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기자입니다.. 다른 때보다 조금 이르게 와서 왠지 모르게 뿌듯한 밤이네요.. ^^ 마음이 울적한 일이 있어서, 주말에 분발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컴터를 마주하고 앉아 글을 쓰는데 멈출 수가 없더군요.. 신이랑 채경이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어쩌다 보니 이번 편은 거의 두 씬에서 끝이 나 버렸는데요.. 임금님의 활약이 대단하답니다. 거의 전편에 걸쳐서 등장하는 우리 임금님.. 간만에 주인공 대접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인간적으로 안쓰러운 장면도 보여 주시게 됐구요.. 쓰다 보니 우리 임금님께서 땅바닥을 뒹구는 모습까지 그리게 됐는데요.. 그 장면을 쓰면서 저는 왠지 모르게 임금님이 안쓰럽고 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채경이라는 지원군을 얻었다 하더라도, 왕으로서 혼자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작가인 저도 새삼스레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 채경이가 폐하의 사과를 덥석 받아 줬어요.. 시끌벅적한 부부 싸움으로 승화(?)시키고 싶었으나, 그러면 우리 임금님 정말 기절하실 것 같아.. 이 정도 선에서 화해시키고 말았습니다. 뭐, 채경이가 뒤치닥거리 하느라 볼멘소리를 할 테지만.. 채경이 몰래 임금님께서 큰 일을 하셨으니.. 봐 줘도 되지 않을까.. 하고 납득해 버렸어요. ^^;; 어찌됐든 임금님께서는 큰일을 끝내시고, 무사히 왕비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으로 겪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과 경험들로 인해 불안불안하긴 하지만, 현명한 분이니 잘 이겨낼 거라 생각하구요.. 므흣한 신혼 생활로 돌려 보내 줄 생각이에요. 음.. 시시각각 두 사람을 조여오는 검은 그림자는 치밀하고 잔인하지만.. 아직은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만큼 두 사람에게 고민하게 하진 않으려구요.. 지금은 그저 두 사람에게 예쁘고 행복한 일상을 선물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두 아이의 티격태격 하는 신혼 생활을 즐겨 주세요.. 뚱뚱한 백설이, NeverAGAIN, 에메랄드, 희선맘, 오만과편견, park, 아짐, Jean, 땅이, 로사리오, 동현맘, 이미지, 연꽃, 바이러스5, 알프스, 햇살 가득한, 시리우스, 프리티우먼, 파란하늘, 커피한잔, 도연천사, 요술색연필, 비타민, 하얀비, 박현진, 야구광, 가을하늘, 등꽃여인, 계룡산줌마, 시베리안꼬꼬, 미래소년코난, 가넷, 소원, -수정-, chihead, 중일맘, 맑은 하늘, L군, 우실이, 그리움, 보보보, 사과꽃향기, 라떼, 요안나, 천칭자리, 하늘바라기, 블랙커피, 리아, 미쁨, 강세주약천, 비밀, 쥰세이, 주사랑, sunrainmaon, 큰손, 이쁜엄마, 카시오페, 나무의자, hyunju9220, 저승사과, 첫사랑, sinok, 아로아, 선아, 토토, 보리수, 바람처럼, 가을하늘, 꿈꾸는날, 윤서모, 마라이, 카오스, 푸른장미, 구찌, 봄비, serendipity, 세이지, 레드팁, 미니, 플라워, 라니냐 대감님까지.. 구독료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말 구독료 내 주시는 것에 토달면 안 되고, 감사하는 마음만 가져야 하는데.. 급감하는 댓글수, 추천수에 신경쓰지 말자, 신경쓰지 말자 주문을 외워도.. 욕심 많고 이기적인 인간인지라 자꾸만 시선이 가고 실망을 하고 마네요.. ;;; 줄어드는 소설 숫자에 마음이 휑한 여러분들 마음을 더 무겁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제가 힘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원천은 여러분의 흔적들이에요. 그 흔적들이 줄어들다 보니, 덩달아 어깨에 힘이 빠지고 신이 나질 않네요. 그래서 글도 재미없어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돼요. 저는 아마추어이고, 본업도 따로 있다 보니, 프로처럼 책임감 있지는 못하나 봐요.. 쌀쌀해진 날씨에 마음까지 휑해지고 있는 쏭기자에게 따뜻한 힘을 보태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그럼.. 저는 다음 편에 다시 인사 드릴게요.. 건강하세요!! ############################################################################################ 제42화 임금님이 ‘처음’에 대처하는 자세 #1. 궁궐 일각 깜깜한 밤,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궁궐의 한적한 담장 아래.. 달빛마저 숨어 버린 밤은, 어둡고 고요하고 적막하다. 적막한 공기를 해치지 않으며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 몇몇 그림자는, 삼엄한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물 흐르듯 스쳐간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의 기(氣)를 수혈 받아, 일시적으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이에, 무수한 경비병들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왕명(王命)을 수행 중이다. 그렇게 환익: (착지한 후 미끄러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신: (뒤돌아 보는) 환익: 완료되었습니다, 폐하.. 신: 다 끝난 거야? 환익: 예.. 이제 곧 월희와 미오, 대장님도 올 겁니다. 신: (그럼 이제 내가 몸을 풀 차례인가?) 환익: (슬며시 고개 들어 신 보는..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셔서 폐하의 표정이 보이질 않는다. 초반에 계획을 얘기하실 땐 흥분하신 듯 활달하셨던 분이, 막상 일에 착수한 후로는 더할 수 없이 차분하셨다. 지난 닷새 동안 치밀하고도 신속하게 일을 진행시킨 결과, 궁 곳곳에 표식을 심는 작업이 완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폐하께서 표식을 중심으로 궁 전체에 결계를 치는 일이었다. 그것만 끝난다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닷새간의 작업이 끝날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불면의 밤도 끝이 날 것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달랑 넷이서 이 넓은 궁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제법 긴 가을밤도 짧기만 했다. 동 트기 전까지 무수한 경비병들을 뚫고 궁 곳곳에 눈에 띄지 않게 표식을 심느라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졌고, 몸은 곧 죽을 것처럼 진이 빠져 버렸다. 그래도.. 오늘로서 끝이었다. 폐하께서 잘만 해내신다면 오늘로서 사상 최강의 방어막 구축 작전은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폐하는 해내실 것이다. 우려는 많았으나, 실패는.. 없으실 것이다. 폐하이시니까.. 운우국의 임금님이시니까..) 신: 초승달이군.. 환익: (신 보는) 신: (달 보며) 그믐부터 달초까지.. 하늘이 우릴 도왔네.. 환익: 달빛과 상관없이 사람들 눈에 우린 안 보였을 겁니다. 신: 가끔은 중전처럼 기색에 민감한 사람도 있으니까.. 환익: .. 신: 어쨌든 고생 많았다.. 닷새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환익: 폐하께서도 못 주무셨잖습니까? 신: 일을 벌린 장본인이 자면 안 되잖아. 환익: 다른 왕족들은.. 아니, 양반들은 명령만 하고 뒤로 물러나 있기 마련입니다. 신: (환익 보는) 환익: 성공하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쌓는 데 이용하고, 실패하면 무책임하게 아랫것들을 버리지요.. 그래서 그들은 단 한 번도 밤을 새며 몸을 힘들게 하지도 않고, 모진 고초를 겪으며 뛰어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방안에서 편안하게 입만 놀리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요.. 성공을 취할 것인지, 실패한 수하들을 버릴 것인지.. 그런 그들에겐 책임도.. 양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 ………………………………………..너도 양반이야.. 환익: 예.. 양반이지요.. 신: 안 그런 양반들도 있어. (너처럼..) 환익: 그러나 양반이란 이름 자체가 역겨운 집단의 대명사입니다. 신: 그래서.. 네 자신이 역겨워? 환익: 때로는요.. 신: 왜 갑자기 그런 얘길 입에 담는 거야? 평소.. 정치적 언사는 잘 안 했잖아. 환익: 무언가.. 다가오는 것 같아서요.. 신: ??? 환익: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후로, 정세는 안정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사건 사고가 터지긴 했으나, 그건 그저 그런 일들에 불과했지요.. 헌데.. 신: ‘헌데..?’ 환익: 간택령이 내려진 이후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불연속적이면서도 공통된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 그게 무슨 소리야? (최근이 아니라, 간택령까지 이 수상한 낌새가 거슬러올라간단 말야?) 환익: 간택령을 망치려 했던 희빈마마부터 해서, 국경 지방에서의 무영국측의 도발 시도와, 중전마마를 시해하려 했던 희연 공주.. 일가족 암살을 이용한 악성 유언비어 유포, 최근 도성 시내를 흉흉하게 하고 있는 얼굴 없는 살인마까지.. 모두 왕실을 향하고 있습니다. 신: 왕실..? 환익: 예.. 그 대상은 왕비님이거나 폐하이시거나 각기 달랐지만.. 결국은 왕실에 대한 비난과 불신으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신: 그래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게 뭔데? 환익: (그걸 몰라 물으십니까?)………………………………..역모겠지요.. 신: (피식 웃는다.) 환익: (왜 웃으십니까? 지금 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말씀 올리고 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농이 아닙니다! 신: 알아. 너 지금 무지무지 심각한 거.. 환익: ‘헌데 어찌 웃으십니까?’ 신: 근데.. 너무 비약이 심해.. 환익: 예?? 신: 지금까지의 일들이 역모로 귀결되기엔.. 억지스러운 면이 많아. 환익: 헌데.. 어찌 이리 방어하십니까? 신: (환익 보는) 환익: 어느 곳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술수까지 동원하여 궁을 방어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신: .. 환익: 폐하께서도 무언가 느끼고 계신 게 아닙니까? 신: .. 환익: 해서, 이리 준비하는 게 아닙니까? 신: ‘그런가..? 그래서 내가 이토록 궁을 방어하려고 노력하는 건가?’ (잠시 생각하게 되는) 환익: 다른 때와는 달라 보이십니다. 신: ………………………………..내가 말이냐? 환익: 예.. 신: ………………….내가 달라 보인다~? 환익: (신 보는) 신: .. 환익: .. 신: 너한테 내가 달라 보였다면.. 그건 불길한 예감 때문만은 아니야. 환익: ‘허면..?’ 신: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환익: ……………………………..중전마마.. 때문이옵니까? 신: (피식 웃는다.) 환익: (폐하의 웃음이, 자신의 짐작이 맞아 그러시는 거라 생각한다. 이전과 달라진 상황이라면 중전마마밖에 다른 답이 없을 것 같다.) 신: 중전을 지키고 싶은 마음.. 그래, 그게 제일일지도 모르지.. 환익: (신 보는) 신: 내겐.. 딱히 목숨 걸고 지키고 싶은 게 없었어. 태어나서 보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내 삶이라는 건, 오로지 왕위를 계승할 미래를 준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상상할 수도, 꿈꿀 수도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겐 오히려 태자라는 자리가 숨막힐 때가 더 많았어. 그러니 목숨 바쳐 지키려는 의욕도 없었지.. 가끔은.. 나를 옥죄는 이 자리를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고..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어. 도망간다고 벗어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렇다면 지키는 것 밖엔 방법이 없잖아. 환익: .. 신: 의무감으로 감내해야 했던 그 시절.. 나를 지탱해 준 건, 유치한 복수심이었어. 환익: 복수심..이요? 신: 그래.. 복수심.. 나를 위협하던 그 무수한 세력들.. 왕자를 비웃던 그 무례한 녀석들에게 복수해 주고 싶었어. 반드시 내가 왕이 되어 밟아 주겠다고.. 나를 비웃던 눈꼬리를 공포에 떨게 해 주겠다고.. 그러니 기다리라고.. 환익: .. 신: 실제로 왕이 된 지금은 마음대로 죽여 버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땐.. 왕이 되면 다 죽여 버리고 싶었어. 그런 나를 교화시키려고 좌상이 애를 많이 썼지.. 비뚤어진 욕망을 눈치 챈 후로 잔소리가 어찌나 심해졌는지.. (생각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환익: (좌상 대감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적이 누구든, 이치에 바른 행동을 하실 분이니까..) 신: 그때나 지금이나 난.. 왕족으로서의 드높은 자긍심보다는, 나를 비웃고 무시하는 놈들에게 내 신분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 그들이 아무리 날 무시해도 내가 왕자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때를 기다리면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결국 ‘그 때’는 그들이 마련해 줬고, 난 손쉽게 복수할 수 있었어. 환익: .. 신: 복수를 하려고 지킨 자리였어. 그런데 보위에 오르자마자, 그보다 더 통쾌할 수 없는 복수를 해 버렸잖아. 그러니.. 내게 남은 게 뭐가 있겠어? 이제는 날 무시하는 놈들도 없고, 비웃는 놈들은 더더욱 없는데.. 그렇다 보니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내겐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어. 마지못해 하는 건 아니지만, 왕좌라는 게 그들이 그렇게 갖고 싶어 목숨을 걸었던 것만큼 탐나고 욕심 나는 자리는 아냐, 나한테는.. 잃는다고 큰 문제 될 것도 아니니까 지키고자 하는 열의도 없었고.. 내가 어떻게 되든 그것도 상관 없었어. 환익: 폐하!! (폐하 옥체에 문제가 생기는 게 어떻게 아무 문제가 안 됩니까? 어찌!!) 신: (환익이 소리치든 말든 담담하게) 잃는 게 없다 생각하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어. 환익: (씩씩거리며 신 보는) 신: 모든 걸 다 내어 줘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리어 객관적으로 임할 수 있거든. 그에 비해 지키고 싶은 게 많아서 잃을 게 많은 사람은.. 필사적인 반면에, 겁도 많아.. 지면 안 되니까.. 다치면 안 되니까.. 살아서 내 소중한 것들을 누려야 하니까.. 그래서 실수를 하고, 움츠려 들고, 여유가 없어져. 구석에 몰리는 건 시간 문제고.. 환익: .. 신: 그런데 지금의 내가 그래.. 환익: (신 보는) 신: 잃을 게 없어서 천하무적이었던 이신은 없어. 지키고 싶은 게 생겨서, 겁쟁이가 된 이신만이 남았어.. (하..) 그래서 필사적이야, 지금.. 환익: .. 신: 중전도 지키고 싶고.. 중전을 이끌어 줄 할마마마도 지키고 싶고.. 중전의 가족도 지키고 싶고.. 중전이 거하는 궁도 지키고 싶고.. 중전을 지켜야 하는 너희들도 지키고 싶고.. 그리고………… 나를 지키고 싶어. 환익: (신 보는) 신: 그녀를 이 새장 속에 데리고 들어온 이상, 난 책임을 져야 해. 중간에 도망가면 안 돼. 이곳으로 끌어들여 놓고 나만 자유롭게 떠나선 안 돼. 반드시.. 반드시 내가 살아야 돼.. 환익: ‘폐하..’ 신: 단 한번도.. 내 목숨에 집착해 본 적이 없었어. 살고 싶어서.. 그저 살고 싶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 헌데.. 지금은 살고 싶어. 그 사람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 어디 하나 부러지지도 않고, 무엇 하나 틀어지지 않고 멀쩡하게.. 멀쩡한 채로 백년해로(百年偕老) 하고 싶어. 그러려면 난 살아야 돼.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여길 지키고 막아야 해.. 환익: .. 신: 네가 보기엔 안 하던 짓 해서 걱정스럽겠지만, 난 작은 공격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만큼 절실해.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아선 안 되잖아. 환익: 폐하를 소중히 여기게 된 점은.. 안심할 일이군요. 신: (환익 보는) 환익: 늘.. 몸 상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시고 과로하는 모습 뵙는 것도 곤욕이었는데.. 이제는 폐하의 몸을 스스로 아끼겠다 마음 먹으셨다니, 저로선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신: .. 환익: 폐하께서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해도 목숨은 하나입니다. 그 목숨.. 폐하의 것이 아니라 수천 번 말씀 올렸으나 흘려 듣기만 하시더니.. 언제 기회 봐서 중전마마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해야겠습니다. 신: (살짝 눈 흘기며) 중전에게 꼭 그렇게 내 못난 얘길 전해야겠어? 환익: 폐하께서 좋은 방향으로 변하셨다는 얘길 들으면 기뻐하실 분입니다. 그걸 모르십니까? 신: 내 아내를 내가 너만큼이나 모를까~? 환익: 허면, 요즘 왜 교태전에 들지 않으십니까? 신: (멈칫..) 환익: 밤에야 작업하느라 못 들르신다 하더라도, 어찌 중전마마께서 찾아오시는데도 만나지 않으십니까? 신: 남의 부부 일에 참견하지 마! 환익: 그러다 소박 맞으십니다. 신: (눈썹 꿈틀) ‘뭐라? 소박? 이 내가? 남자인 내가? 임금인 내가? 소박이라고!!!’ 환익: 중전마마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겁니다. 신: (꿈틀거리며 올라갔던 한쪽 눈썹이 제자리를 찾아온다. 그리고 환익의 얘기를 곱씹어 본다. 중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나를.. 소박 맞히고도 남을 여자였다. 내가 임금이든 누구든 괘념치 않고 혼쭐을 내 줄 여자였다.) 환익: 더 늦기 전에 화해하십시오. 신: 싸운 적 없거든? 환익: 그럼 실수하셨습니까? 신: 내가 뭔 실수를 해~? 환익: 중전마마께서 잘못한 게 있으십니까? 신: 그런 거 없거든? 환익: 그런데 왜 피하십니까? 신: (피한 적 없다고 맞받아치려다가, 그건 양심상 걸려서 말이 목구멍에 걸려 버린다. 할 말이 막혀 버린 탓에 다른 곳 둘러보는 척하며) 나머지 애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환익: (신 물끄러미 보는) 신: 흠흠.. (헛기침을 하며 두리번두리번 한다.) 환익: (현실 회피를 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저리 발뺌을 하시니 더 캐묻기도 어렵다. 부디 두 분이 빨리 화해를 해서 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 주셨으면 좋겠다. 폐하께서 이리 아끼고 있다는 걸 중전마마께서도 알아 주셔야 할 텐데.. 그러면 그동안의 앙금은 눈 녹듯 사라질 텐데.. 얼른 오해를 풀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신: ……………………………………….저기들 오는군.. 환익: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신의 얘기에 고개를 든다.) 신: (가까워져 오는 세 명의 투명 기사들을 똑바로 직시하며 맞이할 준비를 한다.) 환익: (자리에서 일어나 세 명의 동료를 기다린다.) 원호, 월희, 미오: (밤금 전 환익과 마찬가지로 땅에 착지해 미끄러지듯 신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린다.) 환익: (신의 뒤편에 서서 동료들을 바라본다.) 신: 다 되었느냐? 원호, 월희, 미오: 예, 폐하.. 신: (세 사람 둘러보다가 환익까지 훑어 보고는) 그럼 내 주변에 서라.. 네 사람: (신 보는) 신: (부하들이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둔 진(陣)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신, 두 팔을 넓게 벌려 기(氣)를 끌어 모아 후원에 거대한 방어막을 구축한다. 신이 두 팔을 제자리로 내려놓았을 때, 환익, 원호, 월희, 미오는 따뜻하고, 아늑하며 안전한 느낌이 드는 공기가 주변을 감싸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폐하께서 들키지 않기 위해 주변에 방어막을 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외부와의 차단막이 쳐지자, 신은 네 사람에게 자기 곁으로 오라고 눈짓 했다. 이에 네 사람은 일사분란하게 신 곁으로 다가가 신이 쳐놓은 진(陣)에 자리 잡고 섰다. 동서남북 네 개 방위에 맞춰 자리 잡은 네 사람은 칼을 짚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이들 네 사람은 신이 결계를 치는 동안 신이 내뿜는 힘이 흐트러지지 않고, 무수한 표식에 골고루 힘이 분산되도록 지원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네 사람도 호흡을 고르며 기(氣)를 끌어 모으려 애를 썼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힘이 뿜어져 나올지 짐작하기 힘든 터라, 긴장이 되기도 했다. 신은 네 사람이 자리를 잡고 준비를 마친 것 같자, 다시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단전에서부터 온몸으로 몸 속에 내재돼 있던 힘을 내보내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머리를 맑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념이 들어오면 신성한 결계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가 갖고 있는 불안과 불신은, 당분간 내려놓아야 했다. 무(無)가 되어야 했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야, 순수한 기(氣)가 결계를 따라 흩어져 줄 것이다. 하여, 신은 숨을 고르며 머릿속에 잡다하게 떠다니는 얼굴들을 지워 나갔다. 그가 지켜야 하고 지키고 싶은 이들을, 물리치고 싶은 이들을 모두 지워 나갔다. 그렇게 머릿속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이 되었을 때.. 몸 밖으로 기(氣)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의 형태로 뿜어져 나온 순수하고 강력한 기(氣)는, 캄캄한 밤, 어둠에 감싸인 후원을 밝게 비추며 어둠 속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다섯 사람이 디디고 있던 땅이 푹 꺼졌다. 힘을 버티지 못하고 내려앉은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버티고 있었다. 신이 쏟아내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강한 힘 앞에서 고꾸라질 것 같은데도 버텼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남은 최강의 전사들조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강한 힘이었다. 순수하게 사람이 내는 힘이 이다지도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네 사람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이 정도라면, 그들의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실패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지금 폐하의 힘은 실패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로 인해 이 계획이 무너져선 안 되었다. 절대 무너지면 안 되었다. 그래서 네 사람은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점점 꺼져가는 땅에 파묻히는 한이 있어도 견뎌야 했다. 잠시 후.. 반 식경(食頃)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지나가고.. 신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밖으로 쏘아 보내던 힘이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주변에 휘몰아치던 광풍이 서서히 멎어갔다. 눈이 부실 것처럼 밝게 빛나던 빛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후원엔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미오: (제일 먼저 무릎이 꺾이며 털썩 주저앉는다. 칼을 짚고 있지 않았다면, 폐하 앞에서 고꾸라지는 무례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원호: (울컥 하고 뜨거운 무엇이 목구멍을 차고 올라왔다. 컥컥거리며 기침을 밭으니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월희: (쓰러지지 않기 위해 칼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고 있었던지, 긴장이 풀린 지금 손바닥은 온통 피투성이다.) 환익: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은 금방이라도 핏멍울이 들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신: (온몸의 힘을 다 쏟아 부은 것 같다. 진심으로 다리가 풀려 서 있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은 처음 느꼈다. 당장에라도 다리를 쉬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땅바닥에 주저앉는 꼴은 보여 줄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인내심으로 서 있었다. 피 토하며 쓰러져 있는 부하들에게 더 흉한 꼴을 보여 줄 순 없었다. 그래서 왕으로서 꿋꿋이 서 있었다. 곧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직은 힘이 완전히 소진된 것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큰 힘을 쓴 것은 6년 전 그 밤 이후로 처음이지만, 그때보다 더 많은 힘을 순식간에 쏟아낸 탓에 피곤함은 훨씬 더 컸다. 그래도.. 쓰러질 순 없었다. 부하들을 안전하게 귀가시켜야 오늘의 일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환익, 원호, 월희: (신을 올려다본다.) 미오: (차마 올려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 쉬고 있다.) 신: (네 사람을 둘러보며) 수고했다.. 네 사람: .. 신: 이틀간 휴가를 줄 테니 돌아가서 쉬도록 하라.. 네 사람: (차마 대답할 힘이 없어 고개를 숙여 왕명을 받든다.) 신: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네 사람을 공중에 띄운다.) 네 사람: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오르자 어리둥절해 한다.) 신: (자신도 공중에 떠올라 땅에서 발을 뗀다. 그리고는 푹 꺼져 버린 땅 위로 파헤쳐진 흙을 덮기 시작한다.) 네 사람: (아직도 저런 힘을 쓸 여력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신: (땅을 본래대로 돌려놓고 싶었으나, 완전히 처음처럼 복원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환익에게) 이 부분은 닷새간 안 보이게 해 둘 테니, 휴가가 끝난 후 네가 와서 손 좀 봐.. 환익: 알겠습니다, 폐하.. 신: (월희에게) 힘들겠지만 미오를 돌봐라. 월희: 예.. 신: (손끝에서 한 줄기 빛을 미오에게 쏘아 보낸다.) 미오: (빛을 받아 살짝 몸이 부르르 떨린다.) 신: (월희에게) 소진된 기를 보충했으니, 네가 흐트러진 기를 바로잡아 줘. 월희: (폐하의 끝도 없는 힘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대답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예, 폐하.. 신: (원호에게) 내의원에 들리지 마라.. 내상을 입은 것이라면, 내의원에 알려서 좋을 게 없으니.. 원호: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는 의원이 있으니 그 자에게 가겠습니다. 신: (원호의 대답에 만족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네 사람 모두에게) 지금 모두 궐내 숙소로 날려 보내 줄 테니, 오늘밤은 궐에서 자고 내일 일찍 빠져 나가라. 환익: 폐하! 그러지 마십시오. 월희: 예! 저희가 가겠습니다. 신: 지금 상태로는 숙소로 가다가 들킬 것이다. 네 사람: (신 보는) 신: 기껏 기밀로 일을 처리해 놓고, 돌아가다가 들키면 안 되지 않느냐? 환익: 하오나.. 신: 긴 말 하기 싫다. 나도 지쳤어. 월희: 폐하.. 신: (월희에게) 미오를 잡아라. 월희: 폐하.. 신: 왕명을 거역할 셈이냐? 월희: (더 항변하고 싶으나, 말문이 막혀 버린다. 어쩔 수 없이 미오에게 손을 뻗어 단단히 잡는다. 이대로 공중에 떠 있게 하는 것도, 폐하에겐 힘든 일일 것이기에, 얼른 사라져 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신: (원호와 환익, 두 남자를 살핀다. 둘은 남자라고 버틸 수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갈 준비 됐어? 원호, 환익: (역시나 내키지 않지만, 폐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신: 그럼 잘 가~ 네 사람: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 신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군다. 더 이상 왕으로서 굳건한 모습 따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그의 인내심을 끝장내었다. 몸을 뒤척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난생 처음 흙바닥이 얼굴에 닿는 것도 그냥 내버려 둔다. 무술 훈련에 지쳐 쓰러졌을 때를 제외하곤, 이런 흙바닥에 몸이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도 머리를 땅에 댔지, 얼굴로 땅을 마주하진 않았었다. 흙 냄새가 이런 거였나? 풀이 얼굴에 닿는다는 게 이런 거였나? 허탈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그러나 소리 내어 웃을 힘도 없다. 신: (억지로 손바닥으로 땅을 짚어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좀 전보단 편안한 자세로 흙바닥에 대자로 눕는다.) 밤하늘은 한 식경(食頃) 전이랑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달빛 없는 까만 밤은 여전히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 이러면 된다. 아무도 몰라야 하는 일, 이렇게 아무 일 없는 것 같으면 된다. 그러니 이제는 잠시 쉬어도 될 것 같다. 잠시 눈 좀 감는다고 문제될 것 없을 것이다. 신: (눈을 감고 차가운 밤공기를 고스란히 맡으며 휴식을 취한다.) 어찌 보면 죽은 사람 같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까만 옷을 입은 탓에 어둠에 묻히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그는 분명 살아 있었다. 그리고 숨을 쉬고 있었다. 그래서.. 이대로 누워 있지 못할 것 같았다. 신: (벌떡 일어난다.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박력에 넘치는 동작이었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신. 피곤한 표정이 역력하지만, 입가엔 옅은 미소가 피어 오른다. 신: …………………………………………..소박 맞기 전에 내 아내를 만나러 가야겠어.. #2. 교태전 남아 있는 힘이 거의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교태전까지 공간 이동해 날아왔다. 한창 축시(丑時, 그래서 숨어드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른 때보다 지치고 힘든 상태였지만, 기색은 감출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밤마다 숨어 들었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그가 아닌 채경이었다. 왜 이 시각까지 안 자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저리 앉아 있는 거지? 한 시진이 흘러가도록 채경은 잠자리에 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꼿꼿하게 책상머리맡에 앉아 하염없이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신은 점점 지쳐가는 자신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그냥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평화롭게 잠든 채경을 보고, 안식과 평화를 얻어 돌아가려 했는데.. 아니, 그게 안 되면 채경 곁에서 편안히 잠이 들까 했었는데..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앉아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당장 채경과 얘기를 나눌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갈피를 못 잡겠다. 그리고.. 평소보다 무서워 보이는 채경의 표정 때문에 더더욱 용기가 안 났다. 그래서 강녕전으로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채경이 이렇게 말했다. 채경: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계실 겁니까? 무섭게 촛불만 노려보고 있던 채경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문을 열었다. 은은한 불빛과 침묵만이 존재하던 방안에, 침묵이 깨지며 소통(?)이 시작되었다. 채경: (시선만 움직여 어딘가를 뚫어질 듯 응시한다.) 신: (채경의 시선이 자신을 똑바로 향하자, 헛웃음이 난다. 이게 뭐야?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여기 와 있는 거.. 알면서 기다렸단 말야? 내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길..?) 채경: (마치 신이 보인다는 듯이 무섭게 쳐다본다.) 신: (다 알고 있다는 사람 앞에서 더는 숨어 있을 수가 없어서 서서히 기색을 드러낸다.) 채경: (눈앞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신을 보며 주먹을 움켜 쥔다.) 신: (곧 죽을 것처럼 피곤해 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에 웃음기가 감돈다.) 채경: (닷새 동안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신이 드디어 모습을 보이자, 점점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신: (채경의 전투 의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식 웃으며) 귀신이네~ 채경: (신의 농에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약간은 경직된 표정으로 신을 맞이하는..) 신: (입가에 미소를 걸고 채경을 마주 본다. 그러나.. 입가의 미소는 서서히 힘을 잃어가며 일자가 된다.) 채경: 왜.. 자는 모습을 보고만 가셨습니까? 신: (채경 보는) 채경: 처음엔.. 잘못 안 줄 알았습니다. 폐하께선 저를 피하고 계셨으니까요.. 헌데, 어제도 그제도.. 이 방에 왔다 가시더군요. 신: ‘그걸.. 알고 있었나?’ 채경: 매우 바쁜 분께서 침수도 들지 않고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신: ‘그거야 그대를 봐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랬지..’ 채경: 어찌 그러셨습니까? 신: ‘그대를 봐야 안심할 수 있으니 그랬어. 거리를 두는 건 두는 거고, 잠깐 얼굴을 보는 건 다른 문제니까..’ 채경: 저를.. 벌하시는 것입니까? 신: ‘벌..? 무슨 벌..?’ 채경: 경거망동하게 군 저를 벌 주시는 것입니까? 신: ‘언제 경거망동했다는 거야? 아.. 그날 강녕전에 기습한 거? 그건 이미 잊은 지 오래인데..’ 채경: 제발 아무 말이나 해 보십시오.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신: (채경 물끄러미 보는) 채경: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신 보는) 서로 상반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방안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채경의 거친 숨소리 때문에 무거운 공기는 어색함을 덧입고 갑갑함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채경은 말을 아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해 내지르고 싶은 걸 꾹꾹 눌러 담았다. 이번에는 폐하가 말씀할 차례였다. 어떤 식으로든 무엇이든 해명을 들어야 했다. 더 이상 혼자 상상하고 혼자 결론 내리고 혼자 상처 입고 혼자 아파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라는 걸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다행인 상황에서, 이 귀한 기회를 날려선 안 되었다. 그래서 채경은 신이 얘기해 주길 기다린다. 무슨 말이든 해 주길 원한다. 간절히.. 신: 이렇게 화 내는 거 처음 보네.. 채경: (신 보는.. 신이 입을 열었다는 것에 조금은 안도하며 그를 바라본다.) 신: 그런데 생각해 보니 누군가 나한테 화를 내는 게 처음인 것 같아. 채경: ??? 신: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화를 낸 사람이 없었거든. 채경: (화낸 사람이 없다고? 아무리 임금님이라지만, 그런 적이 없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신: 내 윗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할마마마,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 누구도 내게 화를 내지 않으셨어. 그분들이 화를 내지 않는데, 감히 누가 나한테 화를 내겠어? 그렇게 되면 당장 모가지가 잘려나갈 텐데.. 채경: (굳이 모가지가 잘려나간다는 얘길 입에 담으시는 저의를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저런 단어 선택 자체가 고민을 요하는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을 말들도, 허투루 흘려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저 말은 폐하께 화를 내고 있는 나의 목을 치겠다는 뜻인가?) 신: 나한테 대든 사람도 없었어. 채경: 제가.. 대들었나요? 신: 따져 물었지만, 대든 거랑 차이가 없는 거 같은데..? 채경: 그래서.. 제 목이라도 치시려구요? 신: (픽 웃는다.) 채경: (입술을 깨문다.) 신: 싸우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채경: (신 보는) 신: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 같은데.. 아니야? 채경: (예!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답해 주십시오.) 왜 그러셨습니까? 신: (채경 보는) 채경: 정말로.. 왜 그러셨습니까? 신: (절박하게 묻는 채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채경: (화가 나다 못해 그동안의 일들이 억울해 눈물이 날 것 같다.) 신: 울지 마.. 채경: (신 보는.. 의아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신 보는..) 신: (다시 한번) 울지 마.. 채경: (툭! 하고 눈물이 흘러 내린다. 울지 말라는 말이 오히려 눈물샘을 자극해 버렸다.) 신: (채경의 눈물에 인상이 흐려진다.) 채경: (울 생각은 없었는데, 눈물이 나서 자기도 당황했다. 그래서 신에게 몸을 돌려 다급하게 눈물을 훔친다.) 신: (좋지 않은 표정으로 채경에게 다가간다.) 채경: (신이 다가오는 걸 뒤돌아 앉아 있는데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신: (채경의 견제에도 가까이 다가가 앉는다.) 채경: (고개를 살짝 틀었다가 바로 눈앞에 신이 보이자 흠칫 한다.) 신: (피식) 남편 보고 놀라는 거야? 채경: (그저 입술만 깨문다.) 신: 내가 뭘 잘못했는지.. 확실히 알겠다.. 채경: .. 신: (채경 지그시 보는) 채경: (시선을 살짝 내려 신과의 시선을 맞추지 않는) 신: 왜 그랬느냐고 물었지? 채경: (천천히 고개 들어 신 보는.. 드디어 이야기해 주실 건가 싶어 살짝 긴장된다.) 신: (채경과 눈이 마주치자)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사과부터 할게. 채경: ??? 신: 이런 식으로밖에 대처 못한 거.. 그래서 그대를 불안하게 하고, 걱정하게 한 거.. 그러다 결국엔 화를 내는 상황까지 그대를 몰아부친 거.. (후~ 짧게 숨 고르고) 미안해.. 채경: (침 삼키는.. 폐하께서 미안하다고 먼저 말씀하시고 이야길 시작하자 더 긴장하게 되는.. 원래 사과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신데.. 이리 정식으로 사과를 하시니 당황스럽다.) 신: 하지만.. 나도 서툴렀어. 서툴러서 그랬어. 채경: ??? 신: 그대 때문에 처음 느껴 보는 감정들.. 처음 겪게 되는 일들.. 되게 많은데.. 그것들 중에는 처음부터 설레고 기분 좋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어. 그래서 선뜻 손을 내밀 수도 없고, 불쾌한 느낌에 기분이 나빠지기도 했어. 또 어떨 땐 이게 뭔가 싶어서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고.. 이번이.. 그랬어. 채경: .. 신: 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대가 밉더군.. 채경: ??!!!!!!!! (제가 밉다구요? 나의 예상만이 아니라, 저를 싫어하게 된 게 맞다구요?!!) 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놀란 표정을 짓는 채경을 보니, 씨익 미소가 지어진다.) 채경: (표정 굳어지는.. 밉다고 말해 놓고 웃는 건 뭐란 말인가? 정말로.. 날 싫어하게 되신 건가? 대체 왜!!!) 신: 역시.. 이렇게 마주 보는 게 좋구나.. (잠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이런 게 더 좋구나..) 채경: ??? (밉다고 했다가 좋다고 하는 건 뭐지? 정말 갈피를 못 잡겠다. 그래서 표정은 점점 굳어진다.) 신: 난.. 여자를 좋아하는 게 처음이야. 채경: (이건 또 무슨 소리? 이야기가 이리저리 널을 뛰어서 따라잡기가 힘들다.) 신: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여자에 대해선 무지했다는 게 맞을 거야. (무시했을 수도 있고..) 채경: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 (자신이 처음이라고 말하는 채경의 대답이 맘에 든다. 무척이나..) 그럼.. 그대도 처음이겠네? 채경: 무엇이 말입니까? 신: 내 곁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 때.. 불쾌해진 적 없어? 채경: ??? 신: 그대와 있을 때보다 더 기분 좋은 얼굴로 함께 있는 걸 보고 불쾌해진 적 없냐구.. 채경: .. 신: 난.. 그랬어. 채경: 예??? 신: 그대가 어떤 남자와 너무 기분 좋은 얼굴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나빠졌어. 채경: (멀뚱멀뚱) 신: 왜 그런지도 모르고.. 확실히 그런 건지도 모르겠는데.. 울컥거리는 뭔가가 있었어. 채경: 언제.. 말입니까? 신: 엿새 전 서고 앞에서.. 채경: (신의 말에 서고 앞에서의 일을 떠올려 본다. 그러다가 눈이 커지면서) !!! 규현 오라버니.. 말씀하시는 거예요? 신: (오라버니라는 호칭에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지만, 담담하게) 응.. 이판의 장남이자.. 그대의 어릴 적 소꿉친구.. 그리고, 좌상이 추천한 중전의 시문 선생.. (덧붙이자면 그대가 볼품 없는 솜씨로 쓴 서신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사내이기도 하지.) 채경: (어이가 없다. 규현 오라버니와 자신을 두고, 설마.. 투기를 하셨던 건가?) 신: (채경의 표정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된다.) 맞아.. 투기……….를 했어. 채경: 폐하~ 신: 어이 없겠지만, 이건 그러지 말아야지 한다고 제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야. 채경: 예?? 신: 그댄 아직 경험이 없는 것 같은데, 언젠가 경험하게 된다면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채경: 그렇다면 언젠가 폐하께서도 제가 투기하는 것 때문에 어이 없어 하실 날이 오겠군요. 신: (픽 웃는다.) 그렇겠지.. 그렇게 하나 하나 알게 되겠지.. 그대로 인해 처음 하게 될 경험들을.. 겪게 되겠지.. 채경: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리 오랫동안 저를 멀리하실 만큼 불쾌하셨습니까? 차라리 제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그럼 제가 폐하의 오해를 풀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신: 이런 걸로 부딪히고 싶지가 않았어. 왠지.. 창피했거든. 채경: (폐하께서 창피한 걸 감추느라 제가 느낀 절망감은요?) 신: 나 혼자 수습한 뒤에 만나고 싶었어. 때마침 핑계거리도 있었고.. 채경: ??? 신: 지난 닷새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었어. 채경: 무슨 일인데요..? 신: 병부 쪽과 관련된 일이라, 그대에게도 발설할 수 없어. 채경: (궁금하지만 기밀 사항이니 더 묻지 않는다.) 신: 기회는 이때다 하고 그 일에 매달렸어. 생각보다 시간이 잘 가더군. 채경: 저는 하루가 일년 같았습니다. 신: (채경 보는.. 하루가 일년 같았다는 아내의 말에 머쓱해져서) 미안해.. 채경: (폐하가 미안하다고 하시면 어떤 말을 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신: (머쓱함에 다른 데를 보고 있다.) 채경: (신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래서.. 수습은 되셨습니까? 신: (채경 보는) 채경: 혼자.. 수습하셨습니까? 신: (살짝 미소 지으며) 모르겠어. 채경: 예?? 신: 그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대가 다른 마음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그대가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보면, 완전히 초연해지지는 못할 것 같아. 왠지.. 그럴 것 같아. 채경: (이해가 안 된다. 아직까지 투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완전무결한 상황인데, 어찌 마음이 불편해질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신: 시문 선생을 바꾸라 할까.. 생각도 했었어. 채경: (눈 커지는) 신: 유치하지만.. 그런 생각까지 들어, 투기를 하면.. 채경: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 동조하지 못하는) 신: 자신의 치졸함이 어디까지인지도 알게 되고.. 사람이 어디까지 구차해질 수 있는지도 알게 돼.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닌데..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하면서도, 치졸하게 흐르는 생각을 막을 수가 없어. 채경: .. 신: 내가 이렇게 못난 인간인지 이번에 처음 알았어. 차갑고, 잔인한 줄은 알았지만, 속좁고 옹졸한지는 몰랐어. 그래서 기분이 더러워. 채경: ……………………….송구합니다. 신: 그대가 왜? 나 몰래 바람을 핀 것도 아니잖아. 내 멋대로 상상하고, 내 멋대로 기분 나빠한 거야. 그 화풀이를 죄 없는 그대한테 했구.. 헌데 무엇이 미안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채경: 그래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건 저 때문이지 않습니까?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신: 그럼, 나 용서해 줄래? 채경: (신 보는) 신: 혼자 수습하느라 그댈 힘들게 한 거.. 용서해 줄래? 채경: .. 신: 서로에게.. 면죄부를 주면 어떨까? 채경: 그것으로 면죄가 된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신: (살짝 놀라서) 정말? 채경: 예.. 신: (씨익 웃는다.)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나는데? 채경: 무엇이요? 신: 그대가 하도 화를 내서, 당분간은 강녕전에서 독수공방 해야 되나.. 싶었거든. 채경: (난 또 뭐라고..) 폐하께 따져 묻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독이 올랐습니다. 그래서 무엄하게 폐하께 화를 냈지요.. 하지만 폐하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저.. 이유도 모른 채 폐하께 외면당하고 있는 연유를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헌데, 폐하께서 솔직하게 얘기해 주시니, 저는 이것으로 되었습니다.. 신: 고마워. 이해해 줘서.. 채경: 고맙다.. 미안하다.. 그런 말이 쉬이 나오시네요., 신: 그러게.. 술술 나오네~ 채경: 많이 발전하셨습니다. 신: ^^ 채경: 헌데..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신: ??? 채경: 왜.. 기색을 감추고 계십니까? 신: (멈칫) 채경: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걸 이제서야 물어본다. 왜 모습은 드러냈으면서, 기색은 계속 감추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럴 거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물어보고야 만다.) 신: (일단 숨을 삼키고 채경을 물끄러미 본다.) 채경: (이제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신을 마주 본다.) 신: 어때? 채경: 무엇이요? 신: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기색이 안 느껴지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 채경: 솔직하게.. 말씀 드려도 돼요? 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웃음이 비어져 나올 것 같다. 왠지 엉뚱한 대답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응.. 솔직하게 얘기해 봐. 어때? 채경: …………………………….귀신 같습니다. 신: (풉!!) 채경: (심각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그런데 웃으시니, 기분이 좋지 않다.) 신: (큭큭대며) 내가 귀신 같다고? 귀신~~? 채경: (재밌다는 듯 박장대소하는 신을 보며 물러서지 않고) 정말 왜 그러시는 거예요? 신: (걱정이 잔뜩 밴 채경을 보며 서서히 웃음 잦아가는) 채경: (신 보는) 신: (웃는 얼굴이지만 채경과 시선은 맞추지 않은 채) 기색을 드러내면 놀랄 것 같아서.. 채경: ??? 신: 걱정할 것 같기도 하고.. 채경: 무슨..? 신: (채경 보는) 채경: (신 보는) 신: 나.. 지금 망신창이거든. 채경: 예?? 신: 귀신하고 별반 다를 바 없어. 채경: (계속 모를 소리만 하셔서 표정이 점점 애매해진다.) 신: 하지만.. 그대라면 원상 복귀시켜 줄 것 같기도 하고.. 채경: 무슨 말씀이세요? (좀 알아듣게 얘기해 주실래요?) 신: 기대고 싶어지네..? 채경: (신 보는) 신: 좀.. 안아 줄래? 채경: (멀뚱멀뚱 신을 본다.) 신: (애잔한 미소를 머금고 채경을 바라본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채경이 먼저 움직였다. 미소를 띄고 있지만,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신을 안아 주기 위해 반 발짝 떨어져 앉아 있는 신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안았다.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실로 오랜 만에 안아보는 것 같은 님이었다. 품에 가득 안아 편히 쉴 수 있도록 힘을 단단히 주어 받치는 채경. 그러자 신이 채경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며 안겨 왔다.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채경의 품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긴장돼 있던 몸을 서서히 이완시키며 지금껏 숨겨온 그의 실체를 채경에게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채경: (두 눈이 커다래진다.) 신: (눈을 감고 채경에게 안겨 있다.) 채경: ‘폐하..!!’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신: (채경이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채경이 그의 실체를 느끼고 있나 보다.. 대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채경: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폐하를 만나오면서 이렇게 쇠약해진 폐하는 처음이었다. 기색이 드러나면서 알게 된 것은, 지금 폐하는 실낱 같은 기(氣)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무궁무진하던 힘이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어디서 어떻게 소진하면 그 많던 기가 이렇게 없어질 수 있는 건지,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몸이 이상한 것이 아닌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폐하.. 신: 응? 채경: 어찌된 것입니까?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신: 어디 아픈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채경: 아프지 않으신데, 이렇게 쇠약한 게 말이 됩니까?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신: 푹 자면 돼. 채경: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신: 의원이 와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채경: 하오나.. 신: 그냥 자게 해 줘. 나한테 필요한 건 휴식이야. 채경: 폐하~!! 신: 정말이야.. 쉬면 돼.. 채경: (태평스럽게 자면 된다고 말하는 폐하 때문에 울화가 치민다. 앉아 있지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기분이다.) 신: 그대가 내뿜는 청아한 기운을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져. 이대로 자고 싶어. 그러면 씻은 듯이 나을 거야. 채경: (계속해서 사람 복장 터지는 소리만 하고 있는 폐하가 원망스럽다. 정말.. 사람 마음을 몰라 줘도 너무 몰라 주신다.) 신: (서서히 눈이 감겨 온다. 몸의 긴장을 완전히 풀었더니, 졸음이 몰려왔다.) 소란 떨지 마.. 내일 못 일어나더라도 내의원에 알리지 마.. 내가 이러는 거 알리면 안 돼.. 채경: 어찌 그래야 합니까? 연유도 알려 주십시오. 신: 누구도 알아선 안 돼. 채경: 그러니까 어찌 그래야 하는지.. 신: 너무 졸려.. 채경: 폐하.. 신: (의식이 멀어진다.) 채경: 폐하! 신: (채경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그리고는.. 잠에 빠진다.) 채경: 폐하~~ 몇 번이고 신을 불러보는 채경. 하지만 소 귀에 경 읽기처럼 신은 듣질 못한다. 사람을 그리 화나게 하더니, 이번엔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드신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고.. 어이가 없다. 이렇게 주무시면 나 보고 어쩌라고.. 무슨 조치를 취하긴 해야 하는데 갈피를 못 잡겠다. 폐하의 명(命)을 따라야 할지, 당장 내의원으로 사람을 보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고민해 봤자 결론은 하나였다.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 채경이 아무리 고집이 세고 주관이 뚜렷하다 해도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순간까지 당부하신 말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채경은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게 생겼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폐하를 반듯하게 눕히고, 의원 대신 폐하의 쇠약해진 몸을 보할 기(氣)를 불어넣어 드려야 할 것 같다.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그녀가 가진 모든 치유법을 다 동원해 폐하를 되돌려 놓을 것이다. 채경, 불끈 힘을 내어 신을 들어 겨우겨우 이부자리에 바로 눕힌다. 이것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채경: (기절한 것처럼 잠든 신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신의 얼굴로 다가가 수척해진 볼에 입을 맞춘다.) 어디서 이렇게 피죽도 한 그릇 못 얻어 먹은 사람마냥 혹사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허약해진 폐하를 건강하게 돌려놓는 것이었다. 하여, 채경은 심기일전하여, 신의 단전을 찾아 재빠르게 신의 몸 위로 올라탄다. 채경의 몸무게에 살짝 움찔한 듯했으나, 깊은 잠에 빠진 신은 깨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채경은 신의 단전에 두 손을 포개어 얹고 숨을 고른다. 눈을 감고 기(氣)를 정갈히 갈무리 한 후, 온 힘을 손끝에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러자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와 신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방안을 가득히 채우는 청아한 공기는, 피곤에 지쳐 잠든 신에게는 보약과도 같았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채경의 기(氣)와 청아한 공기가 신의 잠자리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엿새 만에 신은 달디 단 잠을 잘 수 있었다. 힘든 작업 끝에 오는 달콤한 휴식.. 신은 그렇게 안식과 평안의 밤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아내 곁에서.. #3. 정토산 새벽.. 어스름한 빛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는 매우 이른 시각.. 정토산의 비밀 움막에서 몇몇 사내가 모여 앉아 회동 중에 있다. “무영국 사신단의 출행 날짜가 나왔다고?” “예.. 열흘 후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 쪽도 준비를 서둘러야겠구나..” “예.. 날이 밝으면 조를 짤 예정입니다. 그리고 물품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신중해라~.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 좌상이 궁에 없는 이 시기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궁 안 사정은 어떠냐?” “국왕의 처가 방문에 모든 업무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허면 우리가 일을 진행시키기엔 쉽겠군. 아, 그리고 도성의 취객 살인은 멈추라 지시했겠지?” “예.. 그림자 부대가 뜬 이상, 2단계 작전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지금까진 우리의 계획대로 되어가는구나.. 이대로만 간다면 저 궁의 주인이 바뀌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이다.” “..” “자, 흩어져라! 절대 눈에 띄지 말고..” “예.. 잠시 후 다시 뵙겠습니다.” 사내들이 모두 물러가자, 상석에 앉아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던 남자의 표정이 서늘해진다. 이제 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계획했던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기대되었다. 결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염원했던 소망을, 꼭 이뤄낼 것이다. 반드시.. “이신.. 넌 내 손으로 죽여 줄 것이다. 반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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