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몸이 너무 아픕니다.. 어제 오늘 이삿짐 싸고 풀고 하느라 사투를 벌였더니, 온몸이 아파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여러분에게 해명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뒤로 하고 소설만 올려 두고 갑니다. 늘 그렇듯 새로운 소설 초반은 늘 기대와 설렘으로 마구 달리는 습성 때문에 열심히 달렸는데요, 신이랑 채경이가 서서히 마주 볼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시점까지 오니 서서히 속도가 느려지네요. 우선은 노가다로 완전히 넉다운 된 몸부터 수습하고, 다음을 생각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 쏭기자랑 함께 달려 주셔서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달려 주세요~ 그럼.. 주말 잘 보내시구요.. 오늘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__) ########################################################################################
채경이 바닷가 마을에 처음 온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 오는 봄이었다. 시간이 없었던 채경은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고아원 부지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떠났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결정을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도, 강현이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어머니에겐 그 사람이 힘든 사정을 듣고 선뜻 도와주겠다고 거짓말.. 했다. 강현이에겐 지난 화요일 저녁에 아무렇지 않게 밥 먹고 영화 본 게 마지막.. 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겐.. 떠나기 전날 밤을 함께 하며, 혼자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다. 평소 잘 자지 못하는 그가 자신의 품에서 곤히 잠들었을 때, 조용히 일어난 채경은 잠든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밤을 새웠다. 다시는 품에 안아 보지 못할, 다시는 만나선 안 되는, 평생 잊지 못할 내 사람.. 자기보다 훨씬 부족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래서 절대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고,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 하지만 그녀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고, 이 예쁜 사람에게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그가 절대로 찾지 못할, 그와는 전혀 상관 없는, 작고 작은 어촌 마을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강원도 구석의 바닷가로 무작정 떠나온 길이었다. 어디든 그와는 상관 없는 시골로 가면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정처 없이 차를 타고, 또 갈아타며 해조리까지 오게 되었다. 아침부터 내내 어둑어둑하던 하늘에서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닷가 부두 끄트머리에 있는 등대에서 비를 맞게 된 채경은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비를 피해 어딘가로 가야겠단 생각도 못했다. 떠나온 이후부턴 특별히 자신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주변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 관심이 없었고, 역겨운 스스로가 벌 받기를 바랬다. 그런데, 이 대단한 몸은 아프지도 않았다. 심장은, 마음은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몸은 너무 멀쩡했다. 그래서 아픈 이별을 한 사람들이 한번쯤 겪는다는 열병도 앓지 않은 채경이었다. 어쩜 이럴 수가 있는지.. 아프지 않는 자신이 더 역겨워 채경은 스스로를 저주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봄비치고는 제법 많이 내리는 이 비를 맞고 몸살이라도 크게 나기를 바랬다. 그렇게 한참을 온몸으로 비를 맞고 해가 져서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에야 자리에서 일어난 채경. 낯선 곳, 어둑한 거리, 빗소리 때문에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인적 하나 없는 휑한 등대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채경은 걸음을 떼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부둣가를 걸어 나왔고, 눈에 보이는 불빛을 찾아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바닷가 조그마한 식당, 혜옥이 혼자 꾸려가는 낡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빗물을 뚝뚝 흘리고 들어서는 낯선 젊은 여자를 보고, 혜옥은 “어서 오ㅅ..” 인사하다가 멈칫 했다. 비 오는 날은 장날이라고들 하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영 들지 않아 문을 여는 소리에 누구든 반갑게 맞으려 했는데.. 누가 봐도 사연 있어 보이는 몰골을 한 젊은 여자가 빗물에 완전히 젖어서 들어서는 걸 보고 남몰래 혀를 찼다. 한 며칠 피죽도 한 그릇 못 얻어 먹고 돌아다닌 면상을 보고 고개까지 저었다. 하지만 젊은 여자는 주인 여자의 걱정 어린 표정은 보지 못하고 문가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리고 아무거나 따뜻한 걸로 달라는 주문을 아주 성의 없이 했다. 이에 유달리 추워 보이는 젊은 여자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차부터 내 주는 혜옥. 그제서야 김이 피어나는 보리차를 보고 정신이 든 듯한 젊은 여자가 혜옥을 처음으로 바라본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렇게 비 맞고 돌아다녀도 되나~?” 채경과 잠깐 눈을 마주치고 나선 곧바로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며 혜옥이 입을 뗀다. 하지만 채경이 뭐라 대꾸해 줄 거라 기대하지 않고 한 말이라 또 자기 할 말만 하는 혜옥. “봄비라고 무시하다가 큰 코 다칠 텐데..” “..” “홀몸도 아니면서 왜 그러고 돌아다녀?” 혜옥은 그저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그래서 ‘탕~’ 하며 물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갑자기 난 소리에 뚝배기를 불에 올리려다가 채경이 앉은 곳으로 도로 시선이 향하는 혜옥. 무슨 일인가 싶었다. 희마리 하나 없어 보이더니 물잔도 들 힘이 없었나 하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이상했다. 내내 무표정하던 여자가 세상이 두 쪽 날 것 같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 해 있는 게 아닌가? 바닥에 물 웅덩이를 만들며 여자의 발 아래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물잔과, 자신이 물잔을 떨어뜨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놀란 젊은 여자. 그리고 그 둘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 하는 혜옥. 이것이 혜옥과 채경의 첫 만남이었다. ****2개월 후 이상하게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팠다. 표현할 순 없지만 찜찜하게 콕콕 쑤시는 느낌도 들고.. 하지만 오늘따라 새벽부터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허리 펼 사이도 없이 바빠 배가 아픈 건 잊어 버리는 채경이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혜옥은 갈 곳 없는 채경을 거둬 주었다. 처음엔 며칠 민박 하다가 나가겠다던 채경도 눌러앉고 말았다. 멍하게 생각만 끝도 없이 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나았다. 그래서 혜옥 혼자 꾸려가는 식당에 나가서 일손을 거들게 되면서, 조금씩 예전의 활기를 찾아가는 채경이었다. 물론 여전히 끔찍한 생각은 채경을 따라다녔지만, 일할 때만큼은,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채경은 그렇게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일어서지 않으면, 주저앉아 버리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마저 가질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채경은 아파서도 안 됐고, 슬픈 생각에 잠겨서도 안 됐다. 좋은 생각, 예쁜 마음만 가져야 했다. 그래야 아이도 슬프지 않게, 아프지 않게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 채경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고, 혜옥을 먼저 집으로 돌려 보낸 후 뒷설거지를 마친 채경. 가게의 남은 불을 모두 끄고 밖으로 나와 자물쇠까지 걸어 잠근다. 그런데.. !!!!!!!!!!!! 갑자기 극심한 복통이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배를 움켜 쥐고 주저앉아 버리게 하는 극심한 통증이었다. 이렇게 아파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허리가 끊길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아래로 뭔가가 빠져나가는 아득한 느낌이 엄습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불길한 예감만은 들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뛰었다. 미칠 듯한 두근거림과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압박해 오는 복통.. 뒤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주저앉은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골을 만들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건.. 붉은 피였다. !!!!!!!!!!!!!!!! 이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채경은 알 수 있었다. 하늘은.. 채경을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 희망을 가질 기회조차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건 당연한 대가일지도 몰랐다. 벌을 받아야 하는 채경이 선물을 받아선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정의이니까.. 그래도.. 그래도.. 희망 하나쯤 안고 살아갈 수 있게 한번만 눈 감아 주시지.. 못된 년이지만 이렇게라도 사죄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시지.. 내가 지은 죄값만큼 철저하게 응징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픈데.. 조금만.. 조금만 불쌍히 여기셔서 숨쉴 구멍 하나쯤 주시지.. 흡.. 터지는 울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놓치게 된 순간, 채경은 정신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와 헤어지고도 오지 않았던 몸의 아픔이 자신을 덮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무너지기 시작한 채경은, 점점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감겨오는 시야 사이로, 태호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09 #. 갓길 결국 차를 갓길에 세우고 만 태호. 자신이 매너 무시하고 던진 질문에, 차 안은 숨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다. 이런 어색한 공기는 거칠고 단순한 뱃사람인 태호가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피해 왔던 건데..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언젠가 꼭 한번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일이었고, 오늘이 그날이라고 확신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있던 자신이 한 발 앞으로 내딛게 될지, 뒤로 물러날지 결정할 순간인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앞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채경의 옆모습을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정말 너무하네요.” 무거운 침묵을 깨고 고맙게도 채경이 먼저 입을 연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태호는 채경의 말을 해석하느라 머리가 바삐 돌아간다. 뭐가 너무하다는 걸까? 자신의 질문이 무례하다는 걸까?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을 건드렸다는 뜻일까? 왠지 질문을 던질 때보다, 채경이 침묵하고 있을 때보다, 말문을 연 지금이 더 긴장되는 것 같다. 채경: 어차피 내 대답이랑 상관 없이 결론 내린 거 아니에요? 태호: .. 채경: 눈치 챘다면.. 그냥 지금까지처럼 모른 척 넘어가 줬으면 좋았을 텐데.. 태호: !!! (그렇단 말은.. 진짜 그 남자가..!!) 채경: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태호씨한테 폐 끼치고 있는 민폐형 인간이지만.. 그래도 건드려 주지 말았으면 하는 부분은 있었어요. 염치 없지만 그래 주길 바랬어요. 태호: .. 채경: 고맙게도 해조리 사람들은 착한 분들이라 절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 주셨어요.. 그래서 계속 그래 주길 바랬어요. 염치도 없고 뻔뻔한 타지 사람이 바라는 것도 많았어요. 태호: 채경씨.. 채경: 태호씨한텐 정말 고마워요. 그때 보건소에 데려가 주지 않았으면 저 큰일날 뻔했잖아요. 태호: .. 채경: 근데.. 참 뻔뻔하게도 당장 깨어났을 땐 왜 살려 놨냐 원망.. 했었어요. 태호: .. 채경: 그땐.. 살 수 없을 줄 알았어요.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어떻게 되든 세상은 아무 상관 안 할 거란 생각에 서럽기도 했어요. 행복하고 즐겁고 힘 나던 순간이 훨씬 많았는데도, 못난 생각에 빠져 있던 때라 세상이 나한테 차갑고 잔인하게 굴던 것만 떠올랐어요. 왜 나한테만 이러냐고.. 고아로 자란 게 뭐 그리 잘못이라고.. 나보다 잘난 사람 좋아한 게 뭔 잘못이라고.. 태호: (채경이 쏟아내는 말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3년 전 유산 했을 때의 심정과,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채경의 속내, 채경이 고아라는 사실, 그리고 채경이 떠나온 이유가 신분 차이로 인한 사랑의 실패 때문이라는 비밀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엄청난 고백에 마음이 휘청댄다.) 채경: 그저.. 마음이 흘러갔을 뿐인데.. 내가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자랐을 뿐인데.. 태호: .. 채경: 마음을 배신하고.. 사랑을 포기하고.. 누군가를 아프게 한 벌을 받는 것으로 내 죄를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내가 아이를 잃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꿈꿨던 모든 것들을 놓고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어요. 태호: .. 채경: 그렇게 책임감으로 살아가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흘러갔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태호: .. 채경: 내가 저지른 실수는.. 아직도 전혀 수습되지 못하고 있었어요. 태호: .. 채경: 난 강하지도 못하고 잘나지도 못해서, 가끔은 힘들다고도 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기도 한데.. 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을 보니까.. 내 잘못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을 보니까.. 엄살도 못 부리겠네요. 아직도 내가 받아야 할 벌은 시작도 안 해서 힘들다고 엄살 부리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태호: (채경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왜 이리 처연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오래도록 마음에만 담아 뒀을 얘기를, 그것도 딱히 편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하고 있는 채경이, 안쓰럽고 미안하다. 저렇게까지 다 쏟아내 달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그저 간단한 확인 정도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던진 승부수였는데.. 결과는 태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태호: 미안해요..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채경: (그제서야 앞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태호를 본다.) 태호: 정말 미안해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채경: (태호의 사과에 살짝 미소 짓는다.) 태호: (채경의 미소에 조금은 용기를 얻어 부러 가볍게) 조금.. 심통이 났었나 봐요. 채경: ??? 태호: 늘 짐작만 해 오던 라이벌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니까 화도 나고.. 초조하기도 하고.. 마음이 좀 그랬어요. 채경: .. 태호: 그래서 죄 없는 채경씨한테 화풀이를 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채경: 아니에요.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이것도 다 제 잘못인걸요.. 태호: 채경씨가 왜요? 채경: 태호씨 마음 다 알면서 모른 척해 온 벌 받는 거 같아요. 태호: ??!! 채경: 나.. 태호씨가 저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태호: (뒤이어 나올 말이 무엇일지 짐작이 되어 되려 씩씩하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채경: 네?? 태호: 그렇게 티 내고 다녔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채경: 태호씨.. 태호: 온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인데 채경씨라고 몰랐겠어요? 근데 그게 왜 잘못이에요? 왜 벌 받을 일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채경: 알면서도 아니라고 거절 안 했잖아요. 태호: 네?? 채경: 태호씨 마음 알면서, 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말 안 했잖아요. 그게 잘못이에요. 태호: !!!!!!! 채경: 태호씨한텐 늘 미안하고 고마워요. 하지만.. 거기까지예요. 태호: 채경씨!! 채경: 고마운 마음으로 호감은 키워졌지만.. 미안한 마음에 가슴 한 켠 내어 주기도 했지만.. 사랑.. 할 순 없었어요. 태호: (숨 삼키는) 채경: 여전히 내 심장의 주인은 그 사람이고.. 내가 유일하게 사랑을 바치는 사람도 그 사람이에요. 태호: (울컥하는) 채경: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만 사랑할 것 같아요.. 지금도 앞으로도 함께 있는 사람은 태호씨일 텐데.. 사랑할 수가 없네요.. 태호: .. 채경: 그래서 내가 미안해요.. 이런 마음밖에 줄 수 없어서.. 태호: .. 채경: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날 혼자 두고 가지 않을 당신이라 고마워요. 태호: (채경 보는) 채경: 이런 나.. 정말 재수 없죠? #. 호텔 문을 열고 룸 안의 광경을 보는 순간, 모든 사태 파악이 끝난 신.
평소보다 더 과장된 가족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어머니와, 늦게 온 신에게 무언의 눈빛으로 나름의 질책을 하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부모님 맞은편에 쪼로록 앉아 있는 정하네 세 식구.. 신을 처음 보는 윤형주 의원과 정하모는 신의 생김새를 살피는 기색이 보였지만, 신을 훑어 내리는 시선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중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언론을 통해 보고 들었던 형주의 성품이나 안사람의 성품이 그렇게 많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두 사람은 진짜 어른이었다. 아마도.. 자기처럼 속아서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닐 것이다. 분명 우리 부모님의 초대로 저녁을 함께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당연히 정하와 신의 결혼을 전제로 하는, 어찌 보면 양가의 상견례 성격을 띠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순간을 마련하기 위해 벌였을 어머니의 치밀한 물밑 작업에 소름이 돋는다.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부모에게 이렇게 휘둘려야 한다는 게.. 끔찍할 지경이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사회적 명예가 드높은 분들이시다. 자신에게야 남다를 것 없는, 남들 다 가진 부모와 다를 바 없지만, 사회에서 평가하는 두 분은, 제일그룹 회장님과 사모님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견줄 곳 없다 하는 최고 그룹의 주인 부부였다. 돈 많은 게 명예인 요즘 세상에, 아버지 어머니만큼 명예로운 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참아 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을 꾸민 것에 당장 분개하지 않고, 이 자리를 파한 후에 터뜨려 드려야 하는 건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심정 같아선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명예만큼이나 드높은 명예를 지닌 손님 내외가 함께하고 있었다. 저 분들 앞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명예를 짓밟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 옳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괜찮을지에 대해선 잠시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다섯 사람의 시선이 꽂히고 있는 와중에도 신은 냉정하게 따져 봤다. “신아~ 왜 그러고 섰어? 인사하고 얼른 와서 앉아.” 부드러운 말투지만, 그 속엔 당장 정신 차리고 자리에 앉으라는 혜숙의 엄포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못 알아차릴 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잠시간의 고민을 끝내고, 사람들을 훑어 본다. 신: (정중하되 너무 숙이는 자세는 아닌 채 형주에게 인사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신입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형주, 정하모: (신 보는) 정하: (왠지 모르게 침 삼키게 되는) 혜숙: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꼭 붙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준수(신이 父): (늦은 녀석이 느긋하게 행동하는 게 조금 못마땅한,, 그래도 이제 인사하고 자리에 앉으려나 보다 싶어 화가 누그러지는..) 신: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의원님.. 형주: (사람 좋은 미소 짓는) 이이사에 대해선 소문이 자자해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실제로 보니 외모가 아주~ ^^ (정하 흘끔 눈으로 가리키며 농으로) 이 녀석이 왜 그렇게 지 어미를 졸랐는지 이제 좀 이해가 가는군요.. ^^ 정하: 아빠~~ (살짝 흘기는) 형주: (그저 껄껄 웃고) 준수, 혜숙, 정하모: (덩달아 미소 짓는다.) 형주: 아.. 근데 이제 그만 앉지 그러나..? 늦은 건 출장 때문이라 다 이해하는데.. 정하모: 그래요.. 앉아요.. (인자하게 권한다.) 정하: (여전히 긴장해서 신 보는) 신: (아버지 어머니를 슬쩍 본다.) 준수: (고개 갸웃하는.. 왜 신이 안 앉고 저리 서 있는지 의아한) 혜숙: (초조한 마음 누르고) 배 안 고파? 얼른 앉아서 저녁 먹자.. ^^ 신: 죄송합니다.. 사람들: ??? 신: 저 여기 앉아서 밥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요. 혜숙: 신아!! (신이 뭔 짓을 저지를지 느낌이 왔다. 그래서 다급하게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더 일이 커지기 전에 녀석을 막아야 했다. 제발 정신 차려! 너 이 자리가 어떤 자린지 모르는 거 아니지? 제발 참아! 이번만 참아! 신아! 엄마가 이렇게 빌게!!) 사람들: ??? (여전히 어리둥절한) 신: 오늘 이 자리.. 저는 얘기 듣지 못했습니다. 형주, 정하모: ??? 준수: (끙.. 신음을 속으로 삼키는) 신: 이 자리가 어떤 자린지 딱 봐도 알겠는데.. 여기 앉았다가 코 꿰이기 싫습니다. 혜숙: 신아!! 신: 의원님 내외분껜 정말 죄송하지만, 따님께도 분명히 말씀 드렸었습니다. (정하 보며) 난 그쪽이랑 어떻게 될 생각 없다고, 다신 보지 말자고 했던 말 기억하죠? 정하: (치마를 꼭 그러쥐는) 신: 기억력이 남다른 분인 거 같아서 다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줄게요. 마지막에 만났을 때, 난 부모님 위해 정략 결혼 해 줄 만큼 효자가 아니라는 말도 했었어요. 그쵸? 혜숙; 이신!! 신: (혜숙 말 무시하고 정하 부모에게) 따님이 저한테 이런 대접 받는 거 딸 가진 부모로서 용납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형주, 정하모: (굳어진 표정) 신: 따님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한 결혼 생활 하길 바라는 마음이시라면, 저 같은 놈 만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정말 혹시라도 저희 부모님처럼 자식의 감정이나 행복보다 집안을 우선해 자식 결혼을 사업처럼 생각하신다면.. 정하: 이봐요!! (참지 못하고 끼어든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감히 누구 보고 저딴 저열한 평가를 들이대는 거야? 당신 눈 삐었어? 지금 당신 눈 앞에 있는 분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비록 이 모양 이 꼴이라도 우리 부모님은 아니라고!) 신: 그쪽이 발끈하는 거 보니까 윤의원님은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딸을 먼저 생각하는 좋은 아버지인가 보네요. 정하: 네?? 신: 미안해요. ‘만에 하나 그런 마음이라면’ 이라고 가정한 거지, 의원님이 그렇다는 건 아니었어요.. 아, 그리고 뭐.. 기업 하는 집안이나 정치 하는 집안이나 자식 결혼도 실리 따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한 말이니까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아요. 내가 지금 감정이 격해서 필터링이 안 되는 상태라.. 정하: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 어떻게 저런 말을 이런 자리에서 다 할 수 있는지.. 존경스럽다. 자기한테야 틱틱대면서 상처 주는 말 할 수 있다고 해도, 부모님, 그것도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앞에서 다 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남자다. 신이 자신을 그렇게 내쳤다 해도, 아버질 만나면 좀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천하의 윤형주도 맘에 안 드는 여자의 아버지라고만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정말.. 대통령 딸이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인간이었던 거다.) 형주: 전부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자네가 하는 말을 듣다 보니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것 같군. 신: (숨을 고르며 형주 보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뒷감당할 것도 걱정이고, 저 대단한 인물 앞에서 이 따위 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맘에 안 들어 미쳐 버릴 것 같다. 그래도 물러설 수가 없어서 숨 고르기를 하며 2라운드를 준비한다.) 사람들: (폭주 기관차처럼 쏟아내던 신에 대응해 말문을 연 형주를 바라보는) 형주: 자네는 이게 정략 결혼이라고 생각하는가? 신: 아닙니까? 형주: 둘이 서로 마음이 맞으면 아니겠지.. 세상이 뭐라고 떠들든 그건 차후 문제고.. 신: 그래서 승낙하셨습니까? 제일그룹과 사돈 맺는 거.. 형주: (신 보는) 신: 어쩌면 제가 지금 배배 꼬아서 사태를 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오랫동안 심사숙고 한 일들을 무시하고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과정이 어떻든 제겐 결과가 더 중요합니다. 이 결혼.. 없었던 걸로 해 주십시오. 어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일을 진행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사자 중 한 명인 저는 반대니까요. 그러니 의원님이 세운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둘이 마음이 맞는 결혼이 아닌 이상, 이건 세상에서 말하는 정략 결혼,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습니다. 혜숙: 신아~~ (사정하게 되는) 신: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형주: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신: (멈칫) 형주: 우리 정하가 맘에 안 들었나.. 아님, 내가 정치인이라는 게 맘에 안 들었던 겐가..? 신: (형주 보는) 형주: 솔직히 정치인과 사돈 맺는 덴 여러 가지 선입관이 작용하지.. 그래서 내 딸아이가 아비 때문에 피해 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네.. 신: 의원님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랑은 전혀 상관 없습니다. 형주: 그럼 단지 정략 결혼이라는 절차가 싫은 겐가? 신: 아니오. 형주: 그럼..? 신: 저희 부모님이랑 의원님 따님은 알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혜숙, 준수: (마른 침 삼키는) 정하: (입술 깨물며 신 보는) 형주, 정하모: (자기 딸 흘끔 보는) 신: 제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따로 있습니다. 형주, 정하모: ??!!!!!!! 준수: (눈 감는) 혜숙: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는) 정하: (놀라는.. 저 말을 할 수 있는 신이 놀라운..) 신: 그 여자 아니면 저 결혼 안 할 겁니다. 형주: 하.. (어이 없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으면서 왜..? 신: 부모님이 반대하는 여자거든요. 혜숙: 이신!!!! 신: 보시다시피 저희 어머니가 결사 반대를 하고 있어서, 다른 여자를 밀어 부치고 계십니다. 그 레이더망에 의원님이 걸려 드신 거니까 절대 속지 마십시오. 저.. 좋은 신랑감 아닙니다. 절대.. 혜숙: 너..!! 신: (혜숙이 삿대질을 하거나 말거나 형주만 보며) 의원님 따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부분에 있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주: (허.. 헛웃음만 나온다. 왠지 뭐에 홀린 것처럼 멍하다.) 신: 그럼.. 저는 이만 꺼지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이번엔 정말로 밖으로 나가 버리는 신. 신이 나가고 룸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돈다. 하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혜숙이 신을 뒤쫓아 간다. 아내마저 자리를 비우자 준수는 윤의원 내외를 뵐 면목이 없다. 하지만 도리어 형주는 정하를 보며 한 마디 꺼낸다. 형주: 넌.. 알고 있었어? 정하: ……………………………….네.. 형주: 알면서도 이 자리에 나온 거야? 정하: ………….네.. 형주: (하..) 누굴 탓하겠니..? 내 자식도 이런데.. 준수: 면목 없습니다, 의원님.. 형주: 저도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제가 딸아이를 잘못 키웠네요.. 준수: 저희야말로.. 정말 죄송합니다.. 저 녀석이 좀 외골수라.. (어색하게 웃으며 신과 혜숙이 나간 문을 심란하게 쳐다본다.) #. 복도 “너 어쩌자고 그랬어?” 걸어가던 신이 혜숙에 의해 잡혀서 들은 말.. 신: (무심히 돌아보는) 혜숙: (신의 등짝을 팡팡 때리며) 너 정말 왜 그래? 미쳤어?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저 분들이 어떤 분인데!! 신: (그냥 맞고만 있는다. 뭐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이럴 각오도 안 하고 벌린 일이 아니었으니까..) 혜숙: (때리다가 잔소리 하다가 지쳐서 신을 붙잡고 추욱 처진다.) 신: (힘이 빠진 혜숙의 손을 슬쩍 잡아 빼고 뒤로 물러난다.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 짝이 없다.) 혜숙: 너..! 정말 미쳤어? 신: 안 미쳤어. 혜숙: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안 미쳤어~? 신: 그렇게 안 했으면 깔끔하게 정리 안 됐을 거잖아. 혜숙: 무슨 정리? 신: 윤의원이랑 사돈 맺는 거.. 아까 그걸로 쫑 난 거잖아. 안 그래? 나, 그럴라고 그런 거야. 내가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어서 그렇게 한 거라구.. 혜숙: 뭐?? 신: 처음엔 생일날 이런 걸 선물 하는 엄마가 답도 없다 생각했는데, 역으로 생각하니까 이보다 더 좋은 상황도 없더라구.. 이 자리만 망치면 한방에 내가 원하는 결론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잖아.. 그래서 지금은 엄마가 고마워. 진심으로..! 혜숙: 이 자식이 진짜!! 신: 최악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맘고생 한 보람 있어~ 혜숙: 너 지금 염장 질러? 신: 먼저 시작한 건 엄마잖아. 정말 우리 엄마만 아니었으면 나 진짜.. 하.. 혜숙: 내가 너 안 되라고 이래? 신: 엄마가 끼어들어서 나 행복했던 적이 없어! 혜숙: (신 보는) 신: 오늘.. 나 정말 힘들었거든? 혜숙: 출장이 뭐 대수라고.. 신: (입 밖으로 나오려는 무수한 감정들.. 말들..을 내리 누르고) 안 그래도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는데.. 문 여는 순간 가루가 되서 날아가 버렸어~ 뭐 이런 거지 같은 게 다 있나 싶고.. 그걸 엄마가 준비했다는 게 진짜.. 혜숙: .. 신: (숨을 고르고) 앞으론 이러지 마. 나 엄마 생각대로 안 움직여. 아직도 몰라? 혜숙: 그럼 어쩌라고? 그냥 손 놓고 있어? 신: 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내 살 길 내가 찾을 거니까.. 혜숙: 니가 찾는다는 길이 그 기집애야? 신: (혜숙 보는) 혜숙: 너야말로 아직도 모르겠어? 거기 막혔어. 아니, 유실됐어. 없어졌다구.. 사라진 길 위에서 뭐 하려고? 신: 사라진 거지 없어진 게 아냐. 원래 있던 건 절대 안 없어져. 그러니까 사라진 걸 찾으면 돼. 그리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혜숙: 야~ 신: 엄마랑 더 말 섞기 싫어. 오늘 내 생일이잖아. 남은 시간이라도 숨 좀 쉬자! 거기까지 말하고 신은 걷기 시작했다. 혜숙이 불러 보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길고 긴 복도를,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길을 걷고 또 걸어 숨을 곳을 찾아간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할 곳.. 오늘의 이 상처 받은 몸과 마음을 풀어 놓을 곳으로 간다. 오늘은.. 정말 잊지 못할 생일이 될 것 같다. #3. 보건소 “나이 많은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제일 젊은 애가 아파~? 너 혼자 여행 갔냐? 아, 그리고 왜 촌스럽게 여행 갔다 왔다고 아파~? 정말 이해 안 되네..” “야! 너는 아픈 애한테 무슨 그런 악담을 하냐? 누군 아프고 싶어서 아프냐? 안 그래도 몸살 나서 정신 없는 애를 좋은 소리는 못해줄 망정 타박이나 하고..” “아, 나도 속상하니까 이러죠~ 언니는 내가 진짜 채경이가 미워서 그러겠어요?” “너 얘 하루 일찍 갔다고 뭐라뭐라 했잖아.” “그거야 그냥 한 말이고.. 아 진짜 언니는~ 채경이 다 듣겠네..”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보건소 대기석에 앉아 심덕과 혜옥이 나누는 대화를 몽롱한 정신으로 듣고 있는 채경. 괜찮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찬물로 세수를 하려고 방을 나섰다가 방과 방 사이에 놓인 툇마루에 쓰러져 버린 채경을 보고 놀란 혜옥이, 새벽부터 난리 부루스를 쳐서 아침 장사도 못하고 불려온 심덕이었다. 채경을 업고 온 것도 심덕이었고, 채경을 제일 많이 걱정한 것도 심덕이었지만, 속마음과 달리 걱정스런 마음이 혼내는 것처럼 흘러나와 안 들어도 될 타박을 듣고 있다. 그래서 얼른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심덕이었다. “근데 보건소 의사가 새로 왔다던데.. 봤냐?” “나도 얘기만 들었지 아직 얼굴은 못 봤어요.” “지난 번 권선생처럼 좋은 사람이면 좋겠는데..” “아이참 언니~ 다 듣겠어요.” “왜~? 이런 말도 못 하냐?” “그래도 참..” 또 티격태격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다시 정신을 잃은 채경.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며 채경의 의식이 깨어나려고 하는 순간, “정신이 좀 들어?” 나지막한 남자 목소리가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기 전 채경의 귓가에 들려온다. 그걸 신호로 완전히 정신을 차린 채경이 서서히 눈을 뜬다. 그리고 몇 번 눈을 깜빡거리자 흐릿하던 사물이 또렷하게 보인다. “괜찮아?” 걱정이 담긴 남자의 목소리에 채경이 돌아본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본 채경의 눈이 살짝 커진다. “오빠..” “(피식) 처음엔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 “여기서 뭐 해?” “..” “너.. 여기 살아?” “..” “강현이가 너 얼마나 찾았는 줄 아..” “강진 오빠..” “어??” “혹시.. 강현이한테 연락 했어요?” 깨어나자마자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질문이나 하는 채경을, 그것도 그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물어보는 채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강진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채경아.. 넌 어디가 아픈 거니? 대체 어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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