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할 거면서, 담양에선 왜 그렇게 아프게 만들었냐 물으신다면.. 이번 편 마지막 장면의 신이를 그리고 싶어서였다는 변명을 할 수밖에 없네요.. ^^;; 그리고, 이번 소설은 누차 말씀 드렸다시피 단편이기 때문에 곧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어요. 하지만 슬픔과 아픔이 클수록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이 크기에 두 아이 고생 좀 시켰습니다. 음.. 신이랑 채경이 아프게 한다고 작가도 때아닌 몸살을 앓았는데요, 이래서 사람은 죄 짓고는 못 사나 봅니다. 이것도 죄라면 죄라서, 두 아이 아프게 하고, 대감들 가슴 아프게 한 벌을 달게 받았네요.. 그래도 오래 아플 줄 알았는데, 주말에 뒹굴거린 덕분에 일찍 털고 일어났어요. 내일부턴 계속 일하기 싫다고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해야 돼서, 지난 주처럼 달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미리부터 포석 깝니다, 이해해 주세요..) 집에 오면 틈틈이 글을 쓰겠지만, 지난 주처럼 비축분이 있는 게 아니라서, 매일매일 인사 드리는 기적 같은 일은 보여 드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벌써부터 기운 빠지죠? 그래도 지금부턴 희망적인 내용들로 채워질 거라는 약속은 할 수 있으니, 그걸로 어떻게 위안이 안 될까요? --;; 어쨌든 저물어가는 일요일 밤, 아주 오랜 만에 상상소설 올립니다. 결국 회사에서 갖고 온 일거리는 이틀 내내 손끝 하나 까딱 안 하다가, 글 올리고 난 후 열어 보려고 해요. 내일 아침에 당장 회의해야 되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뭔 배짱인지 모르겠어요. 열일 해야 되는데 진짜.. 썰이 길어지면 미적거리기만 할 것 같아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내일부터 꽃샘 추위가 찾아온다고 하는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쏭기자가 달린다고 많이들 올라오셔서 같이 달려 주신 거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의 댓글과 추천은 예나 지금이나 저를 글 쓰게 하는 힘이에요. 그러니까 저를 재촉하시고 싶으시면 힘 나게 비타민 많이많이 주세요~ **시판에 소설쯩 올려 주신 좋은꿈 대감님.. 저도 시판에 글 남기는 거 어색한데, 대감도 그러신 모양이에요. 그래도 오늘 소설쯩 잘 찾아왔어요. ^^ **계속해서 멋진 소설 대문을 선물해 주시는 샤이나 대감님.. 대감님의 염원을 담아 저도, 신이도, 채경이도 얼른 안 아프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울지 마시구요.. 앞으론 맘 편히 소설 읽어 주세요. #########################################################################################
살금살금 걸어가는 남자의 발.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속도가 붙은 발은 어딘가를 향해 돌진하듯 빨라진다. 와악~!!! 다가선 사람에겐 충분히 큰 소리로 놀래키며 깜짝 서프라이즈를 선사하는 남자. 이에 아무 생각 없이 서류철을 들고 가다가 갑작스런 공격에 화들짝 놀라 버린 여자. 들고 있던 서류철을 허공에 투척하며 “엄마야~” 깜찍한 비명 소리를 들려 준다. 그 소리와 반응에 장난친 보람을 느낀 남자는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는다. “실장님!!” 장난을 친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채경은 앙칼진 목소리로 신에게 항변한다. 하지만 채경이 화내는 것조차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인 신은 웃음을 멈추질 않는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돌아다니고 있는 중요 서류들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다.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최대한 엄한 표정을 지은 채 신을 노려 보는 채경. 그러나 채경의 그런 표정에는 전혀 두려움이 안 생기는지 생글거리기만 하는 신. 결국 못 말리겠단 생각에 먼저 포기한 채경이 푸~ 한숨을 내쉬고는, 허리를 숙여 서류들을 줍기 시작한다. “나이를 대체 어디로 먹는 거예요?” “거꾸로 먹는 것 같애..” “네??” 채경의 일을 거들기 위해 무릎까지 꿇어가며 서류를 줍기 시작한 신이 채경을 한 뼘쯤 올려다보며 얘길 한다. “신채경 만난 후로 나일 거꾸로 먹고 있어, 나..” “무슨 소리예요?” “원래 나 이런 놈 아니었거든? 실없는 농담하고 쓸데 없는 장난질하고.. 그런 거 진짜 우습게 여겼거든? 근데, 너한테 장난치고 농담하고 그런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요새는.. 왜 어렸을 땐 이런 재미를 몰랐나 몰라~” “지금.. 나 때문에 철 없어졌단 얘길 하는 거예요?” “하~ 어떻게 얘기가 그렇게 되냐? 어쩜 넌 그렇게 눈치가 없냐~?” “내가 무슨 눈치가 없어요? 지금도 내 탓 하고 있는 거잖아요. 실장님이 이렇게 철 없이 구는 게 왜 날 만나서 그런 건데요?” “지금까진 장난치고 싶은 사람 만난 적이 없으니까..” “에??” “아무 생각 없이 장난치고 농담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어, 그 전까진.. 그래서 나는 내가 그런 걸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놈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아니었나 봐. 나도 스스럼없이 농담할 수 있는 사람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놈이었어. 그걸 즐길 줄 알고, 즐기고 싶었던 것 같구..” “..” “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북적대며 살아온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처럼 쭉 혼자였던 사람은 누굴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설레고 즐거워. 그러니까 니 탓한다고 억울해하지 마. 그런 사람 만나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니까..”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어려울 거 없어. 그냥 내가 널 무지무지 사랑한다는 말이니까..” “사랑해서 장난친다구요?” “응.. 너한테만.. ^^” “..” “두 사람 거기서 뭐 해요?” “!!!!!!” “!!!!!!!!” 채경을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날려 주던 신도, 신의 말에 감동 받아 울컥해져 있던 채경도, 갑자기 복도 너머에서 그들을 향해 날아온 현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굳어 버린다. 아직은 아무도 둘 사이를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현수조차 모르는 비밀 연애였다. 그래서 답지 않게 신까지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져서는 동작 그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현수의 발소리가 들리자, 신은 침을 꿀꺽 삼키고 채경에게 안구 신호를 보낸다. 자신의 안구 신호를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신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연다. “신채경~ 넌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 거야? 내가 우리 회사 복도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겠어?” 하면서 옷을 탈탈 털며 일어난다. 이에 현수가 좀 전보다 더 빠르게 둘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여전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된 채경은 눈만 굴리고 있다. 왜 갑자기 신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옷을 사정없이 털어대는지, 다 주워가던 서류철을 왜 신이 바닥에 다시 흘려 놓으며 일어섰는지.. 잘 모르겠는 채경은 현수가 다가오자 그것만 신경 쓰여 고개를 숙인다. “괜찮으세요?”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 저 띨띨이 사고 안 치게 주의나 줘~” “(채경 보며) 채경씨 괜찮아?” “(서류 수습하며) 아, 네..” “도와줘?” “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아냐.. 도와줄게.” 현수가 좀 전에 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릎을 세우고 앉아 채경이 서류 줍는 걸 도와준다. 그 바람에 채경과 현수는 바닥에 붙어 앉아서 서류를 줍느라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혼자만 삐죽 서서 짜증 내는 연기를 하고 있던 신이만 애가 탄다. ‘야~ 신채경.. 나 좀 봐~ 나 아까 연기한 거거든? 오해하는 거 아니지? 너.. 지금 기분 나쁜 거 아니지? 눈치 없는 거 여기서 발동되면 안 된다~ 다 니가 비밀 연애 해야 된다고 해서 이런 거다~ 그러니까 화내면 안 된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10 #. 보건소 바닷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덕분에 해조리 보건소에서는 창문만 열어도 파도 치는 소리가 무척 잘 들린다. 그 소리가 서울 촌놈인 강진은 무척 좋았다. 알싸한 짠내도, 철썩거리는 파도도, 끼룩거리는 갈매기도 모두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 사람들과 다르게 의사 선생님이라면 껌뻑 허리부터 숙이는 시골 어른들의 정이 좋았다. 그래서 보건소에 출근한 지 단 이틀 만에 이 낯설고 물 설은 곳이 맘에 들었다.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열흘이 흘러가면서, 보건소 일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딱히 큰 병을 앓는 사람도, 사고 때문에 다치는 사람도 거의 없는 조용한 곳.. 그저 무료한 어르신들이 엄살을 핑계로 말벗을 찾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인 곳.. 그래서, 거의 기절한 것 같은 젊은 여자가 진료 받으러 들어왔을 때도 가벼운 감기 몸살인가 보다 했던 강진이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할 만큼 열이 많이 올라 있는 상태라, 아주머니들이 감당하기 어려워 자신이 직접 병상에 뉘었다. 체온을 먼저 재고 눈동자 상태를 확인하려고 얼굴 전체에 땀으로 인해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려는 순간, 열병에 걸려 정신을 잃은 젊은 여자가, 해조리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얼굴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 자세 그대로 부동 자세가 되고 만 강진. 그런데 강진의 놀란 얼굴로 얼음이 된 자세를 보고, 혜옥과 심덕은 채경이 큰 병에 걸린 줄 오해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래서 얼음이 된 강진을 사이에 두고 우리 채경이 어떻게 되는 거냐며, 의사 선생님 우리 채경이 살려 주세요를 외쳤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강진은 지금 정신을 잃고 누운 여자가 채경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고, 일단은 채경과의 재회로 놀란 가슴은 뒤로 제쳐 두고 난리 피우는 두 아주머니들을 진정시킨 후 진료를 시작했다. 기본적인 바이탈을 체크한 후, 몸살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휴식이라며 두 여자에게 채경을 두고 가라고 했다. 마치 영원한 이별을 하는 사람들마냥 눈물 콧물 찍어가며 채경을 두고 가면서 혜옥과 심덕은 신신당부 했었다. 우리 채경이 잘 부탁 드려요.. 그렇게 두 아주머니는 억지로 떠났다. 그리고 세 시간이 흐른 후 채경이 깨어났다. 강진: 내가 안부 인사 안 물었다고 너도 인사 대신에 니 할 말만 먼저 하는 거야? 채경: 예?? 강진: 오랜 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그런 거 물어봐야 되잖아, 우리.. 채경: 아.. 강진: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채경: (강진 보는) 강진: 아픈 거 보니까 잘 못 지냈나 보네? 채경: 아니에요 그런 거.. 강진: 얼굴이 말이 아닌데? 채경: 그거야 감기 걸렸으니까 그렇죠.. 오빠는 여전하네요? 강진: 여전히 잘 생겼다고? 채경: (피식) 강진: 웃는 거 보니까 내가 아는 신채경 같네~ 채경: (강진의 농담에도 진지하게) 오빠가 새로 온 보건의예요? 강진: 응.. 열흘 전에 왔어. 채경: 레지던트 과정 다 마친 거예요? 강진: 어.. 채경: 그럼 이제 전문의인가? 강진: 뭐.. 바로 군대 와서 전문의라는 실감은 못했어. 제대하고 나면 진짜 의사 되겠지.. 채경: .. 강진: .. 채경: .. 강진: 넌 어떻게 된 거야? (총대를 매기로 한다.) 채경: (올 것이 왔단 생각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강진: (옆 병상에 엉덩이를 걸터앉으며) 강현이한테 대충은 들었는데.. 3년 전에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 거야? 채경: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강진: 그래도.. 연락이라도 하지.. 남아 있는 사람들 생각은 안 했어? 채경: 알면서도 연락 못한 사람 입장도 편한 건 아니었어요. 강진: .. 채경: 그래서 말인데요.. 아까 물었던 거.. 강현이한테 연락했어요? 나 자는 동안..? 강진: .. 채경: (절박하게 강진 보는) 강진: 하~~~ (조금 긴 한숨) 채경: ??? 강진: 네 눈빛을 보면 연락 안 했다고 하고 싶은데.. 채경: !!! (그럼..?!!!) 강진: 좀 망설이다가 강현이한테 전화를 했어.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강현이가 다시 네 얘길 하기 시작했거든.. 채경: (눈 감는.. 절망한다.) 강진: 근데.. 채경: (이곳을 떠나야 하나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슬프다.) 강진: 강현이랑 통화는 못했어. 채경: ………………………..??? 강진: 전화를 안 받더라구 이 녀석이.. 채경: 그럼.. 강진; 그래.. 아직 얘기 못했어. 너 만났다는 건.. 채경: 오빠!! 강진: 얘기.. 하면 안 되는 거야? 채경: .. 강진: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봐도 돼? 채경: .. 강진: 채경아.. 채경: 그게.. 강진: .. 채경: 아직.. 제가 준비가 안 됐어요. 강진: 무슨..? 채경: 강현이한테든.. 누구한테든.. 아직 두고 온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안 됐어요. 강진: 3년이 부족해? 채경: 네.. 아직은 부족해요.. 강진: .. 채경: 그러니까 오빠.. 미안하지만 내 부탁 좀 들어 줄래요? 강현이한테 전화 오면 그냥 전화했었다고 얘기해 주세요. 강진: ‘흠~~’ 채경: 부탁할게요.. 강진: (채경 보는) 채경: (간절하게 강진 보는)
#. 며칠 후 똑똑 외국 회사에 보낼 자료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느라 모니터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는 신. 노크 소리도 건성건성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그래서 현수가 책상 곁으로 왔을 때에야 고개를 든다. 신: 왜?? 현수: 담양에 보냈던 사람한테서 보고가 올라왔는데요.. 신: (동작 그만) 현수: 말씀.. 드릴까요? 신: (후~ 숨을 가다듬고 현수 올려다본다.) 그래.. 뭐래? 현수: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채경씨는 못 찾았다고 합니다. 신: 뭐?? 왜? 현수: 그들 말로는 신채경이란 사람이 담양에 살지 않는 것 같다고 하네요. 신: 호적만 냅다 판 거 아냐? 걔 그냥 계약서 같은 거 안 쓰고 살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서류상에 흔적 없을 수도 있어. 현수: 예.. 그런 상황까지 모두 훑었는데 안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신: 확실해? 현수: 예.. 담양이 서울처럼 크고 복잡한 곳도 아니고.. 외지에서 젊은 여자가 왔다 그러면 티가 날 텐데, 담양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흔적조차 안 나왔다고 하는 거 보면, 담양에 채경씨가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신: 그럼.. 여행을 왔다는 건가? 현수: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신: 그럼 또.. 어디서부터 추적을 시작하지? 현수: 그때 같이 있었던 남자 이름은 모르십니까? 신: (도리도리) 몰라. 현수: 둘이.. 같이 온 걸까요? 신: 글쎄.. (상상하기도 싫다.) 현수: (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 이 얘긴 넘어가야지 싶다.) 담양 인근 도시를 훑으라고 할까요? 신: 아.. 그런 방법도 있구나.. 현수: 그렇게 할까요? 신: 어.. 일단 할 수 있는 건 해 봐. 현수: 알겠습니다. 그럼.. (인사하고 물러나는) 신: (현수가 나가고 나자 피로감이 몰려온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눈 두덩이를 살살 문지르며 맥을 놓는 신. 오늘 안에 마쳐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게 무슨 소용 있나 싶다. 집에선 의절하자고 난리고, 채경은 또 눈앞에서 놓쳐 행방을 알 수도 없다. 세상에 어느 것 하나 나를 행복하고 힘 나게 하는 것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게 조금 억울하다. 이렇게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리고 염세주의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다시 또 “똑똑” 소리가 들린다. 신, 무심히 문을 바라본다. 저 문을 열고 현수가 갖고 올 얘기가 무엇이든간에, 지금 그가 느끼는 무력감을 상쇄시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신: 왜?? 현수: 아, 그게.. (살짝 망설이는) 신: 뭔데? 현수: (말하기 난감하다는 듯) 저기.. 지금 사무실 밖에 윤정하씨가 오셨습니다. 신: 뭐??!! 현수: 어떡할까요? 신: 나 만나러 온 거야? (그 여자가 다시 여길 찾아왔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다.) 현수: 네.. 신: 하.. 미친 거 아냐? 현수: 돌려.. 보낼까요? 신: 하..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픽픽거리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현수: (신의 대답을 알아듣고는) 그럼 돌려 보내겠습니다. (하고는 물러난다.) 하지만 현수가 문을 열고 나가기도 전에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하가 들어온다. 현수: (당황해서 다급하게 정하에게 달려간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신: (소란에 고개 드는.. 그리고 또 자기 사무실에 쳐들어온 정하를 어이 없이 쳐다보는) 정하: (현수에게 밀려나면서도 신을 향해) 잠시만 시간 좀 내 줘요! 신: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정하: 저기요~!! 신: .. 정하: 사과하러 왔어요! 신: .. 정하: 마지막으로 사과하러 왔다구요!! 신: 들었다고 치죠~ 정하: 이봐요~ 정말 마지막이에요~ 다른 뜻 없어요~ 그냥 끝내면 너무 찜찜할 것 같아ㅅ.. 신: 그쪽 얼굴 한번 더 마주 보면 내가 찜찜할 것 같거든? 정하: 이봐요!! 신: (현수 향해) 책임지고 내보내! 현수: (여자에게 이런다는 게 미안하지만, 직속 상관이 저리 명령하니 정하를 막아 설 수밖에 없다.) 그만 나가시죠~ 정하: 이대로 못 나가요!! 현수: 나가시죠~ (힘으로 밀어낸다.) 정하: 이렇게 내 몸에 손대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현수: 예?? 정하: 제가 누구 딸인지 알아요? 현수: .. 정하: 그러니까 손 떼요! 나쁜 맘 먹으면 얼마든지 나쁜 짓 할 수 있으니까.. 현수: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하: 네?? 현수: 지금 아가씨 몸에 손 댔다고 사회적 매장을 시키겠다 하셔도 지금은 이사님 명에 따르겠습니다. 정하: (놀라서) 이봐요.. 현수: (싱긋 웃으며) 포기하고 그만 나가시죠~ 정하: (뭐 이쪽엔 이렇게 고집불통 대마왕들만 있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진짜 아버지 이름을 팔아서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말뿐인 협박이라도 먹힐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씨도 안 먹힌다.) 현수: (정하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밀어내려는데..) 신: 그 손 떼고 김팀장은 나가 봐. 현수, 정하: (동시에 신 보는) 신: (멀찍이 자기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보고 있다.) 시덥잖은 여자 땜에 유능한 부하직원이 매장되는 꼴 보고 있을 순 없지 않겠어? 현수: (피식 웃는) 정하: (열 받는) ‘내가 진짜로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야 뭐야?’ 현수: (정하에게서 반 발짝 물러나며) 실례 많았습니다. 정하: .. 현수: (방을 나가려다가) 차.. 필요하십니까? 신, 정하: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차 대접 같은 거 하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는 듯..) 현수: (조용히 목례하고 방 안에서 사라진다.) 정하: (현수가 나가고 막상 원하던 바를 성취하고 나자 조금 뻘쭘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쭈볏거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다.) 신: (책상에서 돌아 나와 소파 쪽으로 온다. 그리고 아무 의자에나 앉는다.) 정하: (신 보는) 신: (정하 멀거니 보며) 안 앉고 뭐 해요? 정하: 사람을 쫓아낼 땐 언제고.. 지금은 또 왜 그렇게 정중해요? 신: 내가 뭘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정하: (진심으로 사과하러 온 목적은 잊어 버리고, 신의 얄미운 행동과 말에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 오른다. 그러게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여기 왔는지 모르겠다. 푸대접 받으리라는 것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내가 사과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쓸 인간한테 굳이굳이 사과하러 온 나도 못 말리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생겨 먹은 인간인걸.. 저 인간은 원치 않아도 내가 사과 안 하면 찜찜해서 못 살겠는 걸..) 신: 앉아요~ 나 시간 별로 없어요. 정하: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으며) 왜 끝까지 안 쫓아냈어요? 신: 오늘 성공 못 하면 또 와서 귀찮게 할 거 아닌가? 정하: 그래서 더 귀찮아지기 싫어서 잠깐 시간 내 준 거예요? 신: 그게 제일 깔끔할 것 같아서요.. 정하: 정말.. 나 못지 않게 자기 본위에, 뻔뻔한 성격이네요. 신: (어깨 으쓱) 정하: 계속 그렇게 얄밉게 나오면 미안하다는 말 절대 안 나오거든요? 신: 별로 바라지도 않아요~ 안 할 거면 그냥 가든가~ 정하: (입술 삐죽) 신: (픽) 정하: (입술을 오물오물 하며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말이 안 나온다.) 신: (다리를 꼬며 정하 물끄러미 보는) 정하: (초조하고 기분 나쁜 자기와 다르게 너무 여유로운 신의 자태가 얄밉다. 그런데.. 저 모습이 여전히 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자기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신: .. 정하: (시선 살짝 비키며 작게) 미.. 미안해요.. 신: 네?? 정하: (여전히 작은 소리로) 미안해요.. 신: 잘 안 들리는데? 정하: (하.. 발끈해서) 미안해요! 신: (피식) 정하: 재밌어요? 신: 조금요.. 정하: 다른 사람 괴롭히는 게 재밌나 봐요~ 신: 사돈 남 말 할 처지 아니지 않나? 정하; 네?? 신: 그 자리에 버젓이 나와서 앉아 있었다는 건, 나 엿 먹이려는 심보 아니었어요? 정하: (숨 삼키는) 신: 나 보자마자 싱긋 웃었던 것도 같은데.. 내가 잘못 봤나? 정하: (침 삼키는) 신: 어차피 피장파장으로 서로한테 못할 짓 많이 한 거 같으니까 이 정도에서 끝내죠~ 정하: .. 신: 왜 그렇게 봐요? 나도 잘한 거 없지만, 그쪽도 딱히 잘한 거 없다는 데 동의 못 하겠어요? 정하: 참..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스타일이시네요. 신: ??? 정하: 그렇게 솔직해서 사업은 어떻게 해요? 신: 별걱정을 다하네요. 정하: (피식) 아버지가.. 되게 감명 받았나 봐요, 그쪽한테.. 신: (정하 보는) 정하: 피상적으론 분명 기분 나쁜 말과 행동이었지만, 그렇게 확실하게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게 굉장히 인상 깊었대요. 신: 의원님이 그래요? 정하: 네..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자기 주장 확실하고 추진력 있어 보인다고 하셨는데.. 그쪽을 되게 잘 본 모양이에요. 신: (픽) 그럼 좀 아까워 하시겠네요? 정하: 어떻게 알았어요? 신: ??!! 정하: 제일그룹이라는 게 맘에 걸렸었는데, 그쪽 보고는 아무 상관 없다 생각하시게 됐어요. 신: 네?? 정하: 아~! 걱정 마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신: (진짜 그런가 의심의 눈초리 보내는) 정하: 그쪽이 그날 그렇게 하는 거 보고 절대 고집 못 꺾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신: (그렇담 다행이고..) 정하: 아마.. 좋아하는 그 여자랑 잘될 거라고.. 하셨어요. 신: (정하 보는) 정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신: .. 정하: 전에.. 그 분 얘기 했던 거.. 미안해요. 신: .. 정하: 다른 무엇보다 그게 제일 미안했어요. 신: .. 정하: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래서 꼭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신: .. 정하: 음.. 당분간은 마주칠 일도 없고.. 만나서도 안 되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얼굴 붉히지 않고 인사하는 사이가 되면 좋겠어요. 신: .. 정하: 그럼.. 갈게요.. 신: .. 정하: (천천히 일어나서 신을 본다.) 신: (그저 앉아 있다.) 정하: (잘 가라는 인사도 안 하나 싶어 입술 삐죽인다. 그러다가 저 인간한테 뭘 바라겠냐 싶어서 팩 돌아서 걸음을 내딛는다.) 신: 부모님한테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정하: (멈칫) 신: (정하가 돌아보면) 그쪽한텐 정말 전혀 안 미안한데 그쪽 부모님한텐 좀 많이 미안하거든요. 정하: 그래도.. 인간성이 완전히 바닥은 아니네요~ 신: 그러니까 사람 상대로 사업이라는 걸 하지 않겠어요? 정하: 그 잘난 척만 줄이면 더 잘 될 것 같은데.. 신: (픽) 정하: 잘 있어요~ 신: 네~ 잘 가요~ 다신 보지 말죠~ 정하: (하.. 고개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간다.) 신: (정하가 나가자, 뭔가 하나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져 있던 게 내려간 것처럼 개운한 느낌이다.) #. 약국 병원이 문을 닫고 나면, 약국에 오는 사람들의 발길은 급격히 줄어든다. 그래서 집에선 병원 닫는 시간에 맞춰서 약국 문도 일찍 닫으라고들 했다. 하지만 강현은 자신이 어렸을 적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히고 있던 동네 약국이 떠올라 9시고 10시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약국의 불을 환하게 밝히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인적이 드문드문 한 밤, 홀로 불을 밝히며 약국을 지키고 있다. 강현: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 중이다.) 오늘 오후, 강현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받은 전화는 폭탄이 되어 강현의 정신을 완전히 흩뜨려 놓았다.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통에, 오늘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불현듯 떠오른 누군가 때문에, 이 밤,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고민에 빠져 있다. 난.. 어떡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 내가 끼어들어도 되는 문제일까..? 결론 없이 되돌이표처럼 돌고 도는 생각들로, 강현은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울 것 같다. #. 바닷가 식당 오늘은 손님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썰물처럼 쑥 빠져 나가 버렸다. 그 여파로 완전히 나가 떨어진 혜옥은, 나이는 못 속인다며 먼저 집에 가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몸살 기운을 떨치고 이제 겨우 이틀째 된 채경이 뒷정리를 맡게 됐다. 그런데 채경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보면 오늘 장사가 꽤 힘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힘에 부쳐 평소보다 속도가 더뎠다. 손도 굼뜨고 걸음도 굼뜨고.. 그래서 손님을 치른 시간보다 치우는 시간이 더 걸리게 생겼다. 아~ 언제 끝나지? 너무 힘드니까 설거지까지만 하고 바닥 청소는 오늘 하루 건너 뛸까 그런 생각까지 하는 채경. 고무장갑을 설거지통에 걸쳐 두고, 아픈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의자에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그 소리에 바닥으로 향해 있던 시선이 입구로 향하며, 자동적으로 “어서 오ㅅ..” 인사를 하려는데 말문이 막혀 버리는 채경.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3년간 정말 단 한번도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 없었다. 그 사람이 이 가게에 있는 장면 같은 거.. 그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거라는 상상 같은 거.. 그런데.. 오래되어서 낡고 헤진 것밖에 없는 이름 없는 허름한 식당에, 신이 들어와 있었다. 낡고 초라한, 소리만 요란한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신이었다. 아.. 결국 내 욕심에 내가 졌구나.. 이곳을 떠났어야 했는데, 결국 정든 이곳을 떠나기 싫어서 핑계를 찾다가 이렇게 붙잡혀 버리는구나.. 다른 핑계 대지 말고,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당장 이곳을 떠났어야 했는데.. 괜찮을 거라고,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최면을 걸어 현실이 안 보이는 척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자괴감에 빠져 망연자실이 되어 버린 채경은 안 보이는지, 채경을 바라보며 서 있던 신이 비척이는 걸음으로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입구 바로 앞 자리에 앉으며, 신: 나 밥 좀 줘.. 채경: (신 보는) 신: 해물된장찌개..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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