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진행이 생각보다 잘 되질 않아서 스팀 나오는 사무실에서 스스로 스팀 내면서 발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이번 달 특집이 뇌인데, 뇌라는 놈은 할 때마다 사람을 돌게 해서, 우주만큼이나 사람을 뺑뺑이 돌립니다. 크기는 고작 두 주먹만하다는 뇌가 그 큰 우주만큼이나 복잡하고 비밀 투성이라, 한숨만 푹푹 쉬고 있네요.. --;; 그래서, 텔궁에 오면 안 되는데.. 이러고 또 왔습니다. 이번에 취재하면서 알게 됐는데, 해야 할 일 있는데 딴 짓 하고 싶어 하는 건 그 일에 흥미가 없어서 집중하기 싫어서라네요. 이럴 땐 차라리 다른 걸 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하는데.. 직장인이 그럴 수 있나요? ㅠ.ㅠ (아이 있는 학부모님들은 참고하세요. 애가 책상에 붙어 있기 싫어하면 억지로 앉혀도 소용 없다네요.) 뜬금 없이 와서 더 뜬금 없는 얘길 늘어놓고 있죠? 지금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그래요.. --;; 음.. 지난 편 마지막에 우리 신이가 채경이를 찾아왔습니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이럴라고 지난 번 생뚱맞게 치밀한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게 아니라서, 갖은 우연을 동원하고 있는데요, 과정이야 어떻든 두 아이가 만났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너무 쉽게 쉽게 풀리더라도 노여워하지 마시고, 이렇게 풀릴 거 앞쪽에 왜 그렇게 구구절절히 아프게 했느냐 원망하시지도 마시고, 두 아이가 떨어져 지내면서 힘들었던 걸 보상해 주려는 작가의 착한 의도라 여겨 주세요. ^^;; 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 신이가 참.. 능글맞고 뻔뻔하게 등장할 예정인데요, 이 녀석이 원래 이런 놈이었던가..? 고개 갸웃하지 마시구요, 과거 회상에 등장하는 신이를 떠올려 주시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채경이랑 연애할 때의 신이는 능글맞고 뻔뻔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헤어져 지낸 3년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때로 복귀시킬 생각이에요. 그래야 선뜻 다가설 수 없는 채경이를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리고.. 신이의 손발 오그라드는 애정 표현들.. 각오하고 보시길.. 당부 드립니다. 아~~ 이번 편 마지막 장면에 넘쳐나는 애정 담뿍 신이의 직설적인 대사들..도 대패 준비하고 보세요. 저는 경고했습니다!! 그럼, 저는 스팀 나는 기사를 어떡해서든 정리하고 다음 글에선 개운한 정신으로 인사 드릴게요. ##################################################################################### 난생 처음 하는 거품 목욕에 채경은 지금 무척이나 들떠 있는 중이다. 늦은 오후, 이미 밖은 어둑해지기 시작한 늦가을의 어느 날.. 다른 날과 별다를 것 없이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던 채경의 모니터에 깜빡이는 메신저 알림이 들어왔다. 이에 누군가 싶어 클릭해 보는 채경. -지금 뭐해? 메신저를 날린 사람이 누군지, 어떤 메시지가 떴는지 보자마자 시선이 닫힌 문으로 향하는 채경. 아무래도 저 문 너머에서 열일하고 계신 줄 알았던 실장님께서 무료하신 모양이다. 채팅을 걸어온 걸 보면.. 다른 때 같으면 하고 싶은 말을 문자로 보냈을 텐데, 굳이 메신저로 말을 건 걸 보면 대화를 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둘 사이엔 현수가 떡 하니 버티고 있는 탓에, 통화를 하는 것도 그렇게 자유롭고 편한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채경은 신입이고, 또 비서라는 업무 때문에 사적인 전화를 자주, 오랫동안 하는 건 눈치 보이는 입장이었다.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채경 스스로 눈치가 보였다. 그걸 알고 있는 신은 되도록이면 문자로 얘길 전했고, 가끔 운이 좋아 현수가 없을 때면 채경을 찾아와 농을 걸고 장난을 치곤 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사내 연애, 그것도 비밀 연애를 하다 보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주변 눈치를 피하는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이렇게 가끔씩 하는 메신저 채팅이었다. 문자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건 누가 봐도 사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채팅은 화면만 안 들키면,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었다. 물론! 표정 관리를 잘한다는 전제 하에서.. (채팅 중에 웃긴 얘기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다가 걸린 경험이 있다.) 신은 늘 완벽하게 숨기지도 못하면서 부득불 비밀 연애를 고수하는 채경이 못마땅할 때가 있었다. 물론 자신과의 연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채경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사내에 소문이 난다는 건 부모님 귀에 들어간다는 걸 뜻하는 것이었기에, 일이 단순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몰래 숨어서 사랑을 하는 게 내키는 건 아니었다. 떳떳하게 내 여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세상 누구에게라도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경의 처지와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하는 신이라,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채경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뭐, 굳이 얘기하자면 비밀 연애라서 재미있는 것도 분명 있었다. 감시자인 현수 때문에 연애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많은 걸 차단 당하고 있었지만, 현수를 피해서, 사내 직원들을 피해서 둘만의 신호를 주고받거나 스치는 스킨십,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서 마주앉은 연인에게 보내는 문자, 인적 없는 복도에서의 짧은 키스, 직원들 많은 장소에서 툭툭 던지는 아슬아슬한 애정 표현 등은 짜릿한 쾌감이 있었다. 그래서 여지껏 참고 견딜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뭐든 중독되면 헤어날 수 없다지 않은가? 그 때문에 오늘도 비밀 연애의 묘미를 느끼게 해 주는 메신저 채팅을 시도 중이다. [실장님께서 오더 내리신 업무 현황표 정리 중이에요.] -어디까지 진행됐어? [90% 정도? 한 시간이면 털 수 있어요~ ^^] -그럼 오늘 늦게까지 야근 안 하겠네? [실장님이 더 던져 주지 않으면 아마도? 나 오늘 일찍 퇴근시켜 줄 거예요~?] -왠지 그러기 싫은데? [아 왜요!! --;; 나 요새 다크 서클 엄청나게 커진 거 안 보여요?] -누가 들으면 엄청 혹사시킨 줄 알겠네.. [혹사 당하고 있는 거 아녜요? 맨날 -체력 좋다고 자랑할 땐 언제고.. [안쓰러워서 못 봐주겠다던 분은 어디 갔죠? *.*] -ㅋㅋ 알았어. 오늘은 일찍 보내 줄게. [진짜요~? 싸랑해요 실땅님!! ♡.♡] -일찍 퇴근시켜 주는 게 그렇게 좋냐? 사랑한다는 말에 엄청 인색한 양반이 아주 격하게 표현해 주시네~ [^0^] -근데.. 집에 바로 가지 말고 나랑 좀 놀아. [???] -나 오늘 저녁에 미팅 있는 거 알지? [네. 업체 쪽 임원들이랑 저녁 식사 하신다면서요? 근데 어떻게 놀아요?] -그거 최대한 빨리 마칠 테니까 호텔에서 놀고 있어. [엥!! 설마.. 그 호텔이 임페리얼 호텔은.. 아니겠죠?] -맞는데? [실장님!! 오늘 거기서 저녁 드시잖아요!!] -그러니까 시간 절약되고 좋잖아~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구요?] -어차피 너랑 나랑 룸에 들어가는 시간이 다른데 뭐.. 괜찮아. 안 들켜. [..] -왜 말이 없어? [..] -거절인 거야? [..] -그럼 야근 할래? [예~~?!!!] -야근 하기 싫지? 그럼 호텔에서 놀고 있어. 금방 갈게. 그렇게 해서 어이 없이 호텔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휘황찬란한-그래서 여전히 몇 번을 와도 적응 안 되는- 고급 호텔 룸에 와 있는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과정이야 어떻든 회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보다 100배, 1000배는 나은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혼자서 무얼 하는가 였다. 룸 구경은 10분 만에 끝이 났고, 야경 구경도 10분이면 충분했다. 텔레비전은 평일 저녁에 하는 프로그램 중 딱히 보고 싶은 게 없었고, 기념이라며 셀카를 찍는 것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진 못했다. 웬일인지 전화를 5번이나 걸었는데도 받질 않았다. 많이 바쁜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한 시간이 지난 후, 채경은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 있게 되었다. 무의미하게 방 안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뭘 해야 할지 몰라 두 손 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거품 목욕이었다. 신을 따라 호텔을 올 때마다 혼자서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던 탓에, 호텔 욕실의 멋들어진 욕조를 그저 눈으로만 감상하고 돌아가야 했었다. 욕조 있는 집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처지도 처지이거니와, 여자라면 누구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거품 목욕에 대한 환상이 있지 않은가? 어차피 신은 두 시간이나 지나야 올 거고, 그 시간이면 목욕을 즐기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욕조에 비치돼 있는 목욕제 사용법을 읽고, 시키는 대로 따라 해 보기로 한 채경. 얼마 후 욕조에 따뜻한 물이 차고, 그 위에 하얀 거품이 가득 채워졌다. 이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거품이 일렁이는 물에 몸을 담그는 채경. 원래도 목욕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렇게 꿈에 그리던 목욕을 하려니 떨리기까지 하다. 왠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마냥 들떠서 혼자 미친 여자처럼 까르르 웃음만 난다. 괜히 여주인공들처럼 한쪽 팔을 들어 거품이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타고 내려오게 한다거나, 두 손으로 거품을 공손히 퍼 올려서 입으로 푸~ 불어본다든가, 코끝에 거품을 살짝 묻혀 본다거나, 거품을 두 손으로 훠이훠이 밀어냈다가 밀려간 거품을 두 팔 가득 담아 가슴으로 안아 본다든가, 숨을 가득 들이마시고는 코를 잡고 물속으로 잠수했다가 못 참고 어푸어푸 하며 튀어 올라온다든가.. 어딘가에서 보고 들은 걸 한번씩 재연하며 거품 목욕의 매력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채경. 나중엔 우아한 여주인공을 흉내 내겠다며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와인을 마셔 보기까지 한다. 캬~~~ 감탄사까지 우아할 순 없었으나, 기분만큼은 공주님이 된 것처럼 설레고 좋았다. 그래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허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난생 처음 경험하는 순간을 오롯이 즐기는 채경. 하지만 그래서 더 몰랐던 것 같다. 자기 도취에 빠져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도 못 듣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는커녕 자신을 찾는 신의 목소리마저 채경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고, 서늘한 기운이 욕실 안으로 엄습해 왔을 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목욕하고 있었어?” !!!!!!!!!!!!! 신이 서 있었다. 두 시간 전, 사무실에서 헤어졌을 때 봤던 완벽한 정장 차림의 신이, 다섯 발짝 앞에 서 있었다. 목욕을 하고 있는 순간에 신이 들이닥친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은 알몸인데 반해 신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도 민망했다. 왠지 자기가 상대보다 훨씬 약한 고지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뭔가 설명할 순 없지만 상대적으로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채경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던 신은, 채경과 달리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욕조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신의 발소리에 또 한번 화들짝 놀란 채경은 이대로 신을 맞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물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린다. 욕조로 다가가던 신은 채경이 대체 왜 물속으로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 된다. 왠지 부끄러워하던 것 같던데, 날 피해서 도망간 건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건 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저렇게 숨는다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속아 주는 것도 아닌데.. 또 금방 물 밖으로 튀어 나올 거면서 왜 저런 미련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 앞에서 벗은 몸을 보여 주는 게 부끄러운 건가? 뭐,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보단 저러는 게 낫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숨바꼭질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데.. 그래서 신은, 채경이 다시 물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채경은 신이 밖에 나가서 대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수를 택했겠지만, 신은 꼭 욕실에서 채경과 조우하고 싶었다. 그래서 꾹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채경이 올라올 생각을 안 했다. 1분, 2분, 3분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한 신은 욕조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친 손길로 거품을 걷어내 물속을 바라보았다. !!!!!!!!!!!! 채경이 숨을 참다가 기절했는지 몸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신이 채경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물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그러자 채경이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기절한 게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채경 때문에 심장이 내려앉을 뻔한 신은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목욕 가운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채경. 머리에선 아직도 물기가 떨어지고 있다. 그런 그녀 곁으로 겉옷을 벗고 셔츠 소매를 반쯤 걷어 부친 차림으로 변한 신이 다가선다. 그의 손에는 생수 페트병이 들려 있다. 이제서야 숨 고르기가 끝난 채경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페트병을 내미는 신의 손을 잠시 쳐다보던 채경은 고개도 못 들고 고맙습니다 말하며 받는다. 그 모습을 보고 혼자 픽 웃은 신은, 하.. 짧게 한숨을 쉬고 채경 옆으로 가서 앉는다. “내가 너 잡아먹어?” “???” “뭐가 무서워서 물 속으로까지 숨었어?” “..” “나 좀 섭섭하다~ 누가 보면 강도가 침입한 줄 알겠네~” “미안해요.. 너무 당황해서 그만..” “미안하다면 다야? 남은 기껏 1차에서 끝내고 빨리 오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정작 애인이란 사람은 귀신 본 것처럼 놀라서 도망이나 치고.. 정말 힘 빠져..” “나름 목욕 재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뭐??”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요. 그랬으면 혼자 그러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미안해요.” “하.. 그런다고 뭘 그렇게 의기소침해 가지고..” “화.. 난 거 아니에요?” “화났어~” ‘그러니까 눈치 보는 거잖아요..’ “너 숨 넘어갔나 싶어서 심장 떨어질 것처럼 놀란 게 화나.” “??” “앞으론 그렇게 몸 상하게 하지 마. 니 몸은 내 거야.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다치면 안 돼. 아파서도 안 돼! 알았어?” “..” “밥은 먹었어?” “(도리도리)” “목욕 재계 말고 저녁이나 먹고 있지.. 아, 혼자 맛난 거 먹다가 들켰으면 목이 막혔을려나?” “네??!!” “풉!” “사람 또 놀리고~” “이 재미도 없으면 내가 어떻게 화를 푸냐?” “정말 못 됐어~” “^0^” 사랑은 이기적이다 #11 #. 바닷가 식당 결국 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아니,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떻게 해야 될지 아무 생각도 못했다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아무렇지 않게 채경이 3년 동안 집처럼 지내온 곳에 불쑥 찾아와, 자기집 안방마냥 자리 잡고 앉은 신을..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담양에서처럼 단호하게 입장을 정하지 못한 이유는, 이곳이 집이었기 때문이다. 담양은 스쳐 지나가면 되는 곳이었지만, 이곳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신을 내보낸다 해도 채경이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신에게 잡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담양에서처럼 일시적으로 신을 떼어놓을 방법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태가 되고 말았다. 왠지.. 독에 갇힌 기분이다. 채경, 낡디 낡은 쟁반에 음식 그릇을 내어와 신이 앉은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그릇을 내려놓으면서 눈에 띄지 않게 신을 흘끔거리며 안색을 살펴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포커 페이스 탓에 생각을 읽어내는 데 실패한다. 결국 채경은 밥상을 차려 주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런데.. 물러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대체 어디서 이 남자를 마주봐야 할까? 어떤 얼굴로 마주봐야 할까? 음식을 할 땐 주방에 숨어 있으면 됐는데.. 이젠 어쩐다..? 왜 홈그라운드에서 수세에 몰리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사람은 죄 짓고는 못 사는가 보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이라서, 자신의 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방과 홀 사이에서 우물쭈물 하며 큰 쟁반을 안고 있는데, 신: 어떤 사람은 해물된장찌개라면 치를 떨게 해놓고, 넌 이걸로 밥 벌어 먹고 산 거야? 채경: (멈칫) 신: (숟가락 들며) 너무하네~ 채경: (신 돌아보는..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부드럽고 담담해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신: (채경의 시선 느끼지만 일단 국물부터 떠 먹는다.) 3년 만에 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채경이 그를 위해 끓여 준 해물된장찌개. 채경이 해 준 음식 중 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자, 채경의 집에 가고 싶다는 둘만의 신호이기도 했던 음식.. 그래서, 채경이 떠난 후론 차마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게 돼 버린 애증의 음식.. 그런데 채경을 찾아 미친 듯이 찾아온 바닷가 작은 식당 유리창에는, 손으로 대충 쓴 듯한 <해물된장찌개>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채경이 한 해물된장찌개를 맛본 후 혜옥이 식당 메뉴로 선정하면서 써 붙인 것이라는 건 모른 채, 그걸 보고 잠깐 동안 울컥했던 신이다. 비바람에 바래고 해진 종이가 마치 자기 마음 같아서 더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오후 마라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에 복귀했을 때, 강현으로부터 연락을 바란다는 메모를 받았다. 최근 채경과의 일도 있고, 강현과도 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됐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 잠시 메모를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고, 웬일인지 강현의 다급함이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껴졌다. 연락이 하도 안 와서 전화를 안 해 줄 줄 알았다는 강현의 말에, 그냥 피식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고 신이 물었고, 다급하던 강현은 그때부터 조금씩 망설이기 시작했다. 이에 다른 이들에겐 절대 보여 주지 않는 무한 인내심을 발휘해 강현의 대답을 기다려 줬다. 그래서 듣게 된 대답.. 어렵게 그건.. 채경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신은 강현의 전화를 끊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줄줄이 잡혀 있던 각종 스케줄-회사 차원에서 엄청 중요한 것들로 채워진-도 무시하고, 날아오는 동안 현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뒤를 부탁한다는 무책임한 말도 했다. 하지만 신이 생각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다른 건.. 정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채경이 그 자리에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혹시라도 채경이 없을까 봐 걱정했다. 자기가 도착했을 땐 이미 사라져 버렸을까 봐, 그래서 놓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신은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오직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바보처럼 눈물이 날 뻔했다. 신: 맛이 하나도 안 변했네.. 채경: (신 보는) 신: (채경 보는) 채경: (자기도 모르게 숨 삼키는) 신: 여기 있었어? 채경: .. 신: 여기서 내내 살았었어? 채경: (시선 피하는) 신: 나.. 안 보고 싶었어? 채경: (쟁반 꽉 쥐는) 신: 니가 그렇게 끝내고 가면.. 우리가 끝나는 거야? 채경: (치고 올라오는 감정 무시하고) 우리 얘긴.. 지난 번에 끝난 것 같은데요.. 신: 아니~ 지난 번에도 일방적으로 니 얘기만 하고 끝났잖아. 근데 어떻게 끝이야? 아니, 우리한테 끝이 어딨어? 채경: 실장님! 난 들을 얘기 다 들었어요. 할 말도 다 했고! 신: 그럼.. 나랑 정말 끝냈다는 애가 왜 내 눈도 제대로 못 봐? 채경: .. 신: 나한테 아무 감정 없으면 너 이렇게 긴장하고 당황해 하면 안 돼. 자연스러워야지~ 채경: 감정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워서 이래요. 신: 왜? 절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던 도피처가 발각된 게 두려워? 그래서 네 마음까지 드러날까 봐 걱정돼? 채경: 실장님! 신: 니가 그날 왜 그렇게 나한테 모질게 굴었는지 나 알아. 채경: .. 신: 그날은 면전에서 그러는 바람에 진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너무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아는 약속 잘 지키는 채경: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요, 정말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지난 과거예요. 떠나온 계기가 무엇이든간에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구.. 감정도 많이 변했어요. 네~ 처음엔 좋아하고 있는데 떠나온 거라서 실장님이 많이 보고 싶고, 그립고.. 사랑하는 마음도 평생 안 변할 줄 알았어요. 너무 미안해서 잊으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구요.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살아야겠더라구요.. 실장님만 생각하면서 살 순 없었어요. 신: .. 채경: 실장님은 날 붙들고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난 여유가 없었어요. 나 아니면 아무도 먹여 살려 주지 않는 인생이라서 사랑만 품고 살 순 없었어요. 그게 참.. 엿 같고, 서럽기도 했는데.. 그래서 또 살아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신: .. 채경: 이런 얘기 구구절절히 늘어놓기엔 내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담양에선 담백하게 얘기했던 건데.. 그게 잘 전달이 안 됐나 보네요, 여기까지 오신 거 보면.. 근데 어쩌죠? 난 정말 과거에서 걸어 나왔는데.. 신: .. 채경: 실장님이 과거에 갇혀 산다고,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는 거.. 미안하긴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진 않아요. 신: .. 채경: 그러니까 이러지 말아요. 난.. 실장님이랑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맘 없어요. 신: ………………………………언제까지 네 감정을 쏙 뺀 얘기 듣고 있어야 돼? 채경: ??? 신: 사랑만 품고 살 순 없었겠지만, 사랑을 놓고 살진 않았잖아, 너.. 채경: !! 신: 네 가슴에 내가 없다고? 채경: .. 신: 네 사랑은 이미 식었다고? 채경: .. 신: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채경: .. 신: 언제까지 그럴 거야? 언제까지 연기할 거야? 채경: 연기 아니에요. 신: 아니! 너 연기하고 있어. 아니, 거짓말 하고 있어. 채경: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신: 네 눈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채경: .. 신: 그래서 내가 너 사랑했던 거고.. 그래서 널 믿을 수 있었어. 그게 내가 아는 이건 시간이 지난다고 변하는 게 아냐.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사람의 본성이 바뀌진 않아. 채경: .. 신: 그걸 지난 번엔 내가 깜빡 했어. 너 만난 거에 놀라서 어떻게 됐었나 봐. 지금은 이렇게 빤히 보이는데 그땐 왜 못 봤는지.. 하.. 3년 동안 나도 좀 사랑이 식었나? 채경: ‘실장님..’ 신: 그러니까 우리 더는 이런 감정 소모전 하지 말자. 이렇게 다시 만난 거.. 넌 안 행복해? 채경: .. 신: 3년 동안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 이뤄졌는데.. 안 기뻐? 채경: .. 신: 우리 정말..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야. 근데 왜 쓸데 없는 거짓말 하면서 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야 돼? 채경: .. 신: 네가 미안해 하는 것도 다~~ 이해하고, 당장 내 품에 뛰어들 수 없는 마음이란 것도 다~ 이해해. 내가 다 이해한다는데 뭐가 문제야? 넌 내가 괜찮다고 하면 그냥 알았다고 하고 다시 나한테 오면 되는 거야. 채경: .. 신: (흠~) 우리 엄마한테 돈 받은 것 땜에 그래? 채경: (입술 깨무는) 신: 그거 잊어 버려~ 그게 뭐? 뭐가 어때서? 채경: ‘그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구요..’ 신: 돈 받은 게 양심에 걸려? 그래서 돈 받은 입장에서 없던 일로 할 수가 없겠어? 채경: .. 신: 어차피 이번 일에 깨끗한 사람 아무도 없어. 근데 지금 와서 무슨 양심을 따져? 채경: 네?? 신: 우리 엄마도 치사했고, 할 말 없는 입장이야. 오히려 어른으로서 이런 일을 부추기고 동조했다는 게 더 웃겨. 채경: 이건 내 잘못이에요! 사모님이 욕 들을 일 아니라구요. 신: 아니~ 너만큼이나 우리 엄마도 잘못했어. 그러니까 너만 양심 지키려고 애쓰지 마. 어차피 한번 무시한 양심, 이번에도 무시하면 그만이야. 어려울 거 없어. 그냥 눈 감아~ 그래서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무시해 버려. 난 그럴 수 있어. 채경; 실장님.. 신: 난 이번 일에선 양심 같은 거 생각 안 할 거야. 그것 땜에 널 다시 잃을 생각도 없고.. 채경: .. 신: 그러니까 니가 생각을 바꿔. 그러면 일은 쉬워져. 채경: (하..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신에게 더 이상 어떤 말도 소용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완전히 동조할 수 없는 탓에, 확고하기만 한 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괜스레 울컥해지는 마음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아 시선을 떨군다.)
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채경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저 녀석의 성격상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당장 아무렇지 않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한 중대한 실수이기에,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고집을 부릴 거라고 짐작했다. 아마, 그는 기다려 줘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밀어내고 거부할 채경을 다독이고 괜찮다고 말해 주며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다시 처음 만난 오늘은 이 정도에서 물러나 줘야겠다 생각한다. 그래서,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 전환을 꾀한다. 얘기하느라 놓았던 수저를 다시 들면서, 신: 확실히 해 둘 게 있어서 묻는 건데.. 채경: .. 신: 전에 대숲에서 봤던 그 자식.. 채경: (신 보는) 신: 너랑 아무 사이 아닌 거 맞지? 채경: 네?? 신: (픽 웃는다.) 채경: (어이 없다.) 신: 그렇게 볼 거 없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채경: 하.. 신: (밥 한 술 입에 넣고는) 아, 그리고.. 여긴 호텔 같은 거 없지? 채경: ‘그런 게 있겠어요?’ 신: 어차피 민박 같은 데서 잘 거면, 니 집에서 자는 게 낫겠다, 그치? 채경: 네?!!! 신: 왜 놀래? 너, 나 안 재워 줄 거야? 채경: 하..
#. 채경의 집 “누구신가?” 잠자리에 누웠다가 실랑이 하는 신과 채경 때문에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 혜옥은, 채경이 허우대 멀쩡한 도시 남자를 하나 붙이고 나타난 걸 보고 툇마루로 나온다. 누군지 물어보는 혜옥에게 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될지 모르겠는 채경, 순간 당황한다. “채경이 애인입니다.” 할 말을 못 찾고 있던 채경을 대신해 신이 대답한다. 이에 깜짝 놀란 혜옥이 다시 채경을 쳐다본다. 더 의아한 눈을 한 혜옥을 보고 더 할 말을 못 찾는 채경. 이 상황이 자기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남한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채경의 평소와 다른 모습과, 신의 대답을 버무려 혜옥은 생각보다 쉽게 결론을 내린다. 지금 마당에서 채경을 꼭 붙들고 서서 떨어지지 않는 남자가 아이 아빠라고 말이다. 그래서 더는 캐묻지 않고 채경에게 밤이 늦었으니 일단 들어오라고 한다. “잠자리 봐 주고 넘어와..” 이렇게 얘기하고 궁금증 한아름 안고 방에서 채경을 기다리려고 생각했던 혜옥은,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채경이 저랑 잘 건데..” !!!!!!!!!!!!!!! 두 여자가 동시에 놀라서 신을 쳐다보았다. 물론 조금씩 다른 이유로 놀란 것이긴 하지만, 분명 신이 한 말에 화들짝 놀란 건 똑같았다. 게다가 채경은 놀란 것과 함께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대체 혜옥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도 신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생글거리기만 한다. 3년이란 시간이 정말 없었던 것처럼 굴고 있는 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무너져 버린 신에 대한 경계와 단호한 태도는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대책도 없이 말린 건지, 어쩌다가 신이 여기까지 왔는지.. 정말 모르겠다. 신: 여기가 니 방이야? 채경: (뚱한 표정으로 신 보는) 신: (눈으로 방을 훑어 보며) 내가 본 방 중에 제일 작다.. 채경: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가슴까지 덮는다.) 지금 신과 채경은 양쪽 벽에 등을 기대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채경: 정말 이러고 잘 거예요? 신: 안고 자게 해 주면 이렇게 안 자도 돼. 채경: (할 말 없다.) 신: 나도 보초 서는 것처럼 문가에서 자는 거 내키지 않아. 그래도.. 아직은 니가 도망갈까 봐 무서워서 이렇게 자야겠어. 채경: .. 신: 널.. 못 믿어서가 아냐. 널 믿어서 이래. 네 양심을 믿고, 네 약속을 믿고, 네 성품을 믿어서 이러는 거야. 채경: .. 신: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이렇게 자자.. 채경: .. 신: (불 끄는) 채경: .. 신: (눈 감는) 채경: .. 신: .. 채경: .. 신: .. 채경: ……………………………….나.. 안 미워요? 신: .. 채경: ……………………………………어떻게.. 지금도 내가 좋을 수가 있어요? 신: (눈 뜨는) 채경: ………………………….내가 왜 떠났는지 알았잖아요. 근데도.. 안 미워요? 신: 너 미워. 채경: .. 신: 정말 미워. 채경: .. 신: 너무 미워서 불행해지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 채경: .. 신: 나 버리고 간 거 죽도록 후회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 너무 미워서.. 정말 너무 미워서.. 채경: ‘근데 왜..’ 신: 근데.. 보고 싶었어. 너 미운 만큼 또 그렇게 보고 싶었어. 채경: 바보네요? 신: (피식) 그래.. 바보야. 이신은 채경: (울컥) 신: 그렇게 미웠는데도..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바보야, 이신은.. 채경: .. 신: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바보가 돼도 천치가 돼도 눈 앞에 니가 있다는 게 좋으니까.. 채경: .. 신: 여전히.. 널 사랑하고 있는 내가 좋아. 채경: (흡) 신: 그래.. 난 여전히 널 사랑해. 바보 채경: (투둑- 눈물이 터지는) 신, 잠시 채경을 어둠 속에서 바라본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채경이 눈물 흘리고 있음을 꿰뚫고 있다. 잠시 망설이던 신은, 무릎걸음으로 채경에게 다가간다. 신이 다가서는 걸 잠시 거부하는 몸짓을 채경이 보이지만, 신은 가볍게 저지한다. 그리고는 그 큰 손으로 채경의 뺨을 얼룩지게 하고 있는 눈물을 훔쳐 준다. 아마도.. 이 작고 어두운 방에서 그가 모르는 동안 이렇게 울었을 것이다, 이 아이는.. 모질지도 못하면서 모질게 돌아선 이후,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울며 지새웠을지.. 그때 흘렸던 눈물도 자기 탓이었고, 지금 흘리는 눈물도 자기 탓이다. 홀로 울 땐 닦아 주지 못했던 눈물을, 지금부터는 닦아 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이렇게 울게 하는 미안함을, 감사함으로 무마하고 싶은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정말 이기적이게도 눈물 흘리는 채경이 너무 곱고 예뻐서, 자기 때문에 울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자기 때문에 울 채경이 고마워서, 신은 눈물로 얼룩진 채경의 눈가로 입술을 내리고 만다. 그리고 잠시 후, 작게 흐느끼고 있는 채경의 입술을 그의 입술로 부드럽게 덮는다. 홀로 감당해 온 흐느낌을, 슬픔을, 눈물을, 그가 평생 책임져야 할 채경의 사랑을, 그렇게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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