다. 이에 자동으로 벌떡 일어나 채경의 쟁반을 받아 들려는 남자와, 남자의 도움을 거절하며 상을 차리려는 여자의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채경: 왜 매번 손님인 걸 망각해요? 태호: 무거워 보이길래.. 채경: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에요~ ^^ 태호: (결국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얌전히 채경이 반찬 그릇을 내려놓을 때까지 멀뚱히 지켜본다.) 채경: 식사하고 있어요~ 물 갖다 줄게요. 태호: 네.. (수저를 든다.) 채경: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가 물 주전자와 물컵을 들고 나온다.) 태호: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살짝 떼어 채경이 갖다 주는 주전자와 컵을 받는다.) 채경: 밥 모자라면 얘기해요~ 태호: 네.. (대답하고 밥 먹으려는데, 흠칫 한다. 왜.. 채경씨가 내 앞에 앉는 거지?) 채경: (멀뚱히 태호 향해) 손은.. 어쩌다가 그런 거예요? 태호: 손이요? 채경: 네..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다쳤어요? 태호: (붕대 감은 왼손을 들어 보이며) 별거 아니에요. 채경: 붕대를 제법 넓게 감은 것 같은데.. 태호: 그물 만지다가 살짝 긁혔어요. 채경: 보건소는 갔다 왔어요? 태호: 며칠 있으면 아물 건데 보건소는 무슨.. 채경: 그래도 제대로 치료 받아야죠. 작은 상처라고 얕보다가 큰일 나요.. 태호: 괜찮아요~ (걱정 말라는 듯 밥을 먹는다.) 채경: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호의 붕대 감긴 손을 바라본다.) 태호: (채경의 시선이 기쁘기도 하면서, 쑥스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게 쳐다보면.. 밥 먹기 불편한데.. 채경: 아.. 태호: (피식) 같이 먹을래요? 점심 먹었어요? 채경: (끄덕끄덕) 먹었어요.. 시간이 몇 신데요.. 태호: 점심 장사 하기 전에 먹은 거면, 지금쯤 배 고프지 않아요? 채경: 아니에요.. 배 안 고파요.. 편하게 식사해요~ 결국, 채경은 태호가 편하게 밥을 먹도록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내려놓았던 행주를 다시 집어 들고 다른 탁자를 닦기 시작한다. 채경의 시선을 한몸에 받지 못하게 된 게 조금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태호는 재빠르게 수저질을 한다. “내일 비 올까요?” 갑자기 들려온 채경의 말소리에 밥을 삼키던 태호가 채경을 쳐다본다. 채경: (태호 돌아보며) 일기예보보다 태호씨가 날씨를 더 잘 맞추잖아요. (뱃사람들은 날씨에 민감해 일기예보보다 정확할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태호에게 내일 날씨에 대해 묻는다.) 태호: (채경의 칭찬 같은 평가에 살짝 쑥스러운 미소가 감돈다. 하지만 곧 바깥 하늘을 보며) 구름이랑 바람 봐서는 비는 안 올 것 같은데.. 채경: 그래요? (반색한다.) 태호: ??? 왜요? 내일 무슨 일 있어요? 채경: 내일 방과 후 수업으로 벽화 그리기로 해서요. 태호: 벽화요? 채경: 네.. 애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비 와서 망칠까 봐 걱정이에요. 태호: 아마 안 올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채경: 네! 선장님 말만 믿을게요! ^^ 태호: 선장님은 무슨.. (쑥스럽게 웃는다.) 채경: 왜요~ 선장님이잖아요. 태호: (이 얘긴 더 하기 창피해서) 학교 가면 선재 자식 보겠네요? 채경: 이선생님이요? 태호: (혼잣말로) 선생은 무슨.. 채경: 네.. 내일 벽화 그리는 것도 도와주실 거예요. 태호: 진짜요? 채경: 네.. 지난 주에 벽에 하얀 페인트 칠 하는 것도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시간 많이 벌었죠.. 태호: ‘되게 웃기는 자식이네~ 바쁜 척하더니, 그런 거 도와줄 시간은 있나 보네~’ 채경: 나중에 벽화 완성되고 나면 보러 오세요. 애들 솜씨도 보고.. 그 김에 모교 방문도 하구.. 태호: 모교가 뭐 별거라구요.. 채경: 그래도 이선생님이 가끔 태호씨랑 학교 다닐 때 얘기 해 주면 되게 재밌던데.. 태호: 예??!! 학교 다닐 때 얘기요? 채경: 네.. 20년 전이랑 학교가 똑같다면서요? 그래서, 가끔 그때 생긴 흔적도 구경할 때가 있어요. 태호: (대체 선재 자식이 무슨 얘길 떠벌렸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채경: 난, 그렇게 오래된 친구가 없어서 두 사람 보면 되게 부러워요. 태호; 부러울 것도 많네요.. 채경: ^^ 태호: 근데.. 내일 수업이 언제예요? 채경: (태호 보는) #. 제일그룹 기획실 똑똑.. 노크 소리에, 서류 작업을 하던 신의 시선이 문으로 향한다. 곧이어 육중한 문이 열리면서, 현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궁금한 시선을 보이는 신에게, 몇 걸음 걸어온 현수가 묻는다. 현수: 혹시.. 윤정하라는 분 아십니까? 신: ??? 현수: 아세요? 신: 아니.. 현수: 아.. 신: 왜? 현수: 지금 밖에 이사님 만나겠다고 오셔서요.. 신: ??? 현수: 약속하신 것도 아니고, 모르는 분이라면 돌려 보내겠습니다. 신: (이상하다 생각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현수에게 그러라고 손짓으로 지시하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간다.) 현수가 물러가고, 다시 컴퓨터와 씨름하며 문서 작성에 몰두하는 신. 그러나 문 밖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린다. 이에 고개가 다시 돌아가는 신. 무슨 일인가 싶어 보는데.. 웬 여자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하: 설마.. 아직까지 내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신: (멀뚱히 여자 보는) 정하: (신의 표정 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정말 너무하네~ (진짜 이름도 몰랐단 건가? 어이가 없네~) 신: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나 싶은데..) 정하: 내 얼굴은 알죠? 신: .. 정하: 뒤늦게 이런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윤정하라고 해요. 신: 여긴 무슨 일입니까? 정하: 빚 청산을 좀 하려구요.. 신: 그날 일에 대해서라면 나도 집에서 당할 만큼 당한 상황이라.. 정하: (도리도리) 그날 일 말구요.. 신: ‘그럼..?’ 정하: 지난 주말 밤.. 신: ‘지난 주말..?’ 정하: 우리 같이 술 마셨던 거 기억 안 나요? 신: ??? 정하: 우리 RAIN에서 만났었는데.. 신: !! 정하: (픽) 난 기억 안 나도 술집은 기억하나 보네요. 신: .. 정하: 집까지 바래다 준 것도 나였는데.. 신: 하.. (어이 없어 한숨만 나오는) 정하: 우리 그날 밤에 제법 진도 나갔었는데.. 기억 안 나요? 기억 안 난다. 기억할 필요도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하지만.. 엮이지 말아야 할 여자와 엮이게 된 건..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신: (벌떡 일어나 윤정하라는 여자를 마주 본다.) 신이 기억하는 그날과는 너무도 다르게 생글생글 웃으며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전혀 기억 못하는 날을 이야기하는 여자를.. 오래도록 마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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