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궁에 왔다가 시나리오방이 없어진 줄 알고 3초간 깜놀했습니다. 저처럼 놀란 대감들이 계실 것 같은데.. 정말 다행이에요. 소설 게시판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뿐이라.. 만약 없어졌으면..? (생각하기도 싫네요.) 음.. 지난 편에서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예상 못한 죽음이라 놀란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현 상황을 잠깐 얘기해 드린다면, 비밀 커플 막바지처럼 순간순간 에피가 바뀌고 있어요. 전체적인 틀은 갖추고 있지만, 사이사이 삽입되는 에피들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어요. 그래서 희연 공주는 끝까지 고민하다가 고국에 가기 전에 살해 당하는 것으로 결정했구요.. 희빈의 경우에는 불현듯 떠오른 것으로 신이에게 암시를 주기 위해 선택한 죽음이었어요. (신이가 어떤 암시를 얻게 되는지는 이번 편 마지막에 드러날 거예요. 이번 편 제목과도 관련 있구요..) 이렇듯 왕녀 마지막으로 갈수록 변수가 많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수습하는 게 더 힘듭니다. 이연도 처음엔 공격 당해 실명하는 것으로 잡았다가, 지금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튼 상태구요.. 여러분들이 은연 중에 걱정하고 있는 우현의 운명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만 하고 있습니다. 또 그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의 이면에 대해서도 나중에 한꺼번에 다 밝힐까 했는데, (범인이 누군지 저 혼자만 알고 있다가 팡~ 터뜨리려다 보니 계속 숨기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되면 너무 설명조로 흐를 것 같아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면서 가고 있어요. 그 때문에 눈치 빠르신 분들은 조만간 범인의 윤곽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드러내는 게 안타깝지만, 너무 기대했다가 나중에 김 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요. 스릴러 영화도 중반까지 괜찮다가 마무리가 엉성해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 아~ 오늘은 정말 원고 써야 해서 시나리오방 실종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금방 나가려고 했는데, 또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고 있네요.. 이것도 정말 병입니다. 말 길게 하는 병.. --;; 신이의 마지막 대사처럼 소설도 점점 재미있어져야 할 텐데.. 그러길 간절히 바라면서, 저는 또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언제 오겠다는 기약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기다려 주세요. 그럼 재미있게 읽으시구요.. 감기 조심하세요! ########################################################################################## 제49화 왕, 제대로 된 꼬리를 잡다 #1. 교태전 폐하와의 의도치 않았던 밤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채경은,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마무리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홀로 잠드는 밤이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폐하께 따지고 들며 화를 낸 적도 있었는데..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적응하기 마련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적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눈을 감아 본다. 낯설기만 했던 궁(宮)도 집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요즘, 이제는 잠이 드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수월해진 채경이다. 잠들 수가 없어서 수를 세어 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 보기도 하고.. 별의별 수를 동원하던 것도 옛일이다. 그렇게 스르르 감은 눈에 잠귀신이 내려앉으려 할 무렵.. 예고도 없이 익숙한 기척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이에 거의 잠이 들 뻔했던 채경의 눈꺼풀이 힘겹게 떠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감각을 깨워 잠귀신을 떨쳐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럴 리 없다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채경: 폐…하..? (신을 부르면서도 목소리에 의문이 묻어난다. 어찌 이곳에 계시냐는.. 오늘밤도 바쁠 거라 하셨는데 어찌 여기로 왔느냐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신: 깼네? 채경: (어리둥절하다.) 어찌.. 신: (어둠 속에서 채경 보며 웃는) 채경: (앞섶을 여미며 불을 켜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신: (채경의 손목을 잡더니, 채경의 품으로 풀썩 쓰러진다.) 채경: (일어서려던 동작을 멈추고 신을 내려다보는) 신: (채경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에게 얼굴을 묻는다.) 채경: 폐하.. 신: 잠시.. 잠시.. 이렇게 있을게. 채경: (일단 신 보는) 신: (채경에게 더 안겨 든다.) 채경: .. 신: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눈을 뜬다.) 채경: ……………………..불을.. 켤까요? 신: 아니.. 켜지 마. 안 켜도 돼. 채경: .. 신: 나.. 자려고 왔어. 채경: 여기서.. 주무신다구요? 신: 왜? 여기서 자면 안 돼? 채경: 그게 아니라.. (여기서 침수 들지 못할 만큼 바쁜 거 아니세요? 방금 전에도 할 일이 산더미라고 하시면서 저 돌려 보내셨잖아요. 그 말 한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았어요. 헌데, 여기서 주무시겠다구요? 이렇게 힘들어 하는 기색 폴폴 풍기면서.. 제게 이렇게 쓰러질 정도로 힘드시면서.. 불도 못 켜게 해서 얼굴도 안 보여 주시겠다구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신: 내가 뜬금 없이 와서 걱정인가 본데.. 그대 보내 놓고 나서 이게 뭔가 싶었어. 채경: ??? 신: 바빠도 부부라면 같이 자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잖아. 채경: .. 신: 어차피 안 잘 것도 아니고.. 쪽잠을 자더라도 그대랑 한 이불 덮고 자고 싶었어. 채경: .. 신: 잠깐 자고 나가는 내가 귀찮겠지만, 그래도.. 그대랑 같이 자고 싶어서 왔으니까 내치지 마. 채경: 그런 건 하나도 귀찮지 않아요.. 신: (멈칫) 채경: 부부라면 함께 자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던 제 얘기.. 기억나세요? 신: ……………..응.. 임금과 왕비는 침전이 따로 있단 소리 듣고 그게 말이 되냐며 흥분했었잖아. 채경: (흥분했다고 하니 살짝 열이 오른다. 그런 것까지 기억할 필욘 없는데..) 흠흠.. 여긴 이름만 제 침전이지, 폐하의 침전과 다를 바 없어요. 그러니 제 허락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언제든 폐하가 원하면 오실 수 있는 곳인걸요. 헌데 어찌 제가 폐하를 내칠 수 있겠어요? 신: (피식 미소 짓는) 채경: 잠깐 눈 붙일 시간도 없는 상황에, 오가며 시간 보내는 게 아까워서 강녕전에서 주무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잠시라도 폐하가 제대로, 편안히 주무시길 바랬어요. 그러기 위해서 여기가 좋다면 얼마든지 귀찮게 구셔도 돼요. 신: 그렇게 말해 주니까 정말 좋다~ 채경: (당연한 얘기에 이렇게 말을 하시니.. 마음이 좀 짠하다.) 신: 요즘은 계속 듣기 싫은 소리만 들었는데.. “해루국 국경 지역까지 도착하길 기다렸다가 공주를 암살한 것은, 우리보다 해루국에 암살 소식을 더 빨리 전하게 할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쯤 해루국에서는 우리와의 전쟁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채경: (신 보는) 신: 생각하기도 싫고, 상상하기는 더 싫은 말들.. 요즘엔 온통 그런 말밖에 못 듣고 사는 것 같아. “최악의 상황은 해루국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전령의 얘기로는, 자객들이 해루국 사신단들을 거의 전멸시키고, 우리 쪽 병사들도 대부분 죽였다고 했습니다. 하면, 희연 공주의 악행이, 미유왕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채경: (신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희빈마마가 거하던 가옥은 완전히 불타서 소실되었다 합니다. 촌락 일가족 살인 사건과 거지촌 몰살 때와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가옥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단칼에 죽임을 당했구요.. 헌데.. 인근 마을에서는 희빈마마를 죽인 사람이 폐하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합니다.” 신: 이해하려 해도.. 용납하려 해도.. 나란 인간이 갖고 있는 그릇의 크기가 크지 않으니, 참기가 힘들어. 채경: (다른 한 손으로는 신의 어깨를 토닥토닥 해 준다.) 신: 수용량을 넘어서 철철 넘치는 짜증과 분노.. 그것들이 나란 인간을 잠식하고 있어. 이렇게 가다간.. 얼마 못 가서 미친 놈 소리 듣게 될 것 같아. 아니, 그 전에 미칠 것 같아. “전방위적으로 왕실과 폐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규모가 큰 조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폐하.. 어찌 해야 할까요? 이연님을 기다리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신: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다 괜찮다고, 나만 믿고 기다리라고 하고 싶었는데..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는 거잖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채경: .. “하부 병력은 충분할지 모르나, 정예병들의 분산이 걱정스럽습니다. 정예병들이 이대로 뿔뿔이 흩어지면, 궁의 안위를 지키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 그대 아니면.. 아무한테도 이런 약한 소리 못하니까.. 그러니까, 나 좀 봐 주라. 채경: ‘폐하..’ “폐하! 이렇게 물밑 작업으로 놈들을 척결하는 건 시간 낭비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위국령을 선포하고, 역도 무리를 소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더는 숨겨선 안 됩니다. 전면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폐하!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폐하!” “폐하!” “폐하!” “폐하!” 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들을 떨쳐내려 한다. 그 소리에 파묻히기 싫어 이곳으로 날아온 건데..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해서 맴도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답답하다.) 채경: (신이 안쓰러워 몸을 숙여 그를 더 깊이 안아 준다. 두 팔로 어깨를 감싸고, 턱을 그의 정수리에 괸다. 신을 끌어 안아 올리며 가슴으로 안는다.) 신: (머릿속을 맴돌던 말들이, 익숙하고 고운 향에 밀려 멀어지고 있었다. 듣기 싫은 말들이, 그에게 답을 요구하던 질문들이 점점 채경의 향기에 밀려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자.. 마음의 긴장이 서서히 풀려 나가기 시작한다.) 채경: (신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다.) 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애쓰는 아내의 행동에, 그나마 입가에 약한 미소가 걸리게 된다.) 채경: (신의 어깨를 조용히, 그러나 부드럽게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드시면.. 잠시 모든 짐을 내려 놓으세요. 신: .. 채경: 그때처럼.. 기력을 완전히 잃고 기절하셨던 그때처럼.. 나를 온전히 믿고 내 앞에서 모든 걸 내려 놓아 보세요. 하룻밤 정도 폐하께서 근심을 내려 놓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머리를 비우고 잠시 털어 버리세요.. 신: ‘그래도 될까?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큰일이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는 상황에서.. 머리를 비워도 될까? 왕이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도 될까..? 그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내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채경: 한숨 자고 나면 좀 더 편안해질 거예요. 신: ‘자는 동안 달라질 게 전혀 없는데도..? 어차피 내가 해결해야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 자고 나면 괜찮아질까..?’ 채경: 사람이 쉬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하면 몸뿐만 아니라 머리도 이상해져요. 그러니까.. 잠시 머리도.. 몸도.. 쉬어 줘요.. 신: ‘나도 그러고 싶어.. 심신을 쉬어 주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쉬어선 안 돼. 쉬어야 할 시간이 아니야..’ 채경: 이대로 자는 거예요.. 푹.. 자는 거예요. 신: ‘그냥.. 잘까..? 자도.. 될까?’ 채경: 그리고 내일 해가 뜨면 다시 시작해요. 신: ‘내일.. 시작해도.. 될……….까..?’ 채경: 그래도 늦지 않을 거예요. 신: ‘늦지.. 않……………..겠………………….지..?’ 채경: (더 말하려다가 신의 옅은 숨소리가 들리자, 말을 삼킨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신이 잠이 든 것인지를 살핀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자, 신이 잠들었음을 확신한다.) 처음 이 방을 찾았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신의 기색에,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채경. 하지만.. 편히 잠든 신을 보며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모든 걸 어깨에 짊어진 신이 안쓰러웠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천자(天子)로 추앙 받는 그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너무도 컸다. 하늘을 떠받치는 것만큼 무겁고 큰 책임이었다. 운우국 만백성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두들 그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가.. 짓눌리고 있었다. 채경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게 천자의 삶이었다.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나, 누구보다 고귀한 혈통으로 숭상 받고 있으나, 그 대가로 임금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잴 수도 없을 만큼 무겁고 또 무거웠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선(先)인지, 늘 선택하고 판단해야 하는 자리.. 그의 선택과 판단에 따라 수백,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자리.. 늘 공명정대하고 청렴결백 하여야 하는, 인간이 아닌 신의 권능을 요하는 자리.. 그래서 이름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 아닌, 왕이라는 자체로 상징이 되어야 하는 자리.. 곁에 있지 않았다면 채경 역시 평생 폐하는 그저 폐하로, 임금님으로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분이 갖고 있는 고민 같은 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투정 한 마디, 응석 한 자락 내비칠 곳 없는 외로운 자리라는 거.. 아무도 몰래 홀로 힘들어 하고 혼자 이겨내야 하는 자리라는 거.. 그래서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한 자리라는 거..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임금님의 삶 같은 건.. 관심은커녕,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그저, 임금님으로, 운우국이라는 나라처럼 실체가 없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아마.. 폐하의 자리를 노리는 그 자는, 이 자리가 이렇다는 걸 모를 것이다. 모르니 이 자리를 탐하고, 이 자리를 갖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일 것이다. 무엇이 그리 욕심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그에게 양보할 수는 없다. 힘든 그 자리.. 내어 놓고 행복하게 살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폐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는 폐하의 것이었다. 폐하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사람들이야 몰라서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폐하는 훌륭한 왕이었다. 사리사욕을 채우고, 공명정대함 대신 편파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폐하의 자리를 탐하는 그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정치에 대해선 무지에 가까운 그녀의 눈에도, 그 자가 벌이고 있는 일들은 선하지가 않았다. 악(惡)으로 시작한 대업이, 선(善)으로 귀결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에게 이 운우국을.. 이 풍요로운 땅을.. 선량한 백성들을 넘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폐하가 힘을 내셨으면 좋겠다. 폐하를 믿고 있지만, 그녀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고 싶었다. 당장은 이렇게 잠자리를 돌봐 드리는 것밖에 도울 수 있는 게 없지만, 이런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최선을 다해 해 드리고 싶었다. 채경: ‘나쁜 놈한테 지지 마세요.. 운우국을 해하려는 자.. 백성들의 피를 부르는 자.. 꼭 잡아서 죄값을 치르게 해 주세요..’ #2. 정토산 왕의 호위대가 도성 외곽의 야산을 정찰 중이라는 첩보에 따라, 정토산 비밀 움막 주변은 결계를 더더욱 강화해 외부 차단을 감행했다. 그래서 출입패를 갖지 않은 자는 출입 자체가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몇 번의 실랑이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움막에 모인 사람들은, 숨쉴 틈 없이 돌아가는 정세 때문에 약간씩은 긴장한 상태였다. 그들의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왕좌에 앉아 있는 현왕(現王)의 능력이 남다르다 보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 구는 것처럼 보이지만, 왕을 보필하고 있는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왕이 얼마나 영민하고,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바로 눈앞에서 목도한 것만 해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였고, 일단 한번 봤다 하면 그 힘과 지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데도, 불안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지금.. 저 위에 앉아 있는 자도 대단하긴 하나, 그래서 이 길을 선택하긴 했으나, 직접적으로 왕을 상대하게 됐을 때.. 왕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왕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 때문에 왕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왕과 싸우지 않고, 다른 것들을 동원해 왕의 전력을 소모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해루국의 참전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다. 해루국이 전쟁을 선포해 주기만 한다면, 일은 굉장히 쉬워진다. 해루국이 운우국의 상대가 안 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지만, 타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 왕은 왕권 강화에만 매진할 수가 없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력을 분산시켜야 하고, 궁을 비워야 할 수도 있다. 약소국과의 전쟁이라도 전쟁은 전쟁이라서, 전력 손실을 막을 수가 없다. 내분과 전쟁.. 양쪽에서 왕을 압박한다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희연 공주의 중전 암살 시도를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다. 희연 공주가 성공하면 당장은 중전을 잃어 시국이 뒤숭숭해질 수 있고, 후에 희연 공주가 암살의 배후에 있다는 게 밝혀지면 운우국이 먼저 해루국에게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원하는 바를 얻는 건 그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반대 상황이기 때문에, 해루국이 운우국에게 반감을 갖게 해야 했다. 타국의 정치 틈새를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힘들 거라 예상했지만, 하늘은 그들의 대업에 동참해 줄 모양이었다. 왕이, 희연 공주를 살려 준 것이다. 왕이 희연 공주를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건, 그들에겐 천운(天運)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면, 암살자를 처단한 것으로 마땅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살려 준다 하고 고국으로 돌려 보내는 과정에서 뒤늦게 살해 당한다면..? 이후의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해루국의 입장과 선택도 달라질 수 있었다. 더군다나 희연 공주는 해루국이 사랑해 마지 않는 공주였고, 왕에게도 그러한 딸이었다. 그들은.. 적절한 시기에 희연 공주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공주는 그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줬다. 이신에게 복수할 마지막 기회라는 말에, 희연 공주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허락했다. 그렇게 그들의 합작품은 탄생했고, 해루국은 현재 비상 시국에 돌입했다 했다. 과연.. 해루국이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지.. 기대감이 마구마구 상승 중이었다. 더불어 희빈의 죽음은.. 뜻하지 않은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거지촌 몰살 계획을 수행하러 철거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희빈이 유폐되어 있는 가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희빈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유폐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관심 갖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건 땅을 짚고 헤엄을 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 왕실에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말에, 그녀 역시 오래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계획에 동참해 주었다. 왕에게 쫓겨난 희빈이 거지촌 몰살 때와 같은 방식으로 죽고 나자,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왕이 죽였을 거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렇게 임금은 백성들 사이에 잔인하고 흉악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전파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잘 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우선 병부에 잡혀 있는 일당들과, 도성으로 오고 있는 이연, 완벽하게 차단되고 있는 궁벽.. 모두가 만만치 않은 위협 요소였다. “대감들까지 모두 부른 것은 상의 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남자 보는)” “들어서 아시겠지만, 현재 병부에 우리 아이들 셋이 잡혀 있습니다.” “..” “아직까지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지만, 곧 침묵으로 버틸 수 없을 때가 올 것입니다.” “..” “예.. 이제 곧 도성에 이연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약간 술렁이는)” “막으려고 아이들을 보냈으나, 이미 이연은 빼돌려진 이후였습니다.” “그럼.. 놓쳤단 말인가?” “예.. 명운산 암자로 갔으나, 다른 길로 샜는지 이연은 잡지 못했습니다.” “시한은 얼마나 남은 겐가?” “길면 사흘.. 이르면..” ‘이르면..?’ “내일 도성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 “임금이 어디로 이연을 빼돌렸는지는 모르나, 기존에 알려진 길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막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지요.” “어떻게 막을 생각인가? 대책은 있겠지?” “(사람들 보는)” “(남자의 시선에 입을 다무는)” “그렇게 다그치지 마십시오.” “(숨 삼키는)” “대감들께서 이번 일을 위해 자금을 대신 것은 부정하지 않겠으나, 여기까지 일을 진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저와 사량의 부하들이었습니다. 헌데 일이 터졌다고 다그치기만 해서야 발로 움직이는 사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 “궁 안에서 접근하자는 제 의견을 묵살한 것은 대감들이었습니다. 무에 그리 아까운 목숨이라고 그리 벌벌 떨며 지키려 하는 것입니까? 대감들이 목숨을 아끼다가 일이 어떻게 됐는지 한번 보십시오! 이연은 도성 코앞까지 닥쳤고, 밖에선 궁 안으로 들어갈 길이 완전히 막혔습니다. 그 아이들을 죽일 수도 살려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동안의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침 삼키는)” “(후……….) 어쨌든 일이 이 지경까지 오는 데 대감들이 한몫 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건 차후에 따지도록 하지요.. 당장은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흠흠..”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 “우리가 노출되는 위험이 있더라도, 이연이 도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마다 매복해 있어야겠습니다.” “(남자 보는)” “그리고..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본거지를 옮길 생각입니다.” “??!!” “마지막으로..” “(남자 보는)” “궁으로 쳐들어가지 못한다면.. 임금이 밖으로 나오게 할 겁니다.” “???” “행동 개시는 곧 시작될 것이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십시오.” “..” “그럼 무사히 돌아가십시오. 절대.. 들키지 마시구요..” 남자의 마지막 발언을 끝으로, 긴장과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나 둘 움막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움막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가고 난 후, 남자와 사량 이 둘만 남게 되었다. 뭔가 할 말이 남은 것 같아 사량은 나가지 않고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다려도 말씀이 없으셨다. 자신이 의중을 잘못 파악한 건가 싶어 상석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는데.. 그때 마침 둘의 눈이 마주친다. “말씀이 남으신 게 아닙니까?” “어찌 알았느냐?” “대군을 뫼신 지 어언 5년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정도 눈치는 되옵니다.” “(피식) 내 속내를 들킬 이는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이 싫으시면 앞으로 더는 아는 척하지 않겠습니다.” “아니다.. 너 하나 정도는 내 맘을 알아도 나쁠 것 없겠지..” “(남자 보는)” “이 세상에 나서 내가 진정 어떤 이였는지 알아 줄 이가 있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어찌 그런 약한 소릴 하십니까? 이제 곧 세상이 대군의 존재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역도로 몰려 죽든.. 반역이 성공해 새로운 역사를 쓰든.. 그래, 세상이 나를 알아 줄 날이 곧 오겠지..” ‘왜 자꾸 약한 소릴 하십니까?’ “어찌됐든 저 자들은 정리를 좀 해야겠다..” “???”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금껏 자금을 대 준 건 고마운 일이나, 끝까지 같이 가긴 힘들 것 같구나..” “!!! 허면..?” “거사가 있기 전에 정리 좀 하고, 그 후엔 모조리 쓸어 버려야겠어.” “저 자들 없이 거사를 성공시키긴 어려울 것입니다.” “어차피 이연을 못 막으면, 저들은 노출될 수밖에 없어. 살려 두기엔 위험해.” “이연님과 대신들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알기로, 이연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기억을 본다고 들었다.. 그 사람이 머릿속에 갖고 있는 기억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하더군.. 만약 잡혀 있는 녀석들 중 대신과 마주친 적이 있다면 녀석의 기억을 보는 순간, 이연은 우리와 관련된 조정 대신들을 알게 될 거야. 그 전에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난, 저 자들을 버릴 생각이다.” “(남자 보는)” “어차피 대업을 이루고 나면,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며, 내 발목을 잡을 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끌려 다니려고 왕이 되려는 게 아니다. 그러니 그런 싹은 미리 잘라내는 게 나아..” “..” “넌, 이연보다 본거지 이동에 주력해라.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예..” “마지막으로 애들 입단속 철저히 시키고..” “예..” “해루국과 “예..” “그럼 물러가라. 오늘도 밤이 늦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인사하고 물러나는 사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밤하늘로 시선을 옮긴다. 몇 시진 전, 유성(流星) 두 개가 떨어졌다. 궁에 있는 임금은 그걸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까? 떨어진 별 두 개.. 그와 동시에 전달된 두 개의 비보(悲報).. 그 둘을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제 곧 세상이 대군의 존재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자를 대면하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문이 아닌, 실체로 만나게 될 그 자는 어떨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아주 어릴 적 멀리서 봤던 그는, 감히 쳐다봐서도 안 되는 태자 저하였다. 비루한 자신의 처지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던 하늘 위의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곧 그자와 같은 높이로 올라갈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를 자신이 있던 곳으로 끌어 내릴 것이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것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실패..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그는, 나를 상대해야 될 것이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그 순간을 위해, 오늘도 숨을 고른다. 그 최고의 순간을 위해, 모든 걸 미뤄 둘 것이다. 그 자와 대면했을 때, 난, 최고의 모습으로 만날 것이다.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3. 사신단 천막 종혁(호위대 부대장):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우현: (서찰을 살피다가 고개를 든다.) 부대장은 왜 아직도 안 잔 겐가? 종혁: 물을 마시려고 깼다가 아직 불이 켜져 있어서 한번 와 봤습니다. 우현: 하루 종일 보초 서느라 힘들었을 텐데, 밤에는 좀 편히 자지 않고~ 종혁: 도중에 한번 깨면 다시 못 자는 성격이라.. (머리 긁적이다가) 헌데..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닙니까? 우현: (고개 내저으며) 아니네.. 나도 그만 접을까 하던 참이었다네.. 종혁: (자신을 위해 일부러 자리를 정리하는 좌상 대감의 배려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서찰을 정리하는 걸 미약하나마 도와준다.) 우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 앉으며) 차라도 한 잔 하겠는가? 종혁: 아닙니다. 차를 마시면 잠을 잘 못 잡니다. 우현: 무장치곤 예민한 편이로군. 종혁: 예.. 그 때문에 무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릴 많이 듣습니다. 우현: (수줍게 웃는 종혁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참으로 앳된 얼굴의 무장이었다.) 자네는 올해 몇인가? 종혁: (처음엔 무슨 질문인가 했다가 자신의 나이를 묻는다는 걸 알아채고는 빙그레 웃는다.) 보기보다 많습니다. 우현: ??? 종혁: 또래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은 종종 듣습니다만,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류대장님보다 한 살이 많은걸요.. 우현: !! 류대장보다 나이가 많다고? 종혁: 예.. 무과 시험에 류대장님보다 늦게 통과했습니다. 그래도 제 동기들 중에선 제가 제일 승진이 빠른 편입니다. 우현: (종혁의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한 걸 보고 피식 웃는다. 젊다는 게 여기서 표가 난다. 그리고 그가 나이가 들었다는 게 여기서 티가 난다. 저런 종혁의 모습이 마냥 귀엽게 보이는 걸 보면, 그가 나이 들었다는 증거였다.) 종혁: (우현의 웃음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너무 오만방자해 보였나 싶어 살짝 긴장한다.) 우현: 류대장 대신 갑자기 차출되어 짧은 시간에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지? 종혁: (우현 보는.. 긴장해 있다가, 우현이 따뜻하게 걱정 어린 말을 건네 주자 살짝 어리둥절해하는..) 우현: 헌데,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빨리 지치진 않을까 걱정이라네.. 종혁: 괜찮습니다. 우현: 보는 사람이 불편하면 그건 괜찮지 않은 거라네.. 종혁: (우현 보는) 우현: 그렇다고 적당히 하라는 말은 아니네. 그저..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신단을 책임지고 있는 무관으로서 불합격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네.. 그러니, 벌써부터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종혁: 걱정을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우현: 나한테 미안해 할 것 없네.. 난, 이번 사신단에서 잔소리를 하려고 차출된 사람이니까.. 오히려 내 잔소리를 귀찮아 하지 않고, 흘려 듣지 않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입장이라네.. 종혁: (피식 웃는) 우현: ^^ 종혁: 헌데, 대감께 알리지 못한 사항이 있습니다. 실은.. 그 얘기를 하려고 대감을 찾았습니다.. 우현: ??? 종혁: 오늘밤에 정찰을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길, 경로를 변경해야 할 일이 생겼더군요. 우현: 그게 무슨 소린가? 종혁: 지도를 갖고 계시죠? 우현: (고개 끄덕이며 좀 전에 접었던 서찰 중에서 지도를 찾아 펼쳐 본다.) 종혁: (지도를 유심히 보다가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저희가 지금 있는 곳이 여기입니다. 우현: (종혁이 가리키는 지점을 본다. 표시를 해 두었기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행차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어, 예정보다 더 멀리까지 온 상황이었다. 이런 여정에선 늘 돌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르든 빠르든 진행 상황이 어찌 되든간에 거의 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빨리 가게 됐다고 해서 예정했던 일정과 맞추려고 속도를 늦추진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종혁이 돌발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고 얘기를 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행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들어본 후에 판단해야 할 것 같다.) 종혁: 내일은 이 길을 따라 해금강을 건널 예정이었습니다. 우현: 헌데..? 종혁: 며칠 전에 큰 비가 와서 해금강의 수위가 무척 높아진 상황이라더군요. 그리고 그때 불어난 수위 때문에 해금강에 놓인 다리가 끊어졌다고 합니다. 우현: 다리가 끊어져? 종혁: 예.. 현재 통행이 금지되고 있다 합니다. 우현: (낭패로군..) 전혀 다리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던가? 종혁: 개개인이 조심스럽게 건너는 건 어느 정도 허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저희 같은 대규모 인력이 한꺼번에 건너는 건 허락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현: 그 얘길 왜 지금에서야 하는가? 종혁: 보고를 듣고 바로 대감의 천막으로 왔으나, 불이 꺼져 있어서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해서, 내일 날이 밝자 마자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다시 깨어나서 보니 마침 불이 켜져 있길래.. 우현: (피곤한 탓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막상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서 지금까지 깨 있었던 걸 되돌아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다음부턴 이렇게 중요한 일은 바로바로 알려 주게나. 종혁: 예.. 송구합니다. 우현: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닌데..) 그래, 그럼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해 보세.. 종혁: 일단은 날이 밝는 대로 제가 직접 보고 올 생각입니다. 우현: 자네가 본다고 달라질 건 없지 않은가? 종혁: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 다리를 보수하고 있다곤 하나, 내일 당장 끝날 일은 아니니까요.. 우현: 배로 건널 순 없겠는가? 종혁: 배로 건널 순 있지만, 지금으로선 해금강 상태가 좋질 않습니다. 또한, 이 인력이 배로 이동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닐 듯하구요.. 우현: 수위야 하루 만에도 쉬이 내려가는 게 강 아닌가? 내일 하루 정도 강 상태를 보면서, 큰 배를 구해 보는 건 어떻겠는가? 어차피 배를 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텐데, 시간을 벌 수 있잖겠는가? 종혁: 그건 그렇지만.. 배를 구하든, 강이 안정되길 기다리든 하루를 허비할 거라면, 다른 길을 찾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현: 다른 길..? 종혁: 예.. 지금으로선 쉬지 않아도 되고, 제일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우현: 그게 어딘데? 종혁: (지도를 가리키며) 여기.. 해금강이 발원하는 금산을 거쳐 북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현: 금산..? 종혁: 예.. (지도 위에서 방향을 가리키며) 우리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꺾어 들면 바로 금산이 나옵니다. 금산을 넘으면 해동시(다음 목적지)가 바로 나오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 가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현: 금산의 지형은 어떤가? 종혁: 정찰을 해 봐야 알겠지만, 산세가 험한 곳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인근 백성들이 뗄감을 얻으러 쉬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하니, 들짐승이 많은 것도 아닌 것 같구요.. 안전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우현: 그럼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정찰조를 보내 금산의 지형을 파악하라 이르게. 종혁: 예.. 우현: 아,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종혁: 말씀 하십시오. 우현: 혹, 금산으로 들어가게 되면, 산에서 얼마나 묵어야 하는 겐가? 종혁: 하룻밤은 묵어야 할 듯합니다.. 지도에 표시된 것으로 짐작컨데, 이틀이면 충분히 산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우현: (고개 끄덕이며)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런 길이 초행인 문관들이 많아, 산에서 여러 날 묵는 건 되도록이면 피했으면 싶어서.. 종혁: 최선을 다해 지름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우현: 무리하지 말라고 해놓고, 고생길로 보내 버리는군.. 종혁: 아닙니다. 대감을 수행할 수 있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우현: (종혁 보는) 종혁: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감께선 갑자기 차출되어 고생이 많겠다 하시지만, 저희 식구들과 동료들 모두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았다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우현: .. 종혁: 무영국과의 첫 교역이라는 역사적 사명도 사명이지만, 개인적으로 대감의 마지막 업무에 동참하게 된 것 또한 영광입니다. 해서, 도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사신단을 보호할 것입니다. 대감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별탈 없이 모시는 게 제 목표입니다. 우현: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무리할 수밖에.. 종혁: 예?? 우현: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모자란 만 못한 법이라는 거.. 잊지 말게.. 종혁: (우현 보는) 우현: (그래도 저리 충심을 다해 일해 주는 젊은이가 있어 기분이 좋긴 하다.) 이만 가서 자게나~ 우릴 지키려면 자네부터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잘 자야지.. 종혁: 저를 쫓아 보내고 싶으신가 보군요. 우현: (피식) 나는 늙은이라네.. 자네처럼 젊지 않아서 내일 산을 넘으려면 체력을 비축해 둬야 한다네.. 종혁: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 드리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우현: (고개 끄덕이며 잘 가라고 한다.) 종혁: (깍듯하게 인사 올리고 천막을 나간다.) 우현: (종혁이 나가고, 잠시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다. 예정하지 못했던 일정 변경이 맘에 걸리긴 하나,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말자고 곧바로 마음을 고쳐 먹는다. 그리고 종혁에게 말했던 것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인식한다. 지금 자지 않으면 내일 쓰러질지도 모른다. 잘 쉬어야지 쓰러지지 않고 임무를 마칠 때까지 버틸 수 있다. 모두의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나이 많은 늙은이로 짐이 되지 않으려면 잘 쉬어야 했다. 그래서 머릿속을 떠도는 수만 가지 생각들을 접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 밤엔, 무영국과 더 가까워져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눈을 감는다.) #4. 양반촌 일각 축시(丑時, 도성 내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양반가 저택의 안채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 곧이어 긴 그림자 하나가 방 앞에 나타나는가 싶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불 켜진 안채로 들어서며 사라졌다. 불빛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사내 둘은 몸을 숙여 은밀한 대화를 시작하는데.. “가셨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상황이 무척 안 좋다는 것만 알고 왔다.” “어떻게 안 좋은데요?” “이연을 막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들었다.” “예?!! 허면..?” “시작도 하기 전에 임금한테 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어떡합니까? 임금 성격에 6년 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래..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소자가 말리지 않았습니까? 임금을 몰아내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구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왕(現王)은 우리 가문을 신뢰하지 않아. 내 대(代)에선 그럭저럭 버티겠다만, 네가 가문을 물려받았을 땐 장담할 수가 없다. 이 가문을 우리가 끝장낼 순 없지 않느냐? 어떻게 일으켜 세운 가문인데..!” “아버지와 제가 폐하께 충심을 보이면..” “아니! 왕은 결코 우릴 받아들이지 않을 게다.. 우린, 그걸 왕도 알고 있어. 그래서 우린, 절대로 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그러니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썩은 동앗줄을 잡은 거라면요..?” “그렇게 비관적인 건 아니다.. 난, 그 자의 능력을 실제로 봤다구..” “눈속임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떻게 하는데요?” “한 두 번 본 게 아니니까..” “..” “촌락 일가족 살인 때도, 거지촌 몰살 때도, 그저께 희빈마마 사건 때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장담컨데, 눈속임 같은 건 없었어. 그 자는 분명 왕의 재목을 타고난 이야.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지. 둘 중 하나만이 태양이 될 수 있다면, 현왕(現王)이 물러나는 방법도 있는 거야. 그리고.. 난 거기에 걸었다..” “이연님을 못 막더라도 승산은 있는 겁니까?” “반반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반반은 됩니까?” “응.. 이연을 막지 못하면 낭패이긴 하나, 이미 일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으니까.. 또 해루국이 어떻게 나올지도 관건이야. 그들이 움직여 준다면, 왕도 어쩔 도리가 없어. 아무래도 내우(內憂)보단 외환(外患)을 막아야지 않겠느냐?” “해루국이 안 움직이면요?” “우리 쪽 사람이 사신단에 끼어 들어가 있으니, 미유왕을 흔들 수 있을 거야. 거기에 희망을 걸어봐야지.” “그래도 안 되면요?” “글쎄.. 병부의 반발로 시선을 돌려야지..” “병부..요?” “그래.. 병부에서도 움직임이 곧 시작될 거야. “(침 삼키는)” “(히죽 웃는)” 남자들의 은밀한 대화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갈 무렵, 바깥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채 어머니 방에서 잠을 청하던 여자아이가, 자기 전에 마신 식혜 때문에 뒷간을 찾아나선 것이다. 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여자아이, 매서운 밤바람에 잠이 확 깬다. 지이: (에취~ 기침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뒷간을 찾아 빠르게 걸어간다.) #5. 다음 날 채경: 궁 밖으로 나가는 건.. 당분간 안 되는 거죠? 신: (국물을 떠서 먹으려다가 멈칫.. 그리고는 그 자세 그대로 눈만 들어 채경 보는..) 잠시 눈을 붙이겠다던 계획과 달리, 신은 아침이 될 때까지 푹 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침 수라를 함께 들고 싶다며 교태전에 눌러앉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신과 채경의 수랏상을 준비하느라 소주방이 난리가 났다. 그 소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며칠 만에 함께 식사를 하게 됐고, 시끄러운 바깥 사정 따위 잠시 잊고 소박하고 편안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채경의 뜬금 없는 말은, 이완됐던 신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연한 걸 묻는 채경의 질문이 의아했다. 뻔히 알면서 묻는 저의가 궁금했다. 신: (수저를 내려놓으며) 왜? 밖에 나갈 일 있어? 채경: 그게.. 신: ??? 채경: (머뭇거리다가) 제가 아니라.. 대비마마께서 온천장에 가고 싶어 하세요.. 신: 온천장..? 채경: 예.. 신: (그러고 보니 할마마마는 찬바람이 불기만 하면 온천장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분이었다. 누구보다 온천을 즐기는 분인데, 지금 형국이 이 모양이다 보니 온천장이라는 말을 입 밖에도 못 꺼내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채경의 입을 빌어, 그게 아니면 채경이 할마마마의 의중을 미리 파악해서, 그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것 같다. 앞뒤 따져 보면 아주 이상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지금 상황에선 적절하지 못한 질문임엔 틀림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해 줄 수 있는 답변도 정해져 있었다.) 어젯밤에도 얘기했지만, 나와 함께 나가는 게 아니라면 그 누구도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채경: (어깨 늘어뜨리는.. 어젯밤, 폐하께서 심해루에 데리고 나가 주신 걸 생각하고 혹시나 하고 여쭤 본 것인데.. 역시나 폐하와 동행하지 않고서는 궁 밖 외출은 불가능할 것 같다.) 신: (잔뜩 실망한 채경 보며 덩달아 기분이 안 좋아진다.) 상황이.. 어떤지 알잖아. 채경: 예.. 알아요.. 신: ………………………………….할마마마가.. 여쭤 보랬어? 채경: 아니오.. 말씀은 안 하시는데, 눈치가 그러셔서요.. 신: 효부 노릇 할 수 있었는데.. 나 때문에 못 하게 생겼네~ (일부러 농을 건다.) 채경: (피식) 다른 걸로 효부 흉내 낼 수 있어요. 신: 흉내만 내는 거야? 채경: ………………아직은요.. 효부라고 하기엔.. 부족한 게 많잖아요. 신: 그대가 어때서? 아주 잘 하고 있는데.. 채경: 폐하가 맨날 사고 친다고 혼내시잖아요. 신: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채경: 사고 친다는 건, 걱정을 끼친다는 뜻이잖아요. 걱정을 끼치는 건 효(孝)랑은 거리가 멀구요.. 신: ……………얘기가.. 그렇게 되나? 채경: 예.. 그래서 저는 효부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신: 사고 안 치는 게 효부의 전제 조건이라면.. 평생 불가능할 것 같은데.. 채경: 예??!! 신: ^^ 채경: (눈 흘기는.. 사람을 밤새 그렇게 걱정 시켜 놓고, 또 저렇게 아침엔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람을 놀리는 것 좀 봐! 사고는 누가 치는 줄 모르겠네!) 신: (다시 수저를 놀리며) 온천장은.. 기회 봐서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전해 줘. 채경: (신 보는) 신: (음식을 들며) 사건이 일단락 되는 덴 시일이 걸릴 거야. 그때까지 마냥 기다리게 하는 건.. 나도 맘에 걸려. 그러니 적당한 때에 동행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 전해 줘. 채경: …………………그래도.. 돼요? 신: 까짓 하루 온천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어? 채경: .. 신: 그대 말대로 한숨 자고 났더니,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을 그냥 보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머리가 개운해졌으니까 그걸로 됐어. 채경: (그리 생각해 주시니 발목 잡은 보람이 있네요..) 신: 오늘은 뭐 할 거야? 채경: 음.. 오전엔 올해 걷어 들인 곡식들 셈 해서, 굶고 있는 백성들에게 나눠 줄 방법을 상의하기로 했어요. 그거 끝나고 나면 시문(詩文) 훈육 받을 거구요.. 그게 또 끝나고 나면, 대비마마와 차를 마실 계획이에요. 신: 훈육은 여전히 받는구나? 채경: 네~ (조금 비굴한 얼굴로) 혹.. 저 훈육 그만 받으라고 명(命)해 주시면 안 돼요? 신: 뭐?? (채경의 시문 선생을 떠올리며 살짝 기분이 이상해져 있었는데, 채경이 저런 말을 하자 어이가 없다. 순식간에 투기는 내려앉고, 기가 찬다는 표정만 얼굴에 드러난다.) 채경: 그게요~~ 할 일은 계속 많아지는데, 훈육 하는 데 할애할 시간이 좀 아까워서요.. 신: 배워서 남 줘? 채경: (인상 흐려지는) ‘그건 우리 어머니가 맨날 하던 말인데..’ 신: 역사서에 무식한 왕비로 기록되고 싶어? 채경: 폐하!! (제 교양이 무식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신: 그나마 지금이니까 훈육할 시간도 있는 거야. 할마마마가 완전히 내명부에서 손 떼고 나면, 잠잘 시간도 모자랄걸? 그땐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워~ 그러니까 배울 수 있을 때 바짝 배워. 배운 건 절대 어디 안 가니까.. (어림 없다는 말투다.) 채경: (본전도 못 찾았다. 결국.. 오늘 아침엔 이래저래 소득이 전혀 없었다.) 신: 할마마마랑 언제 차 마실 거야? 채경: (삐딱한 눈빛으로 신 본다. 앙금이 풀리지 않은 상태다.) 그건 왜 물으세요? 신: 나도 같이 마실까 해서.. 채경: (약간 의아하다.) 시간.. 되세요? 신: 시간은.. 내면 되는 거고.. 그보단.. 채경: ??? 신: 할 말이 있어서.. 채경: 할 말이요? 신: 응.. (지금 얘기해 줄 순 없으니까 화제 돌리듯) 대비전에 언제 갈 거야? 채경: (신 보는) #6. 도성 외각 까맣게 탄 목재는 그곳이 얼마 전까지 집이었다는 걸 흔적으로나마 알려 주고 있었다. 흉물스럽게 타 버린 낡은 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타서 사라진 후였다. 그걸 지켜보는 신의 심정은.. 복잡미묘했다. 궁에서 몰아낸 희빈이 어제까지 살았다는 집.. 지금은 까만 잿더미로 변해 버려 형체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작은 집을 바라보며, 화려한 성정의 그녀가 어떻게 이리 작고 낡은 집에서 살 수 있었을까를 생각 중이었다. 벌을 내릴 때도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장에 와서 보니 그녀에게 이보다 더 큰 벌은 없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잔혹하게 죽길 바랬지만.. 이런 걸 바랬던 건 아니었다. 희빈의 목숨은 그가 끊어 주고 싶었다. 그가.. 결단내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 기회를 가로채서는 찜찜하게 끝내 버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사건건 방해하는 그 놈이.. 거슬렸다. 환익: (신에게 다가서며) 폐하.. 신: (돌아보는) 환익: 주변엔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 발자국도.. 없어? 환익: 예.. 눈에 띄는 건 없습니다. 현장엔 관원들 발자국만 보입니다. 신: .. 환익: (사건 현장을 둘러보며) 거지촌과 거의 흡사하군요. 신: (환익에게 보고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불에 태웠다가 물을 뿌려 껐다고 했지? 환익: 예.. 신: 거지촌과 마찬가지로, 물 웅덩이가 패어 있고..? 환익: 예.. 신: (물 웅덩이 쪽으로 움직인다.) 환익: (주변을 살피며 신을 뒤따라 간다.) 신: (깊게 팬 물 웅덩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환익: (신 보는) 신: 최근 도성에 비가 내린 게 언제지? 환익: (잠시 생각하다가) 여드레 전 새벽에 약한 비가 내렸습니다. 신: 큰 비는.. 내린 지 한 달도 더 넘은 거지? 환익: 예.. 최근엔 큰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을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신: (생각에 잠긴다.) 환익: .. 신: 근처에.. 냇가는 어디쯤 있지? 환익: 걸어서 반 식경(食頃) 정도 가야 합니다. 신: 헌데.. 발자국이 없다..? 환익: 흔적을 남기지 않는 녀석들입니다. 당연히 발자국을 지웠겠지요.. 신: (고개를 내젓는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녀석들이라도 이렇게 깔끔할 순 없어. 환익: ??? 신: 불이야 기름을 가져와서 붙인다 해도, 물은 이 근처에서 공수했을 거야. 헌데.. 주변에 발자국이 전혀 없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 날아서.. 옮겼다면 모를까..? 환익: 그들 대부분 무공이 뛰어난 자들이지 않습니까? 허면 날아서 물을 공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 (고개 내젓는다.) 아니.. 그러기엔 너무 번거로워. 그리고 아무리 물을 많이 길어서 붓는다 해도, 저렇게 웅덩이가 만들어지진 못해. 환익: 허면..? 신: (불 탄 집 바라보는) 환익: (신 보는) 신: …………………………………아무래도.. 그 자.. 환익: ??? 신: …………………………………구름과 비를 다룰 수 있는 것 같다.. 환익: ??!!!!!!!!!!!!!!!! 구름과 비를 다룰 수 있는 건.. 왕족 중에서도 다음 대를 이을 왕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궁극의 비기(祕技)였다. 그렇다면..?!!!!! 환익: 폐……..하..!!!!!
신: (비죽 웃으며)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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