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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닛/드라마

[스크랩] <상상소설>왕(王)의 여자(43) 왕, 나비의 과거와 조우하다

 

안녕하세요? 쏭기자입니다.. ^^;;

웃음 옆으로 삐질거리는 땀.. 왜 그런지 짐작하시겠어요?

본의 아니게 보름이나 잠수를 타 버린 것에 대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을 느껴 흘리게 된 땀입니다.. ;;

 

이렇게 오래도록 잠수를 탈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흘렀네요.

안부 인사조차 묻지 않는 저 때문에 불길한(?) 상상을 하진 않으셨을지.. 걱정입니다.

시나리오방이 썰렁해지는 걸 보며 그 불길한 상상대로 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는데요,

현실은 마감이 끝나고 나니까 노트북을 펼쳐놓고 왕녀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더군요. ^^;;

이번 편도 금요일에 완성했는데 다음 이야기를 이어서 쓰고 싶은 마음이 커서

연속해서 쓰다 보니까 오늘까지 글을 못 올리고 가지고만 있었습니다.

어제는 글 다듬을 시간이 많질 않아서 오늘 오전까지 전전하다가 이제서야 갖고 왔네요..

 

 

오랜 만에 글을 올리다 보니 소설이 툭툭 끊길 것 같아 걱정인데요..

(솔직히 쓰는 입장에서도 연결이 쉽지 않아 글이 안 써진다는..--;;)

분위기상으로는 소설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고 느끼고 계실 거예요.

마지막으로 가는 만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감정이 안 끊어지게 해야 하는데,

그게 내 맘처럼 잘 되질 않네요. 어쨌든 최선을 다해 속도를 내 볼게요.

(이 약속은 저번에도 했던 것 같은데.. 점점 거짓말쟁이가 되어 가네요..--;;)

 

 

이번 편은 신이랑 채경이가 채경이네 집에 놀러가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검은 그림자는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요즘 쓰고 있는 이야기의 기둥은

알콩달콩 신호 모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 드리면서, 이야기 시작합니다.

이번 편 역시 글량 조절을 잘못 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구요..

어쩌다 보니 신이랑 채경이만 줄기차게 등장하게 됐습니다.

사이사이 본문에 등장하는 다른 등장인물들은 상상으로만 즐겨 주시고,

두 아이의 티격태격 가벼운(?) 사랑싸움과 신채경 추억 놀이 재밌게 읽어 주세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글을 올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이번 편을 늦게 올리게 한 만큼 빨리 갖고 올 수 있을 거예요.

다시 한번 기다려 달라는 염치 없는 부탁을 드리면서 저는 물러갈게요..

 

 

**잊지 않고 예쁜 구독료 만들어 주시는 라니냐 대감님.. 고맙습니다.

답메일도 답글도 달지 못하고 잠수해 버린 쏭기자를 용서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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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왕, 나비의 과거와 조우하다

 

 

 

 

 

 

#1. 사흘 후

 

 

 

국왕 부부를 태운 대규모 가마가 도성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다.

중전의 친정행을 위해 첩첩산중으로 에워싼 경비병들 가운데,

열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웅장한 가마가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마 안에는 뛰어 다녀도 될 만큼 너른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고,

그 넓고 안락한 곳에 이상 기류를 풍기며 신과 채경이 앉아 있었다.

신의 표정은 평안하기 짝이 없었으나, 채경은 그렇지 못했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 뿌루퉁한 표정은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은 비단 천으로 가려진 창문을 살짝 열어 저잣거리를 구경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신의 귓가에 날아드는데..

 

 

 

채경: 오늘.. 출발도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 (멈칫.. 천천히 고개 돌려 채경 보는..)

 

채경: (뿌루퉁한 얼굴로 신을 외면하고 앉아 있다.)

 

: 뭐가 그리 못마땅하십니까, 부인?

 

채경: (신의 말에 마지막까지 참았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그걸 몰라서 물으십니까?

 

 

 

앙칼진 목소리로 신의 대꾸를 되받아치는 채경. 그런 채경을 멀뚱히 바라보는 신.

아무래도 두 번째 부부싸움의 서막이 시작된 듯한데.. 왜 이런 상황이 돼 버린 걸까?

 

사건은 사흘 전 그 밤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신이 기력을 소진하고 채경의 품에서 기절하다시피 잠이 든 밤..

채경은 온 정성을 다해 신의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 결과 귀신 같았던 기()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지만,

아직도 평소처럼 막강한 기운의 폐하로 돌아오지는 못하셨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신이 깨어나질 않은 것이다.

처음엔 기력이 바닥 날 만큼 기력 소모가 큰 일을 한 후이니,

피곤해서 일찍 못 일어나는 거라 생각하고 정오가 될 때까지 자게 두었다.

 

그런데 정오가 지나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채경은, 신을 깨우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흔들어도 보고, 소리쳐 보기도 하고,

종국에는 용안에 손을 대어 뺨을 때리기까지 했으나 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원에게 보이지 말라는 부탁만 아니었어도, 당장에 의원을 대령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궁의 얘기로는 폐하께선 태어난 이후, 고뿔도 한 번 걸린 적 없는 분이라 했다.

워낙 튼튼한 몸을 타고 나셨다 보니, 왕손 중 병에 걸리는 이는 전무하다고 봐야 한단다.

선왕(先王)께서는 매우 특이한 경우였고, 다른 왕손들은 내의원과 왕래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폐하께서 기절하는 순간까지 내의원에 알리지 말라는 언질을 하셨나 보다.

 

그러나.. 이런 일에 경험이 없는 채경으로선, 폐하의 부재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행히 폐하가 잠이 든 다음 날은 휴일(요즘의 주말)로 접어드는 때라, 주관 업무가 없었다.

하여, 교태전 궁녀들만 잘 단속하면 폐하가 쓰러졌다는 걸 알리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외부에 알려질 위험이 없다는 것만 빼고 나면, 어느 것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었다.

아무리 해도 깨어나지 않는 폐하가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는데도, 의논할 상대가 없었다.

 

결국 이튿날까지도 일어나지 않는 폐하를 보고 도움의 손길을 청하고 말았다.

처음엔 호위대장을 불렀다. 연통이 닿지 않는다는 연락이 돌아왔다.

다음으로 채경을 책임지고 있는 미오 부대장을 불렀다. 또 연락이 안 된단다.

마지막으로 월희 대장을 불렀다. 마찬가지로 연통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세 사람 모두와 연락이 닿지 않자, 아무래도 이들과 함께 일을 도모했다는 느낌이 왔다.

그들 셋 모두 폐하처럼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폐하께서 이럴 정도이니, 그들은 훨씬 더 심하게 앓고 있을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더는 누군가에게 청을 넣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던 폐하의 말씀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서 차근히 폐하의 용태를 살펴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호흡은 정상이었다. 안색도 정상이었다. 심장 박동도, 체온도 정상이었다.

식은땀을 흘리지도 않았고, 잠꼬대를 하지도 않았으며, 몸부림이 심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편하게 잠이 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겉보기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편하게 자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래서 채경은 기다리기로 했다. 조급해하지 않고, 일부러 깨우려 들지도 않고,

폐하 스스로 눈을 뜨길..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깨어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폐하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업무를 대행했다.

 

다음 날이면, 친정행이 예정된 날이었다. 준비는 거의 끝난 상태였지만,

3일간 궁()을 비우는 일정이기 때문에 폐하께 확인 받으려는 일들이 꽤 많았다.

간간이 폐하와의 알현을 청해 정사를 처리하고자 하는 대신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따돌리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른다.

개중에 폐하를 대신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처해서 처리한 후 표기해 두었다.

폐하가 깨어나면 보고해야 할 일들이 그렇게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새삼 폐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 하루였고,

임금이라는 자리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재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무거운 책임감과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해야 하는 자리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가고, 친정으로 가야 하는 날이 밝았다.

 

피곤한 몸으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앉으니, 폐하가 깨어나 앉아 있었다.

놀라서 쳐다보는 채경을 향해 태평한 얼굴로 잘 잤어?”라고 인사까지 하셨다.

너무나 태평스러워 보이는 표정과 인사말에, 이상하게도 채경은 반갑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참으로 불경스럽게도 말이다.

 

 

폐하께서 늦지 않게 일어나 주신 건 감사할 일이었다.

만약 오늘도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친정행을 미뤄야 할 뻔했다.

그래서 새벽까지 잠 못 자고 혹시나 깨어나실까 노심초사했던 채경이다.

그런데 새벽녘에 깜빡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폐하는 깨어나 계셨다.

그것도 너무나 개운한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로 채경을 보고 있었다.

이틀 동안 숙면했던 일 같은 건, 사람 걱정하게 했던 건 전혀 모른다는 듯..

 

그래 놓고 태평스럽게 아침 수라를 명()하고, 맛나게 식사를 하시고,

허허실실 웃으며 평상복으로 갈아입으신 후에 교태전을 나섰다.

신과 채경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오르면서도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면서 채경에게 미안하다느니, 고생 많았다느니 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채경은 그게 서운한 게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설명조차 안 하는 게 섭섭했다.

분명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의 채경이 보일 텐데, 어쩜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신지..

 

그게 서운하고 속상해서, 채경은 표정이 풀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가마에 오르고 나서도 계속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신은 간만에 출궁을 한 기분에 취해 거리 구경에 심취했다.

소풍 가는 아이마냥 들떠서, 부인의 심기는 고려조차 안 했다.

그 때문에 참지 못한 채경이 결국 터뜨리고 만 것이다.

 

 

오늘.. 출발도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다분히 의도가 깔린 말이었다. 실제로도 그럴 뻔했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솔직히 새벽녘까지도 변화 없는 신을 보고, 출행을 미뤄야 한다고 생각했던 채경이었다.

미루면 그 많은 일들을 어찌 처음부터 다시 챙겨야 할지 난감해 하며 잠이 들었는데..

걱정한 사람 무안하게시리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출행 준비하는 신이 얄미워 보였다.

깨어나신 건 분명 감사한 일이고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채경의 감정은.. 좀 그랬다.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실망스럽고, 그래서 더 속상하고.. 아무튼 복잡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몰라 주고, 어렵게 던진 말에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다.

 

 

뭐가 그리 못마땅하십니까, 부인?”

 

 

그 말에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진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채경: 그걸 몰라서 물으십니까?

 

: (몰라서 물었다는 듯 표정이 멀뚱하기만 하다.)

 

채경: (복장이 터져서 죽을 것 같다.)

 

: 왜 아침부터 화만 내는 거야?

 

채경: (신 보는.. 제가 화내고 있는 걸 알고는 계셨습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제 기분 같은 건 안 보이는 줄 알았습니다..)

 

: 이틀 만에 깨어났는데 반갑다곤 못할망정 왜 깨어났냐는 듯이 노려 보는 건.. 너무하지 않아?

 

채경: 뭐라구요? (어이가 없다. 자신이 저렇게 보였다는 사실에, 피가 역류하는 것 같다.)

 

: 또 그런다~ 또 화내네?

 

채경: 제가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습니까?

 

: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채경을 본다.)

 

채경: (열이 확 올라서) 폐하께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 (멈칫..)

 

채경: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 하셔서 혼자 감당하다가 이리 보내는 건 아닌가 싶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 ..

 

채경: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안 일어나셔서, 경망스럽고 불경스러운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 ..

 

채경: 꿈쩍도 안 하시는 폐하 보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한순간도 맘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 ..

 

채경: 그렇게 맘 고생 몸 고생 하느라 이틀 동안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헌데.. 오늘 아침 깨어나신 폐하는 너무도 멀쩡한 얼굴로 제게 인사를 하셨지요.

아무 일 없이 깨어나신 건 하늘에 감사할 일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너무하셨습니다.

 

: ..

 

채경: 전후 사정을 다 얘기해 줄 순 없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잖습니까?

 

: ..

 

채경: 이건 이래서 그런 것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고 하실 수도 있잖습니까?

 

: ..

 

채경: 헌데, 폐하께선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이틀 내내 걱정한 사람 무안하게 말이지요..

 

: ..

 

채경: 어찌 이리 무신경하십니까?

 

: ..

 

채경: 이것도 제가 너무 따지는 겁니까?

 

: ..

 

채경: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 같습니까?

 

: 울지 마..

 

채경: (멈칫.. 갑자기 울지 말라는 신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진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폭발시키느라 감정이 고조되어 눈물이 맺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 울지 마.. (다시 한번 말한다.)

 

채경: 안 웁니다! (씩씩하게 말하며 눈물을 삼킨다.)

 

: 그래, 울지 마.. 이틀 만에 깨어났는데, 화내고 우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채경: (그럼 제 마음을 풀어 주십시오.. 제가 안심할 수 있게.. 제가 웃을 수 있게..)

 

: 내가 아무렇지 않게 굴면 괜찮은 거구나.. 생각해 줄 줄 알았어.

 

채경: (신 보는)

 

: 그대는 유달리 사람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줄 알았어.

 

채경: ..

 

: 이틀을 내리 잤다는 거 알았을 땐 나도 놀랐어.

헌데 내가 놀라면 그댄 더 놀랄 거니까.. 또 걱정할 테니까..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 별거 아닌 것처럼 굴었어.

 

채경:그래도.. 말씀해 주시는 게 더 좋았습니다..’

 

: (손을 뻗어 채경의 뺨을 훑어 내린다.)

 

채경: (신 보는)

 

: 혼자.. 힘들었지?

 

채경: (울컥)

 

: 혼자 견디게 해서 미안해..

 

채경: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무는)

 

: 근데.. 그거 알아?

 

채경: (신 보는)

 

: 예전엔.. 내 짐을 누군가에게 나눠 달라고 한 적이 없어.

 

채경: ..

 

: 내 못난 모습.. 약한 모습.. 보인 적도 없어..

 

채경: ..

 

: 늘 혼자 견뎠어. 아무도 없을 때.. 아무도 못 볼 때..

그때만이 내가 유일하게 힘들고 아프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

왕이 아니라.. 상처 받고 약한 인간이어도 되는 시간..

인간 이신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그런 때가 다였어.

 

채경: ..

 

: 혼자 있을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은..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시간이었지만.. 지독히도 외로웠어.

 

채경: (신 보는)

 

: 세상은 나를 불사의 몸으로 알고 있지만.. 나도 상처 받고 아플 수 있는 인간이야.

한번도 아픈 모습 보인 적 없고, 슬퍼하고 약한 모습 보인 적 없을 뿐.. 나도 인간이잖아.

그래서.. 혼자 이겨내고..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들이.. .. 힘겹고 공허했어..

 

채경: ..

 

: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감정이.. 혼자 삭혀야 하는 상처가.. 나를 갉아먹는 걸 보고만 있었어.

누구도 날 구원해 줄 수 없었고.. 누구도 내게 위로가 되질 못했어.. 그렇게 나는 미쳐 가고 있었어..

 

채경:폐하..’

 

: 왕은.. 홀로 존재해야 돼. 홀로 완벽해야 돼. 그래서 누구도 완벽하게 믿어선 안 돼. 신뢰하되, 마음을 주어선 안 돼.

 

채경:그리.. 살아오셨습니까? 그리.. 외롭게.. 홀로 모든 걸 감당하며, 아프다 말 한번 못 하고, 슬프다 말하지 못하고.. 그리..’

 

: 그래서 내 짐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

나를 온전히 맡기고 의식을 잃어 버리는 일 따윈.. 해선 안 되는 거였어.

헌데.. (여기까지 말하고는 채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채경: (신 보는.. 화가 나서 따져 묻기 시작했다는 건 진작 잊어 버린 듯, 신의 얘기에 마음이 동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신의 과거가, 외로웠던 과거가 아파서.. 숨도 못 쉴 지경이다.)

 

: 그대에게 내 짐을 맡겼어.. 아무런 계산도 없이.. 그저 온전히 맡겨 버렸어. 심지어 나마저..

 

채경: ..

 

: 완벽하게 기절했다는 게.. 나로서도 놀라워. 믿어지지가 않아.

근데 그건.. 그대를 완벽하게 믿었다는 뜻이야. 마음을 줬다는 뜻이야.

 

채경: ..

 

: 혼자 감내했던 내가.. 늘 혼자 참았던 내가.. 내 상처를 나누게 됐어.

 

채경: ..

 

: 내 짐을 가져가 줘서.. 날 맡아 줘서.. 고마워..

 

채경:폐하..’

 

: 홀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홀로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뻐..

 

채경: ..

 

: 그대를 만나 미치지 않을 거라는 희망도 갖게 됐어. 미치광이처럼 살지 않을 거라는 꿈도 꾸게 됐어.

 

채경: ..

 

: 그러니.. 못마땅하더라도 날 이해해 줘..

 

채경: ..

 

: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황이든.. 날 이해해 줘.. 따지지도 말고, 이해 못할지라도 받아 줘..

 

채경: ..

 

: 그대를 만난 이후로 계속 감당 못할 바람만 얘기하고 있는데.. 그래도 날 버리지 말아 줘..

 

채경: ……………….버리지 않습니다.

 

: (채경 보는)

 

채경: 폐하의 반려가 되기로 마음 먹은 뒤로.. 내게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

 

채경: 하늘의 별처럼 손에 넣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폐하는..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 얘기했고, 꿈조차 꾸면 안 된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폐하를 손에 넣겠다는.. 폐하를 잡겠다는..

 

: ..

 

채경: 그리고 불가능한 꿈을 이루었지요.. 폐하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런 제가 폐하를 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 ..

 

채경: 폐하께 힘이 된다면.. 폐하의 외로움을 덜어 드릴 수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폐하를 보겠습니다..

 

: ..

 

채경: 깨어나서 못난 얼굴만 보여 드려 송구합니다.

 

: (피식 웃는)

 

채경: (살짝 미소 짓는)

 

: (손을 뻗어 채경을 품에 안아 본다. 실로 오랜 만에 안아 보는 채경이었다. 이 따뜻한 품을 놓고 어찌 살았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채경: (신의 가슴에 코를 박고 감정적으로 차올랐던 것을 누르려 숨을 고른다.)

 

: 드디어.. 그대의 과거를 만나러 가는구나..

 

채경: ???

 

: (씨익 웃으며) 지금의 그대를 만든 그대의 과거가 집에 있다며..

 

채경: (그걸..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 기대가 큽니다, 부인~

 

채경: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텐데요..

 

: 그래도 기대할래.

 

채경: (신의 품에서 빠져 나와 그를 올려다보며) 대신, 표정 관리 잘하십시오~

 

: ???

 

채경: 우리 어머니.. 기절 직전이실 테니까, 어두운 표정은 절대 안 됩니다~!

 

: 나 원래 잘 안 웃는데..

 

채경: 인상만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해도 절반은 성공입니다!)

 

: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몽롱한데.. 표정 관리가 잘 되려나~?

 

채경: (눈 흘기며) 저 놀리시면 재밌으십니까?

 

: ! ^^

 

채경: (어이 없다. 방금 전의 애틋했던 감정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 같다.)

 

: (절레절레 고개 흔들며) 표정 관리는 그대가 해야겠는데?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는 걸 부모님이 보시면 뭐라 그러시겠어?

당장 시집 잘못 보냈다 하지 않겠어? 그러니 인상 쓰지 마시지요 부인~

 

채경: (신 노려 보는)

 

: 그런 표정 안 된다니까~

 

채경: ..

 

: ^^

 

 

 

 

 

 

 

#2. 좌상의 집

 

 

 

채경: (긴장하고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방에 폐하가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이나 긴장되고 떨리는 일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 (눈으로 자그마한 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현재 신은, 좌상의 고택(古宅)에 도착해 사위 대접을 해 주는 장인 장모를 뵌 후, 채경의 방에 입성한 상태다.

 

 

최대한 호들갑스럽지 않게 출행을 감행했으나, 공식적인 국왕 부부의 외출이다 보니 조용히 넘어가질 못했다.

국혼 이후 처음으로 백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니, 백성들의 관심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최근 불거진 왕족에 대한 악소문을 감안하면, 이 정도로 환호하고 관심을 가져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운우국 백성들의 왕족에 대한 신뢰는, 악소문 정도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들은 왕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기저에 깔려 있었고, 왕이 말끔하게 악소문을 씻어 줄 거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실망을 안겨 준 적이 없는 현왕(現王)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왕께선 기다림과 믿음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 바람을 담아 국왕 부부의 외출에 애정을 표현하려 많은 백성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 상황에 당황한 것은 도리어 이번 행차의 경호를 맡은 국왕 호위대였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통행에 막힘이 없도록 길을 뚫는 게 만만치 않았다.

어차피 좌상 대감의 댁이 어디인지는 도성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러다 보니 행차가 어디로 어떻게 이어질지 예상되는 터라 한 걸음 내딛기도 힘겨웠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도착한 좌상 대감의 고택(古宅)..

 

()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지닌 유서 깊은 이 가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정갈하고 깨끗이 관리되고 있었으나, 담장 하나, 기와 하나마다 세월이 덧대어져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오래도록 한번쯤 오고 싶었던 좌상의 집을 마주한 신은 그리 높지 않은 담장과 낡은 대문을 구경했다.

고관대작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하고 소탈해서 놀란 한편, 좌상답다 싶어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잠시 나름의 감상에 젖어 있던 신은, 오랜 만에 집을 보고 감격에 겨워 하는 채경 때문에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어 하는 채경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신은 가마의 휘장을 걷어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채경의 부모가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오늘만큼은 좌상이 아닌 신의 장인어른으로서 사위를 맞이하는 우현과,

최종 간택 이후 국혼 치르는 중에 세 번 뵈었던 장모가 두 부부를 맞으러 나왔다.

 

며칠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며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좌상 부부였으나,

도착 시간을 잘못 전갈 받아 마중이 늦었다며 송구하다는 인사가 먼저 오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왕을 맞이하고 싶었던 은형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하늘 같은 임금님을 잠시라도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이, 마중 나오지 못한 것이..

그래서 허리가 절반으로 꺾어지며 사죄 인사를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어색하기 만한 채경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은근한 위압감으로 채경을 압도하던 아버지와 달리, 늘 무섭고 엄했던 어머니가,

임금님 앞에서는 한낱 가녀린 귀부인으로 보인다는 게.. 안쓰럽고 어색했다.

놀란 마음에 어머니를 쳐다보느라, 신이 당혹스러워 한다는 건 또 몰라 본 채경.

아내가 장모를 말려 주길 바랬지만, 채경은 딴 데 정신이 팔린 듯 신은 쳐다도 안 본다.

다른 부인들이 자신을 이렇게 대우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신이지만,

부부인(府夫人, 임금의 장모)은 달랐다. 채경의 어머니이자, 그의 가족이고, 어른이었다.

품계로 따져선 그보다 높은 이 없겠지만, 예법상 부부인은 그의 웃어른이 분명했다.

그런 분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송구하다며 사죄 인사를 올리는 게 여간 당혹스럽지 않았다.

 

그런 신의 심정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챈 이는 우현이었다.

마음으로야 사위를 맞이하는 장인어른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신을 마주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신하된 도리를 찾게 되었다.

하여, 연신 사죄를 올리는 아내를 뒤로 물리고 신과 채경을 안으로 안내했다.

아내는 계속해서 송구하고 민망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뒤쫓아왔지만,

일단은 집안으로 들어와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식솔들 앞에서 신을 소개했다.

난생 처음으로 임금님을 면전에서 보게 된 우현의 종복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예우였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절을 올리는 건 장관이었다.

채경에게는 너무 보고 싶었고, 그리웠던 식구들이라 감회가 더 새로웠다.

 

그녀가 떠나 있는 동안 달라진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녀의 자리가 비어 버렸다는.. 이 댁의 여식이 시집을 가 버렸다는 사실이 달라졌을 뿐..

이 집안을 활기차게 만드는 주역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면서 남게 되신 부모님에게 힘이 되어 주고 수족이 되어 줄 고마운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게 돼서 얼마나 섭섭했던지.. 이들이 알아줄지 모르겠다.

 

어쨌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웃으면서 눈물이 났다.

왕비가 된 지금이.. 이제는 집이 되어 버린 궁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녀를 감싸 주었던 식구들을 보게 되니 가슴이 뿌듯하고 기뻤다.

그래서 주책 맞게 눈물이 났다. 눈물 흘리는 채경을 보고 신이 깜짝 놀랐으나,

채경은 씨익 웃으면서 이 눈물이 나쁜 의미가 아님을 보여 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신에게 절을 올리고 일어서는 이들 중, 향이에게로 다가갔다.

채경이 다가오자 화들짝 놀라 눈이 튀어 나올 것처럼 커진 향이는,

임금님과 채경, 그리고 옆에 선 동료들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향이가 더 당황하기도 전에 채경이 그녀의 손을 잡아 버렸고,

채경에게 손이 잡힌 채 경직돼 버린 향이는 채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두 살 위였던.. 언니처럼 늘 자신을 챙겨 주던.. 자매 같았던 몸종아이..

입궐할 때도 마지막까지 그 길을 함께해 줬던 향이가 채경은 참으로 반가웠다.

그래서 두 손을 꼭 잡아 주었고, 결국은 품에 안아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에 향이는 당황했다. 양반댁 규수답지 않게 소탈하고 재미나던 애기씨가

왕비가 되어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자신을 덥석 안으시니 기함을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체 높은 왕비님이라는 생각은 금세 날아가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애기씨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채경을 마주 안으며 애기씨.. 애기씨..”를 연발하며 눈물을 찍어댔다.

그 모습 보며 여기저기에서 반가움의 눈물이 여종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누가 뭐라 해도 채경을 입히고 먹이고 돌보며 키워온 보모들이 아니었던가?

나이가 많든 적든간에, 채경을 동생처럼, 딸처럼 보듬어 온 여인들이었다.

다른 양반댁 아가씨들처럼 콧대나 세우며 아랫것들 무시하던 애기씨도 아니었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 진심으로 어울릴 줄 아는 맘 착한 애기씨였다.

그 고운 마음씨로 평생을 행복하게 살길 바랬다. 세상의 잣대로 평가절하되지 않길 바랬다.

 

세상 사람들이야 여자라고 하면 높은 학식과, 조신한 성품에, 단아한 외모를 최고로 치겠지만,

그들의 애기씨는 그런 세상의 잣대로 평가하기에는 훨씬 더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애기씨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길 바랬다.

그러던 차에 간택령에 응하러 애기씨가 입궁한 후로, 하루하루 손꼽아 애기씨의 소식을 기다렸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문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애기씨가 남아 최종 간택되었다는 소식에, 도성이 떠나가라 환호를 질렀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임금님께서, 우리의 임금님께서, 우리 애기씨를 알아봐 준 것이 기쁘고 감사했다.

 

세상 누구보다 남을 배려하고 마음 씀씀이 착한 우리 애기씨..

함께 있는 모든 이들을 웃게 할 수 있는 곱디 고운 애기씨..

다른 이에게 보내고 싶지 않을 만큼 애틋하고 소중했던 애기씨..

 

그랬던 애기씨가.. 왕비님이 되어 나타나셨다.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여인이 되어 나타나셨다.

그런데 그 감격을 실감하기도 전에,

애기씨는 예전과 똑같은 애기씨로 돌아오셨다.

높디 높은 왕비님으로 우러러 받들기도 전에,

예전처럼 우리와 눈높이를 같이 하던 애기씨로 돌아오셨다.

어쩌면.. 우리 애기씨는 변한 적조차 없는지도 모르겠다.

왕비님이 되었다고 해서 본래의 채경을 버린 건 아니었는지도..

 

예전에는 행여나 다른 사람들이 애기씨의 실체를 알고 손가락질 할까 걱정이었으나,

이제는 우리만 알고 있었던 애기씨의 실체가 운우국 백성들에게 신뢰를 안겨 주고 있었다.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맘씨 좋은 왕비님.. 착한 왕비님으로..

 

그렇게 본래의 성품을 버리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장한 우리 애기씨..

그런 애기씨의 금의환향에 모두들 눈시울을 붉혔고, 어느새 채경을 둘러싼 식솔들은 울면서 웃었다.

그 모습 보며 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우현은 상전을 식구처럼 생각하는 식솔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임금을 맞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은형은 식솔들과 같은 마음으로 딸아이의 귀가를 환영했다.

 

 

그렇게 눈물바람으로 시작된 신의 처가 방문은 안방으로 옮겨져 계속되었다.

부모님을 여읜 후로는 할마마마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상석을 양보한 적 없었던 신은,

실로 오랜 만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에게 상석을 내어 주고 절을 올리게 되었다.

우현과 은형이 극구 사양했지만, 채경의 눈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날리며 절하는 신.

그런 신이 고맙고 예뻐 보인 채경은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걸고 부모님께 인사 올렸다.

두 신혼부부는 아무렇지 않게 절을 올리는데, 절 받는 사람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마냥

불편하고 어색한.. 조금은 이상한 자리였다. 그래도 으리으리한 궁이 아닌,

평범한 가옥의 그리 크지 않은 방에서 마주한 네 사람은 한 식구처럼 자연스러웠다.

치렁치렁한 궁중 복식을 벗어 던진 신과 채경은 처가댁에 놀러 온 신혼부부 같았고,

신하라는 허울을 벗고 상석에 앉아 두 아이의 인사를 받는 좌상 부부는 아비 어미 같았다.

 

곧이어 간단한 다과상이 내어져 나와 차를 마시고 과일을 들며 오손도손 대화도 나누었다.

이야기는 주로 채경과 우현이 주도했고, 신은 주의깊게 얘기를 들으며 간간이 미소 지었다.

은형은 채경이 너무 나대지 않나 걱정하며 신의 표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채경과 우현이야 임금님을 자주 대했으니 별 거부감이 없는 상태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비슷한 집안에 시집 보냈다 해도 사위가 편치 않았을 텐데, 그 상대가 임금이니 오죽하겠는가?

분명 웃어른이지만 편히 대할 수 없는.. 사위라기보단 임금님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튀지 않게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마음은 내내 긴장감으로 인해 두근거렸다.

하여, 신과 채경이 안방에서 나가 채경의 방으로 물러가겠다 했을 땐,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티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딸 내외를 미소로 배웅해 주었고,

신과 채경이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제서야 주저앉아 버렸다.

우현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주저앉아 버린 아내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 긴장했느냐며 아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데, 아내의 몸은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첫 날 첫 만남에 벌써 이리 긴장하면, 앞으로 사흘은 어찌 버틸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놀란 아내를 달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게 급선무였다.

진정을 시켜 놔야 두 아이들과 함께 먹을 저녁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부모님이 신과의 대면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건 꿈에도 모르고,

채경은 자신의 집에 와 있는 신을 훔쳐 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같이 대문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아버지 어머니 방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눌 때도 그렇고,

이리 마당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 상황 자체도 너무 설레었다.

자신의 일상이었고, 전부였던 이 공간에 폐하가 계시다는 게.. 신기했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

매순간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었다. 이 풍경에 폐하가 있는 매순간을.. 담고 싶었다.

워낙 대단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분이라 우리집에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지나치고 계신지 궁금하지만,

그저 이리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제일 떨리는 순간이 다가왔다.

 

폐하께서 내 방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이 도래했다.

 

 

문을 열어 폐하를 먼저 들게 하고, 채경은 뒤따라 들어갔다.

문가에 서서 신이 둘러보는 걸 훔쳐 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채경.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어 온몸이 굳어 버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건 더 어색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방을 둘러보고 있는 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보는데..

 

 

 

채경: 방이 좀.. 작지요?

 

: (두리번거리던 시선 멈칫..)

 

채경: (자기 방이 작은 것 같아 지레 찔리는 마음에, 신이 멈칫 하자 도리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며) 너무 작지 않습니까?

 

: (빙그르르 몸을 돌려 채경을 본다.)

 

채경: (신이 마주 보자 더더욱 시선을 못 맞추고 멋쩍게 발끝을 보며) 사랑채로.. 옮기라 할까요?

 

: 싫어.

 

채경: (싫다는 말에 고개 들며) 왜 싫으세요? 거기가 훨씬 넓은데..

 

: 거긴 손님들이 거하는 곳이잖아.

 

채경: ??

 

: 난 여기 손님으로 온 거 아니야. 식구로 왔으니까, 식구들이 거하는 방에 있다 갈 거야.

 

채경: ..

 

: (입가에 미소 걸고 제자리걸음 하며) 여기가.. 당신 방이라고?

 

채경: ……..

 

: (이제는 대놓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여기서 자란 거야?

 

채경: .. 입궐하기 전까지 여기서 지냈어요..

 

: 다들.. 이런 방에서 사나?

 

채경: ???

 

: 여자 방은.. 처음이야.

 

채경: ???

 

: 궁에는 여인들이 쓰는 방이라 해도, 그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곳이라 여자 방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눈으로 방안을 휘 둘러보고는) 여기처럼 보통 여인들이 쓰는 방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다들 이렇게 해놓고 사나?

 

채경: 다들 이렇게 살지 않죠.. 저는 형편이 좋은 편이잖아요.

 

: ..

 

채경: 폐하 보시기엔 작고 소박하겠지만, 이렇게 내 방을 갖고 사는 여인이 이 땅에 몇 안 될 거예요.

 

: ..

 

채경: 지난 번 그 촌락에서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일반 백성들이 어찌 사는지..

 

: (촌락이라는 단어가 채경의 입에서 나오자, 순간 멈칫 한다. 그래서 금방 화제를 바꾸듯) 그럼 사흘간 여기서 지내면 되나?

 

채경: .. 헌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 괜찮다니까..

 

채경: 불편하실 텐데..

 

: 좁아서?

 

채경: .. 궁에 있는 방이 열 배는 크잖아요.

 

: 그래서.. 그대는 궁이 편했어?

 

채경: ???

 

: 방이 넓고 커서 편했냐구~

 

채경: ..

 

: 방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여기가 맘에 드나 안 드나..가 훨씬 더 중요해.

 

채경: ………………………………………이 방이.. 마음에 드십니까?

 

: (그저 웃는)

 

채경: (웃음의 의미를 파악 못한)

 

: (방에 편안하게 앉으며) 일단.. 거부감은 안 들어~

 

채경: 무슨.. 뜻이에요?

 

: 좀 더 지내봐야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그대 냄새가 가득해서 거부감은 안 들어. 왠지.. 좋아질 것 같아.

 

채경: ..

 

: (채경 올려다보며) 내가 이 방이랑 친해질 수 있도록 힘 써 봐~

 

채경: (피식 웃는)  

 

: ^^

 

채경: (조금은 긴장이 풀려 편안히 숨을 쉰다.)

 

: (채경의 앉은뱅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이 방에서 내 생각도 했어?

 

채경: (신 보는)

 

: .. 내 방에서 그대 생각 많이 했는데..

 

채경: ..

 

: 어디서 뭘 하고 있나.. 다시 만날 순 있나.. 내가 꿈꾼 건 아닌가..

 

채경: ..

 

: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굉장히 답답했어.

어딜 바라보고 그리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틈만 나면 궁 밖을 쳐다봤어.

궁 밖 어딘가엔 있겠지.. 실체는 있을 거야.. 내가 꿈꾼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염없이 기다렸어. 그 큰 방에 홀로 앉아서..

 

채경: ..

 

: 나만 그런 거라면 왠지 억울할 것 같아. (채경 보며) 여기서.. 내 생각 했었어?

 

채경: ..

 

: 그래도 그댄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나보단 덜 답답하지 않았어?

 

채경: (신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으며 낮은 한숨을 내쉰다.)

 

: ??? (웬 한숨??)

 

채경: 그래서.. 제 입장이 더 나았을 것 같아요?

 

: (채경 보는)

 

채경: 여기서.. 폐하 생각을 했었냐구요?

 

: ..

 

채경: 했죠~ 아주 많이.. 틈만 나면.. 폐하 생각 했어요, 저도..

 

: 근데 표정이 왜 그래? (10년은 늙어 보이잖아..)

 

채경: 그때 생각하면 답답해서요..

 

: 뭐가 답답해? 나보다 더 답답했겠어? 난 아무것도 모르고 걱정만 하다가, 변방으로 도망까지 쳤는데..

그댄 나 속이고 내 뒤통수 칠 생각 하고 있었잖아. (말하다 보니 점점 더 열 받는다. 그때 생각 하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채경: (신 보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튀어 나오고 눈은 가재미처럼 작아진다.)

 

:눈빛이 왜 그리 오만불손해? 그 튀어 나온 입은 또 뭐야? 내가 없는 말 했어?’

 

채경: 폐하께 솔직하지 못했던 건 송구하지만.. 말씀 안 드리는 동안 제가 희희낙낙했던 건 아니에요!

 

: (오호~ 이건 또 무슨 반응이지? 내 말에 반박하시겠다~ 어디 한번 그 변명 들어볼까?)

 

채경: 폐하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부터 입궐하기 전까지 하루도 마음 편해 본 적 없어요.

 

: ? 내 정체를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속 편하지 않아?

 

채경: (속 편한 소리만 하고 계시네~) 일개 백성일 뿐이었던 제게 폐하가 어떤 존재인지 알기나 하십니까?

 

: (모르겠다. 그래서 채경을 멀뚱히 쳐다본다.)

 

채경: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고, 손이 닿을 수도 없는 하늘 위의 존재나 다름 없어요.  

나 같은 사람하고는 평생 인연이 없는 분이시고, 나 같은 사람하고는 엮여서도 안 되는 고귀한 분이시라구요..

이 땅의 하 많은 백성들 중 한 사람.. 폐하께서 알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살다 갈 사람 중 하나가 저였어요.

그렇게 다른데.. 인연이 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아는데.. 제가 속 편하게 폐하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 ..

 

채경: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 만나선 안 된다 생각했어요.

다시 만나 마음이 깊어지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저도.. 처음이었으니까요..

 

: ..

 

채경: 보고 싶고.. 닿고 싶고.. 궁금하고.. 욕심만 커지고.. 나는..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포기가 안 됐어요..

 

: ..

 

채경: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욕심에 졌어요..

 

: (채경 보는)

 

채경: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언감생심 꿈도 꿔선 안 되는 분이지만.. 한번 다가가 보자.. 결심했어요.

 

: ..

 

채경: 하여.. 폐하께 말씀 드리지 못하고, 혼자 그런 결정을 내리고, 몰래 궁으로 들어간 거예요.

 

: ..

 

채경: 제가 할 수 있는 게.. 폐하께 닿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용기 내지 않으면.. 욕심 내지 않으면.. 이치에 따라, 제 마음을 접어야 했으니까요..

 

: ..

 

채경: 누가 봐도 하자가 많은 여자로서.. 왕비를 꿈꾼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제 마음을 들키지 않아야 했어요. 그땐.. 제 욕심이 부끄러웠으니까요..

 

: ..

 

채경: 제가 마음에 담은 이가 폐하이니, 그 곁으로 가려면 왕비가 되는 길밖에 없지 않느냐..

내가 굳이 안 어울리는 왕비가 되려고 하는 건, 폐하의 아내가 왕비이기 때문이지 않느냐..

다른 욕심은 없으니 부끄럽다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 지는 거다.. 그렇게 절 격려했어요.

 

: ..

 

채경: 그게.. 폐하께는 뒤통수를 치는 일이었을지 모르나.. 제겐 최선이었어요.

 

: (채경 보는)

 

채경: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동안에도 늘 불안했어요.

저는.. 세상이 요구하는 왕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자신이 없었어요. 폐하를 향해 내디딘 걸음이 폐하께 닿을 수 있을지..

제 욕심이 그저 바램으로 끝나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어요..

 

: ..

 

채경: (신 보는)

 

: (채경 마주 보는) 

 

채경: 이래도.. 제가 속 편하게 폐하 뒤통수 칠 모략이나 꾸미는 간악한 여자처럼 보이십니까?

 

: ..

 

채경: 이 자리를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제 힘으로 폐하 곁으로 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세울 것 없는 제가 모두에게 인정 받고 얻은 자리라,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어쩜 그리 생각하십니까?

 

: (침 삼키는.. 조금 미안해져서 시선을 살짝 내리는..)

 

채경: 저도 잘한 건 없지만..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억울합니다.

 

: ..

 

채경: 그러니.. 폐하께서도 노여움을 푸시고, 저를 이해해 주세요..

 

: ..

 

채경: 이곳에서.. 이 작은 방에서.. 폐하를 얻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저를 이해해 주세요.

 

: (채경 보는)

 

채경: (신 보는)

 

: ………………………………………………………….(결국 웃고 만다.)

 

채경: ??? (웃음의 의미를 당장은 알아채지 못한다.)

 

: (웃는 얼굴로, 약간은 나른한 눈빛으로 채경을 바라본다.)

 

채경: ..

 

: 그럼.. 그대도 감회가 새롭겠군..

 

채경: ???

 

: 내가.. 내 방에 그대가 있는 모습을 보고 남몰래 감격에 겨웠던 것처럼..

그대도 홀로 그리워만 하던 나를 이 방에서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 남다르지 않아?

 

채경: (숨 삼키는)  

 

: 그럼.. 우린 비긴 건가?

 

채경: ……………………(피식 웃는)

 

: ^^

 

채경: 궁에서.. 저 만났을 때 감격하셨어요?

 

: (끄덕끄덕)

 

채경: 처음엔.. 화만 내셨던 것 같은데..

 

: 처음 봤을 땐 화낼 만한 상황이었잖아. 머리는 산발이고, 온몸엔 상처 투성이였으니.. 그거 보고 웃을 마음은 안 들었어.

 

채경: 그래도.. 결국엔 제가 궁에 있어서 좋으셨던 거죠?

 

: (채경 보는)

 

채경: 제가 폐하를 만나러 궁에 가서.. 좋으셨죠?

 

: 그걸 말이라고 해?

 

채경: 그러게요.. 오늘 너무 당연한 말을 많이 하네요..

 

: () 아무래도 들떴나 봐~ 평소 안 하던 실수를 다 하고.. (채경 보며) 집에 와서 좋아?

 

채경: (신 보는)

 

: …………..나도.. 당연한 걸 물은 건가?

 

채경: …………………………..

 

: (피식) 뭐가 그렇게 좋아?

 

채경: 그냥.. 다 좋습니다.

 

: 혼자만 좋아하지 말고 나도 좋아할 수 있게 해 봐~

 

채경: 정말.. 어려운 걸 요구하시네요.

 

: 이 집에서 이런 얘기 편하게 할 사람은 그대밖에 없잖아.

그대가 궁에서 날 의지했던 것처럼, 나도 여기선 그대밖에 없어.

그러니까 날 안심시켜 봐. 다시 또 오고 싶게 만들어 봐.

 

채경: (침을 꿀꺽 삼키는.. 부탁을 하는 상황에서도 저리 당당할 수 있는 걸 보니, 임금님은 임금님인 것 같다.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편안하고 기분 좋다고 여기실까..?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다. 궁처럼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궁처럼 볼거리가 많은 곳도 아니고, 할거리가 딱히 있는 곳도 아닌데..)

 

: (고민에 빠진 채경을 보며 혼자 피식 웃는다. 이렇게 채경의 방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걸 그의 아내는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을 덜어줄 생각은 안 한다. 방금 전 채경이 고백한 내용에 대해 미안함이 채 가시지도 않았기 때문에, 채경이 다른 곳에 신경을 쏟는 게 편했다. 그래서 채경이 고민하도록 내버려 둔다.)

 

채경: (신 보는.. 썩 내키진 않지만, 좋아하실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게 제일 무난했다. 그래서..) .. 집 구경 하시겠습니까?

 

: (채경 보는)

 

채경: (두근두근 떨리는 심정으로 신을 본다.)

 

 

 

 

 

 

 

 

#3. 잠시 후

 

 

 

궁궐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다른 양반댁만큼의 규모도 안 되지만, 오랜 고택의 풍미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쌓인 세월의 흔적이 빚어 낸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풍경은, 신에게는 제법 즐거운 눈요기가 되어 주었다.

게다가 집안 곳곳에 남겨진 채경의 추억이 곁들여지니, 집안 구경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난 탐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뒤뜰 담장에 남아 있는 장풍의 흔적과, 담 넘으려고 도움닫기 하다가 깨뜨린 장독대,

하늘을 날다가 미끄러졌다는 안채 지붕, 봄 여름 가을 겨울 소박하게 아름다운 후원,

동생을 놀려 주고 도망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댓돌, 수시로 올라탔다는 감나무,

평생 출입하지 않다가 왕비 간택 준비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인연을 맺었다는 서고,

천둥번개 치는 밤이면 이불 뒤집어 쓰고 모여 앉아 무서운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는 끝순이 방,

공력 조절하려고 연습하다가 무수히 깨먹었다는 기왓장, 단짝 소은과 비밀 얘기 나누던 단풍나무,

시간만 나면 식구들이 단란하게 다과를 즐겼다는 정자까지.. 채경의 과거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눈앞에 어린 채경이 담을 넘고 지붕에서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찧는 것 같았다.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채경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이 정말 그녀의 과거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언젠가 채경이 궁에 들어와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말을, 이제서야 확실히 이해할 것 수 있을 같았다.

정말로 이곳에 와, 그녀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실체 없던 그녀의 과거가 현재가 되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과거를 규정짓는 최고의 장소로 안내되었다.

 

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그마한 건물이 있었다.

 

낮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낮은 천장으로 된 작은 방이 나타났다.

 

잡다한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방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대대로 창고로 쓰이던 곳이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창고로 쓰기엔 규모가 너무 작고, 너무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채경은, 이곳은 이 집안에 태어난 아이들이 창고로 쓰는 곳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 아이들의 창고라니..?

 

채경: 말 그대로 이 집안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쌓아 두고 숨겨 두고 버리는 창고예요.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서 붓 하나를 집어 들고는 신에게 보여 주며) 이건 제 거예요. 어릴 때 제가 쓰던 거예요.

 

: 그걸.. 왜 여기다 뒀어?

 

채경: 글 쓰기가 싫어서요..

 

: ???

 

채경: 혜민사에서 워낙 방만하게 놀다가 늦은 나이에 도성으로 내려와 공부하려니 죽을 맛이더라구요..

어머니가 열심히 공부하라고 비싼 붓까지 구해 주셨는데, 정말 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여기다 숨겼어요.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채경: 하루는 그냥 넘어갔는데, 아버지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깜빡 한 거예요..

 

: ???

 

채경: 잃어 버렸다는 제 말을 어머니는 믿으셨는데, 아버지는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바로 아셨어요.

다 알고 넘어가 주시는데 너무 민망하더라구요.. 그래서 당장 찾아다가 글 공부 했죠 뭐..

 

: 근데.. 왜 붓이 여기 있어? 찾아갔다면서..?

 

채경: 그 뒤로 더 이상 이 붓을 쓸 수 없게 됐을 때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여기다 버렸어요.

 

: ..

 

채경: 그런 식으로 버려진 물건들이 많아요. 아버지가 어릴 때 버리거나 숨긴 것들도 있고..

그래서 어렸을 땐 호경이랑 아버지 물건, 할아버지 물건 찾는 놀이도 많이 했었어요.

 

: (채경의 얘기에 다시금 작은 방안을 둘러본다.)

 

채경: 근데 제가 보여 드리고 싶은 건 여기가 아니에요.

 

: ???

 

채경: 따라오세요. (하고는 어딘가를 향해 간다.)

 

: (채경 보는)

 

채경: (방 끝에 놓여 있는 병풍 뒤로 들어가려다가 신에게 눈짓 한다. 따라오라고..)

 

: (고개 갸웃하며 채경을 뒤따라 간다. 그리고.. 병풍 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채경: (벽에 붙어 있는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 뭐 하는 거야?

 

채경: 이곳의 진짜 비밀을 보여 주려구요..

 

: ??

 

채경: 따라오세요~ (하고는 천장을 쑥 밀어 올리고는 사라진다.)

 

: (채경이 오르던 사다리 밑으로 가서 천장을 올려다본다.)

 

채경: (천장의 뚫린 구멍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는) 올라오세요~

 

: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가, 사다리로 손을 뻗는다. 그러다가 멈칫..)

 

채경: (신이 망설이는 것 같아) 이래 봬도 튼튼해요.   

 

: (채경을 흘끔 올려다봤다가 결국 사다리를 통하지 않고 가볍게 바닥을 차서 그대로 솟구쳐 오른다.)

 

채경: (신이 수직 부양해서 날아올라오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 (천장 구멍을 무사히 빠져 나오는가 싶었는데, 다락방의 천장이 낮은 걸 예상하지 못하고 계속 날아 오르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고 만다.) ‘!!’

 

채경: (엉덩방아를 찧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신이 구멍에 반쯤 걸린 채 머리를 부여잡고 아파하자 풋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만다.)

 

: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며 채경을 째려 본다. 남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는데, 아내 된다는 사람이 저리 웃어도 되나? 순간적으로 서러움이 복받친다.)

 

채경: (큭큭대며) 그러게 사다리로 올라오라 하지 않았습니까?

 

: (웃는 채경이 얄미워 입술을 쑥 내민 채 아무 대꾸하지 않고 다락방에 안착한다.)

 

채경: (신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 웃음을 참아 보려 하지만 한번 터진 웃음이 쉬이 그치질 않는다. 그래서 입술을 깨물어도 보는데.. 계속 실실 웃음이 흘러 나온다.)

 

: (눈치 없이 웃고만 있는 채경에게 눈빛 광선을 쏘아 준다.)

 

채경: (흠흠.. 숨을 고르며, 신의 날선 시선을 피하기 위해 무릎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간다. 다락방 한쪽 벽면에는 자그마한 창이 있었다.)

 

: (눈으로 채경 쫓는)

 

채경: (창가에 턱을 괴고 밖을 살핀다.)

 

: 뭐 해?

 

채경: (신 돌아보며) 여기로 와 보실래요?

 

: (미심쩍은 눈빛을 쏘다가, 채경에게 다가간다. 천장이 너무 낮아 일어서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낮은 자세로 움직인다.)

 

채경: (신이 곁에 오자 옆으로 비켜나며 자리를 내어 준다.)

 

: (채경이 뭘 봤나 싶어 밖을 보는데, 특별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채경: 연못 옆에 감나무 보이세요?

 

: (채경이 말하는 감나무를 본다. 하도 올라타서 성한 가지가 없다는 감나무를..)

 

채경: 요즘 같은 늦가을엔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감을 먹으러 까치가 오곤 해요.

 

: (채경의 얘기를 들으며 나무 끝에 달려 있는 감을 바라본다.)

 

채경: (창틀에 턱을 괴고는 옛날을 추억하듯) 호경이랑 까치 보겠다고 하루 종일 여기서 기다린 적도 있어요.

밖에선 우리가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는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마냥 여기 이렇게 앉아서 까치를 기다렸어요.

 

: 그래서.. 까치는 봤어?

 

채경: (도리도리) 못 봤어요.. 나중에 우릴 찾으신 아버지한테 혼만 났어요..

 

: (까치도 못 보고 혼만 났다고 말하는 채경의 표정이 행복해 보여 조금 의아하다. 그대에게 과거의 일을 추억하는 건, 그 일이 결과가 나쁘든 좋든 상관 없이 행복한 건가 궁금해진다. 뭐든 그렇게 애잔하게 떠올릴 수 있는 건지.. 자신에게 어릴 적 추억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대만 그런 건지.. 왠지 모르게 약간의 심술이 솟아난다.)

 

채경: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창 밖 감나무를 바라본다.)

 

: …………………………………..어릴 적 추억이.. 여기 다 있는 거네?

 

채경: ..

 

: 여기서..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게 만든 하 많은 일들이 말야..

 

채경: .. (그래서 폐하께 이곳을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제 보물창고를 열어 보이고 싶었어요.)

 

: 하지만 그댄 어른이 됐잖아.

 

채경: ??? (신 보는)

 

: (채경 보며) 이제 더는 어린애가 아니잖아.

 

채경: (멀뚱멀뚱)

 

:그러니까 과거의 행복 속으로만 달려가지 마. 내가 모르는 그대의 시간 속으로 혼자 날아가지 마.’

 

채경: (신의 눈빛이 왠지 좀 이상한 것 같아) 폐하.. (!!!)

 

 

 

, 채경의 손목을 잡아채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채경을 다락방 바닥에 눕히고 그녀 위로 올라탄다.

 

 

 

채경: (침을 꿀꺽 삼키며 신을 올려다본다.)

 

: (채경을 내려다본다.)

 

채경:폐하..’

 

: 그대가 어렸다면.. 이런 건 못했을 거야.

 

채경: ???

 

: 어렸던 그대가 여기서 이런 건 안 했을 거야.

 

채경: ..

 

: (채경의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내린다.)

 

채경: (숨을 들이키는..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곳에서 폐하와 이런다는 게, 왠지 모르게 외설스럽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이성과 반대로, 몸은 그 외설스러운 생각을 하는 바람에 금방 달아오르고 마는데..)

 

: (채경의 코앞에서) 그러니까.. 어렸던 신채경은 이쯤에서 안녕 해..

 

채경: (침 삼키는..)

 

: (눈을 감고 채경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채경: (당혹스러운 마음에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그러다가 이내 눈을 감고 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데..)

 

 

 

 


출처 : 시나리오 창작방
글쓴이 : 쏭기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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