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궁 들어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좀 놀랐습니다. 매일매일 오는 쏭기자 때문에 텔궁에 출근 도장 찍으시는 분들 많아지신 것 같아요. 예전 텔궁 같아졌다고 하신 대감님도 계신데..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텔궁의 동면도 끝이 나는 걸까요? 수면 아래에 있으면서 다른 작가님들도 많이들 돌아오신 것 같아 반갑고 고마웠어요. 그 대열에 동참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어서 미안하고 조금은 답답하고.. 그랬답니다. 이번 소설을 상상하기 전에는 왕녀를 처음 올렸던 3월 3일을 기점으로 컴백해서 다시 왕녀 올려야지.. 했는데.. 결국엔 수습하기 힘든 왕녀는 잠시 내려놓고(잠시 내려놔야 할 텐데.. 이것 참.. --;;), 새 소설 갖고 왔네요.. 원래는 지금 정신 없이 바빠서 글만 놓고 간다고 하려고 들어왔다가, 또 머릿속에 떠도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어요. 답도 없는 병.. --;; 신이랑 채경이가 지난 편 마지막에 만났다고 할 수도 없는 재회를 연출했습니다. 원래 6편 마지막은 신이 차가 고속도로에서 빠지는 씬에서 장식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자꾸 여러분을 낚기만 하는 것 같아, 7편에 나오는 씬을 가져다 썼습니다. 그 바람에 이번 편에서마저 신이랑 채경이의 제대로 된 재회씬을 보여 주지 못하게 됐어요. 단편으로 끝낼 거라더니 자꾸 사소한 것에 욕심 내고 있네요. 왜 과거 씬에 연연하는지.. --;; (이건 뻘글인데요, 이번 편의 신이는 슬픔이 잔뜩 묻어 있는 탓인지 좀 섹시한 느낌입니다.. 그냥 저는요.. 이 녀석이 나른하게 또는 차갑게 대사 칠 때 왜 이리 찌릿찌릿 한지 모르겠어요. 저.. 변태일까요? --;;) 둘이 만나게 해 주려고 마구 달렸고, 달린 결과를 또 마구 보여 주는 바람에 비축분도 거의 바닥났습니다. 주말에 비축할 수 있을지.. 내일부턴 사무실 이사 땜에 노가다를 뛰어야 할 판인데 그래서 업무를 땡겨서 해야 되는데.. 텔궁 들어왔다가 대감들의 열화와 같은 독촉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또 사무실에서 눈치 보며 이러고 있네요. 그래도 못 말리는 작가와 못 말리는 독자들 때문에 텔궁이 북적거려서.. 좋다고 생각하렵니다. ^^ **답글의 제일 첫머리를 장식해 주신 좋은꿈 대감님.. 이번 짤도 너무 예뻐요. 마지막 밤, 마지막 포옹.. 참 좋아하는 장면인데.. 소설짤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신이와 채경이의 아련한 눈빛이.. 다시금 궁의 추억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자주 와서 좋은데 또 못된 절단신공 발휘를 하기 시작한 쏭기자가 미우시죠? 그래도 저는 대감께서 선물 갖고 짠~ 수면 상승해 주셔서 좋아요.. ^^ 조만간 답장 한번 보낼게요. 매번 메일 받고 답도 안 해서 죄송해요, 라니냐 대감님.. **시크한 신이는 순간적으로 눈에도 안 들어올 만큼 강렬한 채경이 때문에 완전 깜놀했어요 샤이나 대감님.. 바쁜데 이러고 있다는 대감 말에 저도 찔려서 가슴이 콕콕 쑤셨어요. 저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 그래도 선물 받은 저는 기분이 좋네요.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면서요.. 하.. 이래서 못 말린다고 하는 거겠죠? 회상 씬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신이와 채경이가 만났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반갑고 좋으시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아이가 어떻게 재회할지.. 자, 지금부터 보아 주세요~~ ################################################################################################ 똑똑.. 조용히 노크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채경. 두 손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들려 있다. 방금 전 외부에서 일을 마치고 혼자 복귀한 신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부탁한 커피였다. 채경은 오늘, 신과 현수 모두 외부에서 퇴근할 거라고 해서 다른 때보다 일찍 퇴근할 생각이었다. 오랜 만에 신의 복귀로 달콤한 계획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남몰래 아쉬운 한숨을 푸~ 내쉰다. 기분이 쳐진 탓인지 커피를 타는 데도 아주 느릿느릿 굼뜨기만 하다. 표정도 기분을 반영해 무표정하다. 그런데.. 남은 기껏 꿈 같은 퇴근도 포기하고 커피를 타왔는데.. 고새를 못 참고 자~? 신이 알고서 자신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것도 아니면서, 괜한 화살이 신에게 돌아간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모습인데도, 혼자 세운 계획이 신 때문에 깨졌다는 생각에 신의 사소한 행동조차 채경의 눈에 곱게 보이지가 않는다. 왠지 자는 모습이 얄밉기까지 하다. 저렇게 잘 거면서, 커피는 왜 타래? 입술을 삐죽이며, 그래도 상사가 내린 지시라, 커피 쟁반을 들고 신에게 다가가는 채경. 마음은 미워 죽겠는데,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잠든 신이 깰 세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행여나 자신의 발소리에 신이 깰까 봐 발바닥에 온 힘을 실어 최대한 소리가 안 나게 최선을 다한다. 그 바람에 문에서 신의 책상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평소보다 다섯 배는 먼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쨌든 우여곡절한 마음과 과정을 거쳐 신의 책상에 도착한 채경, 커피만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날 건지, 신을 깨울 건지 잠깐 고민한다. 쟁반을 든 채, 곤히 자고 있는 것 같은 눈 감은 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왠지 이 사람의 휴식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신을 곯려 주고 싶은 마음을 배신하고 조용히 커피를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속으로 ‘후~’ 옅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등을 돌리는 채경. 다시 또 저 멀고 먼 문까지 발소리 안 내고 갈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걱정이다. 하지만 별 도리가 없으니 조용히 물러나 주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다시금 발바닥에 온 힘을 불어넣으며 한 걸음 떼려는 순간.. “그냥 그렇게 가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신이 등 뒤에서 말을 하자 화들짝 놀라며 돌아서는 채경. 놀란 채경과는 달리, 너무나 덤덤하게 천천히 눈을 떠 채경을 올려다보는 신. 꿈뻑꿈뻑 놀란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채경의 눈과, 피곤이 묻어나는 신의 눈이 똑바로 마주친다. 자고 있다 생각했던 신이 깨어 있었단 사실도 놀랍고, 신의 갑작스러운 말소리도 놀랍고, 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상황도 놀랍기만 한 채경은, 당혹스러움이 스멀스멀 몰려온다. 입사한 이후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신이지만, 정적이 감도는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른 데도 안 보고 오로지 자신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신을 마주 보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실제로 닥쳐 보니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래서 채경은 얼른 이 자리를 모면하고자, 다짜고짜 고개를 숙여 사과부터 하게 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깨워서 어떡해요..” “..” 더는 할 말도 없고, 대꾸도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신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채경은 한번 더 사과를 하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나한테 사심 없어?” 다시 또 돌아서려는 채경의 발목을 신이 잡는다. 이번에도 채경은 놀랐고,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고 만다. 그러자 신은, 좀 전처럼 채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똑바로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 하지만 좀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채경의 머릿속이다. 처음엔 신이 깨어났다는 데만 관심이 쏠려서, 신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다른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신이 한 말이 신경 쓰였다. 그의 말투가.. 신경 쓰였다. 그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평소에도 신은 채경에게 하대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은 채경의 상사였고, 회사 오너의 아들이었으며, 나이도 세 살이나 더 많았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하대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거나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평소 신이 하는 하대의 정도는, 상사가 신입에게 할 수 있는 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하는 반말이라기보단, 왠지 나이 많은 남자가 나이 어린 여자에게 하는 반말 같았다. 또, 신이 하는 말도 이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심 없냐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나한테 한 말이 맞긴 맞는 건가? 게다가 저 섭섭하면서도 심통 난 표정은 뭘 뜻하는 걸까? 잘 자던 사람 깨웠다고 심술 부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뜻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채경으로선 모를 일 투성이였다. 그래서 멍한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채경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너무나 담담하게 자기 할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아까 같은 상황 안 놓쳤을 텐데..” “???” “내가 “무슨..” “나 보고 설레거나 두근거리거나.. 그런 적 없어요?” “네??” “나 “실장님..” “나한테 사심 없는 여자가 비서로 들어오길 고대해 마지 않았는데.. 막상 그런 사람 들어오니까 섭섭하네~” ‘하.. 뭐래는 거야?’ “어이 없단 표정이네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지금 당신 되게 뜬금 없거든요? 설마.. 술 마신 거 아냐?’ “(픽) ‘저 여자거든요?’ “하긴.. “네??” “동기들 중에서 인기 넘버원이라며?” “..” “우리 사무실 앞 서성이는 남자들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던데.. 다들 채경씨가 여자라는 거 알고 덤비는 거겠지?” “실장님.. 솔직히 이런 얘기 좀 불편한데요..” “왜? 재밌지 않아?” “하나도 재미 없어요.” “이런 게 왜 재미없어?” “..” “남자.. 연애.. 이런 거에 관심 없어?” “..” “그 나이엔 한창 관심 많을 땐데.. 이상하네~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 “왜 자꾸 내 말을 씹어? 내 말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거야 뭐야?” “..” “하.. 끝까지 대답 안 하네.. 지금 나 무시해?” “..” “ “저..” “???”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응..” “혹시..” “???” “실장님,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 “나는 불편하고 재미 없다는데, 왜 자꾸 물어 보세요?” “..” “자꾸 물어 보시니까 나한테 관심 있는 것 같잖아요.” “..” “내가 사심 없는 게 왜 섭섭해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 “특별히 하실 얘기 없으면 그만 물러갈게요. 저도 오늘 마무리할 일이 있어ㅅ..” “관심 있어.” “???” “나, “!!!!!!”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관심 좀 가져 줘.” 사랑은 이기적이다 #07 “거길 또 가겠다고?” “예..” “사방에 대나무밖에 없는데 뭐 또 볼 게 있다고 가냐?” “대나무 보러 온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안 질리냐?” “안 질려요. 또 보고 싶어요.” “하..” “아줌마들은 정말 안 가실 거예요?” “어.. 우린 안 갈래. 다른 구경 할 것도 많은데 갔던 델 왜 또 가?” “그럼 저 정말 혼자 가요?” “가고 싶다면 안 말릴게. 우린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5일장 구경이나 할란다..” “그럼 구경 끝나시면 전화 주세요.” “그래.. 돌아 다니면서 좋은 식당 있으면 자리 잡고 연락할게.” “네~ 이따 봐요~” “조심해서 다녀~ 남자들 조심하고~” “네~~!!” #. 대나무 숲 결국 채경은 두 아주머니를 떼어놓고 혼자 다시 대나무 숲을 찾았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혼자는 아니었다. 태호도 친구들을 떼놓고 왔기 때문이다. 대놓고 채경 옆에 서진 않았으나, 두 걸음 뒤에서 채경을 뒤따르고 있었다. 완전 바다 사나이인 태호가 자신 앞에서만 수줍은 청년이 되는 게 채경은 참 재밌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 더 가까이 곁을 허락할 순 없었으나,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이런 마음으로 태호를 곁에 두는 게 나쁜 짓임을 알지만, 채경은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야박하게 선을 긋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직 정식으로 고백한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선을 긋는 게 더 웃기는 짓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하지만 채경도 안다. 이런 마음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걸.. 못된 심보라는 걸.. 그래서 태호와 선재에 대한 고마움과 호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걸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채경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로 대하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고 역겨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남자와 여자의 선을 그어 두 사람을 내쳐 버리는 건 억지스러운 면도 있었다. 채경이 핑계로 삼는 이유처럼, 아직 두 사람은 채경에게 정식으로 고백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매몰차게 두 사람을 멀리 하는 건 웃기는 행동이었다. 어쨌든 고마운 사람들인데.. 힘들 때 도와주고 힘이 되어 준 좋은 사람들인데.. 굳이 그렇게 잘라내는 게 최선일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다.. 어차피 답이 나오는 일도 아니고, 더 생각하지 말자 싶다. 또, 불현듯 이 좋은 곳에 와서 자신의 못난 마음을 오래도록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인 것 같다. 그래서 머리와 가슴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얼른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내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푸른 대나무들의 향연에 집중하려는 채경. 와~~ 다시 봐도 좋았다. 높다란 대나무들 사이에 서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잠시간은 아무도 떠올리지 않았다. 두고 온 사람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누구도 이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채경: (고개를 들어 키 큰 대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꽤 오랫동안 한자리에 서서 하늘과 대나무가 함께하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채경은 풍경 감상에 푹 빠졌다. 그래서 태호가 곁에 서서 기척을 할 때까지 주변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숨소리도 들리고, 부스럭대는 발소리도 들리고.. 정신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한다. 채경: (돌아보는) 태호: (채경 보는) 채경: (눈앞에 있는 사람이 태호라는 걸 확인하고는 살짝 미소 짓는다.) 태호: 재밌어요? 채경: 네?? 태호: (대나무 흘끔 보며) 저게 재밌어요? 채경: .. 태호: 내 눈엔 그냥 대나무가 서 있는 거 밖엔 안 보이는데, 채경씨 눈엔 재미난 게 보이나 봐요. 어떻게 30분을 한자리에서 같은 것만 보고 있을 수가 있어요? 난 좀이 쑤시려고 하는데.. 채경: 내가 30분이나 이러고 있었어요? 태호: (픽) 해 지려고 하는 거 안 보여요? 채경: 아.. (그제서야 조금 붉어지고 어둑해지는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태호: 하늘을 뚫어져라 보길래 알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눈치 못 채고 대체 뭘 본 거예요? 채경: 그러게요.. 뭘 보고 있었던 거지? 태호: 예?? 채경: 내가 뭘 보고 있었던 걸까요? (도리어 태호에게 묻는다. 말간 얼굴로..) 태호: (자기가 뭘 보고 있었는지를 왜 나한테 묻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채경을 보고 있으려니, 어이 없다는 표정도 못 짓겠다.) 채경: (태호가 멀뚱히 자기만 쳐다보다 시선을 천천히 돌려 숲을 바라본다.) 태호: (채경의 시선 따라 숲으로 눈길을 돌린다.) 채경: 여긴 시간이 멈춘 것 같은데.. 해가 지네요.. 태호: .. 채경: 사시사철, 아침이나 저녁이나 늘 그대로일 것 같은데.. 여기도 시간이 가네요. 태호: .. 채경: 어두운 대나무 숲은 무서운데.. 얼른 도망가야겠다~ ^^ (하면서 걸음을 떼려는데..) 태호: 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줄 알았어요. 채경: (멈칫 서는) 태호: 그 옛날,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걸 알게 된 신하가 소리 친 곳이 대나무 숲이었죠? 채경: .. 태호: 그래서 난, 채경씨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고 있는 줄 알았어요. 채경: .. 태호: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마음에 담아 둔 말 다 하기 전까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채경: .. 태호: 근데 문득 궁금해졌어요. 무슨 얘기길래 저렇게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선 안 될 말을 쏟아내고 있는 걸까.. 채경: .. 태호: 그동안 참은 말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 먼 곳까지 와서 저렇게 넋 놓고 넋두리를 하고 있나.. 채경: .. 태호: .. 채경: (피식) 내가.. 그래 보여요? 태호: (채경 보는) 채경: 속에 담아 둔 말이 차고 넘쳐서, 아무도 들어선 안 될 비밀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 곳에서만 솔직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처럼 보여요? 태호: .. 채경: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태호: .. 채경: 별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채경과 태호가 동시에 돌아본다. 태호: (모르는 남자가 서 있어서 고개를 갸웃한다.) 채경: !!!!!!!!!!!!!!!!!!!! 어떻게.. 어떻게.. 그가.. 서 있었다. 3년간 단 한번도 잊어 본 적 없던 사람.. 버리고 온 이후 늘 그립고 보고팠던 사람.. 신이.. 눈 앞에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소망이 일으킨 환영인 줄 알았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현수가 숨을 헐떡이며 놀라는 걸 보고, 눈앞에 있는 채경이 착각도, 환영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채경을 발견했을 때 멎어 버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귓가엔 온통 심장 뛰는 소리밖에 안 들릴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어댔다. 참으로 오랜 만에 본인의 존재를 알린 심장에 반해, 땅에 붙어 버린 두 다리는 존재를 망각해 버렸다. 자신의 본분을 잊어 먹은 다리 때문에, 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림처럼 서 있는 채경을 바라만 봤다. 도리어 순식간에 옆으로까지 와서 신을 재촉하는 현수의 몸짓과 눈빛이 더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왜 그러고 섰냐고, 왜 달려가서 붙잡지 않냐고 온몸으로 말하는 현수를 무시하고, 신은 채경만 바라봤다. 3년 전 헤어졌을 때와 변함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채경을.. 대나무 숲과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채경을.. 여전히 맑은 눈빛과 입가에 머금고 있는 미소가 어여쁜 채경을.. 죽을 만큼 밉고 미칠 듯이 그리웠던 채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만나면 당장이라도 따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도망가지 못하게 손을 잡고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 발치에서 채경을 보고만 있어도 불안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정말 편안했다. 불안하지 않았다. 채경을 놓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신은 잠시 채경을 보고 있기로 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게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채경과 마주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렇게 신이 꿈쩍도 안 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채경을 지켜보는 사이.. 채경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던 남자가 채경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처음엔 일행이라고 생각 못했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등만 보이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 그 남자가 채경 곁으로 다가서자,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채경이 돌아보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신: !!!!!!!!!!!!!!!!!!!!!!!!!!!!!! 언제나 그를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해 준 그 미소를.. 절대 다른 놈에겐 보여 주지 말라는 경고를 하게 했던 그 미소를.. 낯선 남자에게 지어 보이는 채경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움직일 줄 모르던 두 다리가 휘청대며 반 발짝 뒤로 물러날 만큼.. 그런데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슨 얘길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지, 둘은 소곤거리며 잘도 떠들어댔다.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 거라고 짐작한 적은 있지만, 그걸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은 화를 누를 수가 없었다. 더는, 멀찍이 떨어져 채경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편안했던 마음 따위, 채경을 놓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신: (조용하지만 무섭게 두 사람에게 다가간다.) 신이 걸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편해 보였다. 그 모습이, 신을 참.. 불편하게 했다. 눈앞의 모습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모르는, 그에게 안 들리는 대화를 봉쇄하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채경과의 거리가 가까워져 올수록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있었다. 알 듯 말 듯한 말소리는, 아직까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채경이 걸음을 떼려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멈칫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옛날,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걸 알게 된 신하가 소리 친 곳이 대나무 숲이었죠?” “그래서 난 채경씨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고 있는 줄 알았어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마음에 담아 둔 말 다 하기 전까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근데 문득 궁금해졌어요. 무슨 얘기길래 저렇게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선 안 될 말을 쏟아내고 있는 걸까..” “그동안 참은 말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 먼 곳까지 와서 저렇게 넋 놓고 넋두리를 하고 있나..” 하.. 저건 또 웬 다정하고 걱정에 찬 말이란 말인가? 부드러운 말투 자체도 흠잡을 데 없을 뿐더러, 채경을 배려했다고 고백하는 저 말은.. 얼마나 다정하단 말인가? 비록 남자의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눈빛과 표정이 말투를 닮았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저렇게 뻔히 드러나는 마음을 못 알아볼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특히 채경처럼 사랑을 받아 본 여자가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잠시 침묵하다가 말문을 연 채경의 말소리는 애잔했다. “내가.. 그래 보여요? “속에 담아 둔 말이 차고 넘쳐서, 아무도 들어선 안 될 비밀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 곳에서만 솔직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처럼 보여요?” 참으로 오랜 만에 듣는 채경의 목소리였다. 꿈속에서라도 듣고 싶었던, 그립고 그립던 목소리.. 충격 받아 울분이 치솟은 마음과 별개로, 채경의 목소리를 들은 반가움에 울컥한 감정이 솟구친다. 잠시 헤어져 있어서 잊고 있었지만, 이신은, 이신이란 남자는, 이다지도 단 한번도 다른 이에게 휘둘려 본 적 없던 이신은, 사랑에 빠진 전형적인 남자.. 그게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란다, 저 여자는.. 어떻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지? 멀쩡한 한 남자를 이렇게 바보 만들어 놓았으면서.. 시간도, 감정도, 가족도, 모두 적으로 돌려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으면서.. 채경의 자기 평가에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신은, “정말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이렇게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 수천 가지를 제쳐 두고서 말이다..
채경이 돌아본다. 그리고 낯선 남자도 돌아본다. 남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막상 채경이 자신을 쳐다보니, 남자 따위 안중에도 없어지는 신. 언제나처럼 자신의 말에 놀란 토끼눈이 돼 버리던 채경은, 오늘도 여지없이 저 큰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자신이 십여 분 전 채경을 보고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은 것과 똑같이, 지금 딱 채경이 그랬다. 그래도 놀라 주니 다행이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신이 다시 다가갔다. 신, 성큼성큼 걸어 여전히 놀라고 있는 채경과, 호기심과 함께 경계심을 내보이는 남자 사이에 끼어든다. 태호: (신이 바짝 다가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물러서는 태호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채경과 자신을 훑어 보는 신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싸우자는 얘기였다. 기싸움이든 눈싸움이든 주먹 다툼이든,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태호로선, 채경을 기분 나쁜 남자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함께, 사내로서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몸을 푸는 단계로,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연다. 그런데.. 신: 이 남자, 애인이야? 태호: (멈칫..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인가 싶어 말문이 막힌다.) 채경: (여전히 놀란 얼굴이지만, 신이 던진 질문의 무게 탓에 서서히 초점이 신에게 맞춰진다.) 신: (한 번 더) 이 남자, 니 애인이냐구.. 태호: (느낌이.. 이상하다. 어딘지 모르게 채경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툭툭 내뱉는 말투가, ‘너’라는 호칭이, 짜증이 섞였지만 분명히 자기 여자에게나 할 법한 유치한 영역 표시의 몸짓이, 두 사람이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혹시 이 남자..?!!!!) 신: (채경을 똑바로 쳐다본다. 절대 초조해 보이지 않으려, 아무도 몰래 입술을 깨문다.) 나중에라도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굳이 3년 만에 처음 본 채경에게 제일 먼저 이걸 물을 필요는 없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야 어쨌든 개떡 같은 자신의 기분이야 어쨌든, 일단은 둘을 떼어 놓고 채경만 데리고 어딘가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날 버리고 갈 수 있었는지, 내 생각은 했는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부터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남자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채경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회포를 풀어도 늦지 않았다. 우선은.. 혼자인지를 알아야 했다. 채경: (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어떻게 이 사람이 눈앞에 있을 수가 있는지.. 이게 과연 현실인지, 매일 꾸는 꿈의 연장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날선 긴장감과, 채경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공기가 느껴졌다. 이건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이신은.. 분명 이렇게 만나선 안 되는데.. 절대, 마주쳐선 안 되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 사람을 다시 보여 준 하늘에 감사하고 싶었다. 이 놀라운 우연에, 선물 같은 재회에,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반가운 눈물이 흐르려 했다. 머리를 배신한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려 했다. 자신을 저리 똑바로 쳐다보는 신이라면 채경의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 숨겨야 했다. 반가운 마음도, 감사하는 마음도, 모두 꽁꽁 숨겨야 했다. 그렇다면 아무 죄 없는 착한 저 남자가 내 애인이라고 말해 버리면 끝나는 일이었다. 태호에겐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하면, 착한 사람이라 용서해 줄 것이다. 그래서, 채경: 실장님이 상관할 일이 아닐 텐데요.. 신: (채경 보는) 태호: (채경 보는) ‘역시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군..’ (갑자기 심한 피로감이 든다.) 채경: (애써 담담하게) 그럼 저흰 폐장 시간이 다 돼서.. (하고 움직이려 한다.) 신: (‘저희’라는 말이 대단히 거슬렸지만, 꾹 참고) 나한테 할 말이 고작 그것밖에 없어? 채경: (멈칫) 신: (채경이 멈춘 걸 보고 이번엔 태호를 향해 묻는다.) 이 여자, 당신 애인입니까? 채경: (당황하는) 태호: (신과 채경 번갈아 보는) 채경: 실장님.. 신: (한번 더) 이 여자가 당신 애인입니까? 태호: .. 신: 대답 없는 거 보니까 아닌가 보네? 애인이라면 내가 이러는 거 못 참았을 거 아냐. 채경, 태호: (각자 다른 의미로 할 말 못 찾는) 신: (확인이 끝나자 채경을 똑바로 쳐다본다.) 채경: (눈빛 흔들리는) 신: 우리 얘기 좀 해. 채경: (말들이 우물거려 밖으로 안 나온다.) 태호: (두 사람이 초면이 아님을, 솔직히 말해 꽤 심각한 사이였음을 눈치 챘지만, 채경이 당황해 하는 걸 보고는) 싫어하는 거 안 보이십니까? (끼어들 수밖에 없다.) 신: (태호 흘끗 보고) 그쪽은 빠지죠~ 태호: 네?? 신: 애인 아니라면 빠지라구~ 태호: (신의 반말에 빈정 상해 한 발 다가서는) 신: 나 그쪽이랑 싸울 시간 없거든? 태호: (멈칫) 신: 그러니까 그냥 빠져. 이 여자 손끝 하나 안 건드릴 거니까.. 태호: .. 신: (채경 보며) 이 사람 앞에서 얘기할 거 아니면 따라 와. 채경: (신 보는) 신: 내가 그냥 순순히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채경: .. 신: 난 들어야 할 말도, 해야 할 말도 엄청 많아. 네가 기회조차 안 주고 가 버리는 바람에 쌓인 말들이 너무 많다구.. 채경: .. 신: 그러니까 이번엔 비겁하게 혼자 결정하고 혼자 도망가지 마. 채경: .. 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는) 태호: (채경 보는) 채경: (신의 뒷모습 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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